우리도 개헌해서 남북평화체제로 가자 [뉴스] ·
조정식 국회의장(왼쪽부터),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15일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컨벤션홀에서 열린 6ㆍ15 남북정상회담 26주년 기념식 및 특별강연 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2026.6.15 [공동취재] 연합뉴스
우리도 개헌해서 남북평화체제로 가자.
지난 15일은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마주 앉아 화해와 협력을 약속했던 6·15 남북 공동선언 26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러나 성대한 기념식을 치러야 할 날, 한반도를 감싼 것은 가혹하리만치 무거운 냉기뿐이었다. 26년 전 온 겨레를 설레게 했던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은 사라지고, 서로를 향한 날 선 적대감만 남은 지금의 남북관계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참담한 비애를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남북이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 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나 답답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실마리를 남측이 아닌 북측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북한의 변화는 실로 놀라운 지경이다. 2023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북 관계를 민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 로 선언했는데 이는 남한이 더 이상 동족으로서 언젠가 하나가 되어야 할 국가가 아니고 완전히 다른 국가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를 반영하여 북한은 2026년 3월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했는데 그 핵심은 통일 조항의 완전한 삭제, 영토 조항의 신설, 그리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의 핵무력 지휘권 독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북한 헌법 제2조에 신설된 영토 조항이다. 새 헌법은 북한의 영토가 북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 남쪽으로 대한민국과 접하고 있는 영토와 그에 기초하여 설정된 영해와 영공을 포함한다”고 규정했다. 북한이 1948년 정권 수립 이후 처음으로 자국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한반도 전체가 아닌 북측 지역으로 한정했다는 뜻이다. 동시에 헌법 서문과 9조에 있던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통일 업적’이나 ‘북반부의 사회주의 완전 승리’,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 조국통일 실현을 위한 투쟁’ 등이 개정 헌법에서는 삭제됐다. 북한 체제가 80년 가까이 유지해 온 ‘통일 정당성’을 적어도 헌법에서는 지워버린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모든 것이 북한이 대한민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한 일일까?
필자는 북한이 대남통일노선을 공식으로 폐기했다고 해석한다. 김정은은 6·15 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민족화해협의회 등 대남기구를 전면적으로 정리하는 한편 경의선·동해선 폭파 등을 실행함으로써 더 이상 남한과의 통일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변화가 말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북한 김정은은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매우 다른 사람이며, 남한의 청년층과 비슷하게 민족의식이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령 그가 말로는 남쪽을 위협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남한과 협력한 미군 특수부대가 자신을 제거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의 표출인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북한의 변화가 사실이라면 전문가들의 정확한 분석과 우리 측의 민감한 변화를 요구한다. 훗날 역사가들이 이재명 정부를 평가하면서 김정은은 더 이상 남한과 대결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는데도 남한만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결을 고집했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고 2년 차로 접어드는 이때 남북관계는 성숙한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다른 국가로서 더 성숙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며 그 핵심은 거리 두기 이다. 불멸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좋은 울타리가 좋은 이웃을 만든다 (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며 명확한 경계선과 영역 존중이 오히려 평화로운 이웃 관계를 유지하는 관건임을 설파했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 딜레마 (Hedgehog s dilemma)에서 너무 가까이 붙으면 가시에 찔린다고 했다. 서양의 오래된 격언에는 친밀함은 경멸을 낳는다(Familiarity breeds contempt) 라는 말이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1박 2일 국빈 방문을 마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9일 평양국제비행장에서 전용기에 오르기 전 대화하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2026.6.10 연합뉴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을 긋는 것이 오히려 평화를 지키는 지름길이다. 나와 타인의 경계를 존중할 때 비로소 건강하고 오래 가는 관계가 형성된다. 이 평범한 인간관계의 진리는 오늘날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제는 민족이라는 감정적 환상에서 벗어나, 서로를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국가체제로 인정하는 상호존중 이 필요하다. 분단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을 긋는 것이 오히려 평화를 지키는 지름길이다. 거리를 둔다는 것이 단절이나 적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북한이 변화하는 만큼 우리도 변화해야 한다. 우리는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기필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쟁보다는 백배 천배 낫기 때문이다. 법이란 것이 고생대 삼엽충처럼 화석에 박제된 영구불변의 것이 아니라면, 또 법이란 것이 ‘현실을 반영하여 물처럼 흐르는 것’이라 한다면 현실에 맞지 않는 법은 당연히 고쳐야 한다. 우리 헌법의 영토 조항은 헌법이 제정된 이래 단 한번도 실효성이 없었으며 오히려 동족상잔의 한 원인이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폐기되어야 마땅하다고 할 것이며 조국이 통일이 되었을 때 다시 복원하면 된다
한반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할 때마다 우리는 ‘북핵 위협’이라는 거대한 공포와 마주한다. 대결과 압박, 선제타격과 응징보복이라는 거친 언사들이 안보 담론을 지배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냉엄한 진실이 있다. 북한의 핵무기는 기본적으로 체제 생존을 위한 ‘방어용’ 수단이며, 역설적으로 ‘결코 쓸 수 없는 무기’라는 점이다. 핵무기는 현대 국제정치에서 최후의 억제력이다. 절대적 열세에 놓인 재래식 군사력과 경제적 고립 속에서 북한이 선택한 핵 개발은 공격이나 침략이 아닌, 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에 가깝다. 북한 지휘부 역시 잘 알고 있다. 핵을 먼저 사용하는 순간, 한미 연합전력의 압도적인 보복에 의해 정권의 종말과 자멸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북핵은 실전을 위한 공격 무기가 아니라,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상호확증파괴(MAD)’의 논리에 기반한 철저한 방어용 무기다. 만약 북핵이 ‘쓸 수 없는 방어용 무기’라면, 이를 해결하는 방식 또한 군사적 대결이나 제재 일변도여서는 안 된다. 지난 수십 년간 입증되었듯, 강대강의 군사적 압박은 북한의 핵 능력을 고도화시키는 명분만 제공했을 뿐이다. 적대 정책이 심화될수록 북한은 생존을 위해 핵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제는 공포의 균형에 기대어 막대한 군비경쟁을 벌이는 소모적 대결을 끝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앞으로 후손 대대로 살아갈 이 땅에 평화와 번영을 담보할 새로운 남북관계를 정립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첫걸음은 남북 간의 실질적인 평화협상 재개와 ‘남북불가침조약’의 체결이다. 서로가 침략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 남과 북이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안보 우려를 해소할 때, 비로소 평화의 문이 열릴 수 있다.
더 나아가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북미수교’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북한이 핵을 쥐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으로부터 느끼는 체제 위협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을 정상 국가로 인정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북한에게 핵을 내려놓거나 동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명분이자 현실적인 보상이다. 북미 관계 정상화는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로 나아가는 결정적 열쇠다. 안보는 최첨단 미사일, 핵잠수함, 또 핵무기의 보유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상대방을 코너로 몰아넣는 압박은 평화가 아닌 파멸의 위험을 키울 뿐이다. 북핵의 방어적 성격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대결이 아닌 협상으로, 군사적 긴장 대신 남북평화협정, 남북불가침조약과 북미수교라는 평화적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한반도에 사는 구성원 모두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유일하고도 현실적인 길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다. 북한의 신뢰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남북평화는 요원하다. 그 첫걸음이 우리 대한민국이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고 그 첫걸음이 헌법 영토조항 개정이다. 남북평화협정체결과 북미수교로 가는 길이 물론 쉽거나 평탄한 길은 아니다. 그러나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나아가다보면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다.이성로 국립경국대 명예교수 srl615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