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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혁명의 적 처단하다 단두대에 선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적 처단하다 단두대에 선 로베스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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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무엇인가? 썩은 권력을 갈아엎고 새 세상을 여는 것? 맞다. 그런데 역사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반복해서 가르쳐 준다. 혁명의 칼은 처음엔 귀족의 목을 치지만, 결국엔 혁명가 자신의 목도 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 인물이 바로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다.   로베스피에르.(위키피디아) 아라스의 청렴한 변호사, 파리를 뒤집다 로베스피에르는 1758년 5월 6일, 프랑스 북부 아라스(Arras)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가출해 버리는 바람에 친척 손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그는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루이 르 그랑 학교에서 공부했고, 계몽사상가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글을 읽으며 인간은 본래 선하다, 사회가 문제 라는 신념을 가슴 깊이 새겼다. 변호사가 된 그는 고향 아라스에서 가난한 이들 편에 서서 싸웠다. 당시 아라스 주교가 번갯불 피해자에게 배상하라고 소송을 냈을 때, 로베스피에르는 피해자 편을 들어 이겼다. 번개 소송이라니, 오늘날 같으면 SNS 인기를 한 몸에 받았을 사건이다. 이 무렵부터 그는 청렴한 자(L Incorruptible) 라는 별명을 얻기 시작했다. 뇌물도 안 받고, 편법도 안 쓰고, 사생활도 깨끗하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정치인이라기보다 거의 신화 속 인물에 가깝다.   최고 존재, 주권 국민, 프랑스 공화국 (위키피디아) 혁명의 무대에 서다 1789년, 역사는 폭발했다.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의 왕실 재정은 파탄 났고, 굶주린 민중은 들고 일어났다. 그해 5월 열린 삼부회에 로베스피에르는 제3신분 대표로 당당히 입장했다. 키는 작고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연설의 논리와 도덕적 날은 서슬이 퍼랬다. 국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1789년 프랑스에서 그 말은 폭탄이었다. 그는 자코뱅 클럽(Jacobin Club)의 실질적 지도자가 되었고, 민중에게 민중의 벗 으로 불렸다. 루이 16세가 1793년 1월 단두대에서 처형될 때, 로베스피에르는 그것이 공화국의 탄생 이라고 선언했다. 왕의 목이 떨어지는 그 순간, 유럽전체가 떨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그 공포 위에 새 나라를 세우려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1787년부터 1789년까지 현재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 거리에 있는 이 집에서 살았다.(위키피디아) 공포정치, 덕성의 이름으로 칼을 들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1793년부터 1794년까지, 역사는 이 시기를 공포정치 (La Terreur)라 부른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안위원회는 혁명의 적 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단두대를 쉬지 않고 돌렸다. 귀족은 물론이고 온건파 혁명가, 심지어 동료혁명가들도 차례로 목이 잘렸다. 명연설가이자 혁명의 동지였던 조르주-자크 당통(Georges-Jacques Danton, 1759~1794)이 이제 좀 멈추자 고 했다가 단두대의 이슬이 됐다. 신문기자이자 혁명 선동가였던 자크-르네 에베르(Jacques-René Hébert, 1757~1794)도 같은 운명이었다. 약 10개월 동안 파리에서만 2700명 이상이 처형됐고, 전국적으로는 1만 7000명에서 최대 4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것을 덕성(vertu)과 공포(terreur)의 결합 이라고 불렀다. 덕성 없는 공포는 악이고, 공포 없는 덕성은 무력하다는 논리였다. 들으면 그럴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슬며시 드는 의문 하나. 덕성이 무엇인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바로 로베스피에르 자신이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곧 혁명의 진리라고 믿었다. 청렴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빠지기 가장 쉬운 함정, 즉 나는 옳으므로 내 방식도 옳다 는 독선이 그를 집어삼킨 것이다.   1789년 8월 의회에서 통과된 혁명 법령은 인권 선언으로 절정에 달했다.(위키피디아) 테르미도르의 반동, 혁명이 스스로를 삼키다 역설은 완성된다. 1794년 7월 27일, 프랑스 혁명력으로 테르미도르(Thermidor) 9일, 국민공회의 동료들이 반격에 나섰다. 다음 차례가 자신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하나로 묶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연설 도중 체포됐고, 이튿날 총살 시도로 턱뼈가 부서진 채 단두대에 섰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 단두대 행을 명령하던 자가, 이제 그 단두대 아래 섰다. 군중은 환호했다. 역사는 이것을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라 부른다. 혁명이 제 자식을 잡아먹은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1791년 1월 파리 폭동 당시의 국민위병.(위키피디아) 그가 역사에 남긴 것들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그를 민중의 권리를 위해 싸운 선구자, 보통선거권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진보적 혁명가로 본다. 실제로 그는 재산과 관계없이 모든 남성의 선거권을 주장했고, 식민지 노예제에 반대했으며, 사형제 폐지를 논했다. 시대를 앞선 생각들이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를 자신의 이념을 위해 수만 명을 죽인 독재자로 본다. 어느 쪽도 완전히 틀리지 않는다. 바로 그게 문제다. 선한 의도가 폭력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로베스피에르가 역사에 새긴 가장 쓴 교훈이다.   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 (1791년 7월 17일).(위키피디아) 한국에서 로베스피에르를 읽는다는 것 이쯤에서 고개를 한반도로 돌려보자. 로베스피에르의 이야기가 230년 전 프랑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로베스피에르의 비극은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공화국을 원했고, 민중을 사랑했으며, 뇌물 한 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도덕적 확신이 절대적 진리라는 믿음이, 결국 그를 스스로가 증오하던 독재자로 만들었다. 청렴함이 독선의 갑옷이 될 때, 그것은 덕이 아니라 흉기가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무리 옳더라도, 그 가치를 구현하는 방식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라면, 우리는 로베스피에르를 비판하면서 로베스피에르가 되는 것이다. 비판을 들을 귀, 다른 길을 허용할 여유, 동지를 적으로 만들지 않는 너그러움. 이것들이 혁명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훨씬 중요하다.   로베스피에르의 집주인 모리스 뒤플레의 집 안뜰. 로베스피에르의 방은 분수대 위 2층에 있었다. 다른 하숙생으로는 그의 누이, 동생, 그리고 조셉 르 바스가 있었다.(위키피디아) 단두대는 아직 서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36년의 짧은 삶을 살았다. 그가 남긴 유산은 웅장하면서도 섬뜩하다. 민주주의의 이념, 인민주권의 원칙, 사회적 평등의 요구, 이것들은 그가 혁명에 기여한 빛이다. 그리고 공포정치, 독선적 도덕주의, 동지를 적으로 만드는 배타성, 이것들은 그가 남긴 그림자다. 우리는 그 빛을 이어받으면서, 그 그림자는 피해야 한다. 말은 쉽다. 실천이 어렵다. 그래서 역사를 읽는 것이다. 단두대의 칼날은 녹슬지 않는다. 로베스피에르, 당신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너무 확신했다. 그게 문제였다. 우리는 역사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다.   장바티스트 푸케가 그린 로베스피에르의 초상화(1792).(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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