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시간표로 세상을 바꾼 남자, 조지 브래드쇼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853년 9월 6일 노르웨이 오슬로의 낡은 묘지에 영국인 한 명이 조용히 묻혔다. 이름은 조지 브래드쇼(George Bradshaw, 1801~1853). 당시 52세의 인쇄업자는 여행 중 콜레라에 걸려 단 8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후였다. 그가 죽은 지 백 년이 넘도록 영국 사람들은 기차역에서 이렇게 말했다. 브래드쇼 한 부 주세요.
브래드쇼는 사람 이름이었지만, 동시에 상품명이었다. 마치 우리가 복사기 를 제록스 라 부르고, 포털 검색 을 구글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19세기 영국에서 브래드쇼 는 곧 철도 시간표 를 뜻했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리처드 에반스가 1841년에 그린 조지 브래드쇼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운하지도에서 철도혁명으로
조지 브래드쇼는 1801년 7월 29일 영국 랭커셔주 펜들턴에서 태어났다. 부유하지 않은 집안이었지만 부모는 아들에게 교육을 시켰고, 열다섯 살 무렵 그는 맨체스터의 판화공 아래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1827년부터 지도 제작에 집중했는데, 첫 작품은 고향 랭커셔 지도였고, 1830년에는 랭커셔와 요크셔의 운하를 그린 지도를 냈다. 당시는 증기기관이 본격화되기 전 영국 산업은 운하를 통해 움직였다.
하지만 1830년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의 로켓 호가 맨체스터와 리버풀 사이 철도 경기에서 우승하며 철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영국 전역에 철도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각 회사는 제각기 시간표를 찍어냈다. 여행자들은 혼란스러웠다. 어느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 언제 출발하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1839년 10월 19일 브래드쇼는 세계 최초의 전국 철도시간표를 출판했다. 제목은 브래드쇼의 철도시간표 및 철도여행 안내 . 당시 가격은 6펜스였다. 1841년 12월부터는 월간지로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노란색 표지의 브래드쇼 월간 철도 안내 다. 처음엔 8쪽이던 것이 1845년에는 32쪽, 1898년에는 946쪽으로 불어났다.
철도회사들은 브래드쇼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시간표를 멋대로 정리해서 팔아먹는 외부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브래드쇼는 영리하게도 철도회사의 주주가 되었고, 주주총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득했다. 결국 그의 시간표는 표준이 되었다. 1847년에는 유럽 대륙철도 안내를 출판해 유럽 전역의 시간표를 다루기 시작했다.
1907년 브래드쇼가 발간한 철도지도(Results, Maker: George Bradshaw (1801-1853)” | National Trust Collections)
작지만 복잡한, 그래서 웃음거리가 된 책
브래드쇼의 시간표는 실용적이었지만 동시에 악명도 높았다. 작은 판형에 작은 활자, 빼곡한 표와 약어들. 당시 풍자 잡지들은 브래드쇼를 조롱거리로 삼았고, 뮤직홀 무대에서는 농담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했다.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1859~1930)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도,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의 80일간의 세계 일주 에도 브래드쇼가 등장한다. 이 책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브래드쇼를 들고 여행을 떠났다. 브래드쇼는 문화적 상징이었다.
브래드쇼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 퀘이커교에 가입했다. 퀘이커는 평화주의, 평등주의, 박애주의를 강조하는 기독교 종파였다. 브래드쇼는 급진개혁가 리처드 코브든(Richard Cobden, 1804~1865)과 함께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빈민을 위한 학교와 무료급식소를 세웠다. 1848년 브뤼셀, 1849년 파리, 185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평화의 친구들 회의를 주도한 것도 브래드쇼였다. 그에게 철도는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평화의 도구였다. 사람들이 쉽게 여행할 수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1853년 8월, 브래드쇼는 노르웨이를 여행하던 중 콜레라에 걸렸고, 증상이 나타난 지 불과 8시간 만에 사망했다. 하지만 브래드쇼라는 이름은 살아 남았다. 출판사는 계속 시간표를 찍어냈고, 1961년 5월, 1521호를 마지막으로 브래드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모두 122년의 역사였다.
브래스쇼가 발간한 영국의 운하지도.(Results, Maker: George Bradshaw (1801-1853)” | National Trust Collections)
한국은 브래드쇼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브래드쇼의 이야기는 한국사회에 몇 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첫째, 정보의 표준화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다. 브래드쇼 이전에도 철도시간표는 있었다. 문제는 각 회사가 제각기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교통정보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버스, 지하철, 기차, 항공 정보가 여러 앱과 웹사이트에 흩어져 있다. 통합 플랫폼이 절실하다.
둘째, 민간의 창의성이 공공의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 브래드쇼는 공무원도, 철도회사 직원도 아니었다. 그저 지도를 그리던 인쇄업자였다. 하지만 그는 시장의 빈틈을 보았고, 스스로 해결책을 만들었다. 한국도 공공 데이터 개방과 민간 혁신이 결합될 때 더 나은 서비스가 탄생한다.
셋째, 기업가는 단순히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개선하는 사람일 수 있다. 브래드쇼는 철도시간표로 돈을 벌었지만, 그 수익을 평화운동과 빈민구제에 썼다. 요즘 말로 하면 사회적 기업가 였다. 한국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형식적인 기부에 그친다. 브래드쇼처럼 사업자체가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넷째, 작은 불편을 해결하는 것이 큰 변화를 만든다. 브래드쇼의 시간표는 그리 대단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저 여러 회사의 시간표를 모아서 정리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영국사회의 이동성을 높였고, 경제성장에 기여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주변에는 작은 불편들이 수두룩하다. 대중교통 환승정보, 공공화장실 위치, 재난대피소 안내 같은 것들. 이런 사소한 것들을 개선하는 것이 진짜 혁신이다.
조지 브래드쇼는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특별한 기술도, 막대한 자본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았고, 성실하게 그것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100년 넘게 살아남았다. 한국은 지금 빠르게 변하고 있다. 기술은 발전하고, 정보는 넘쳐난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정보는 찾기 어렵고, 여러 시스템은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브래드쇼 같은 사람들이다.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작은 불편을 해결하려는 사람들. 정보를 정리하고, 표준을 만들고, 사람들을 연결하는 사람들.
노란 표지의 작은 책자 하나가 어떻게 한 나라의 이동방식을 바꿨는지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브래드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1907년 브래드쇼가 발간한 영국의 철도지도.(Bradshaw s Railway Folded Map 1907: : George Bradshaw: Old House Books - Bloomsb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