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포크’의 오랜 친구들···김광희, 방의경 그리고 한대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그의 발은 참으로 넓었다. 그의 우스개 표현대로 ‘양다리’ 걸치기 선수였다. 한편에 재기 넘치는 ‘낭만 포크’의 친구들이 수두룩했다면 다른 한편엔 영혼이 자유로운 ‘참여 포크’의 친구들이 많았다.
1972년 4월부터 음반 는 시중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가치는 수직상승했다. 비록 중고 시장에서였긴 했지만, 1980년대 중고 시장에서 10~20배 정도에 팔리던 것이 2000년대 들어와서는 상태가 좋으면 150만 원 이상에 거래되기도 했다.
돈 냄새 잘 맡는 장사꾼들이 팔짱 끼고 있을 리 없다. 일부 음반업자들은 저작권자(김민기)의 동의를 받지 않고 해적판을 멋대로 찍어냈다. 수록곡을 제멋대로 바꾸기도 했는데, 1972년 당시 문제가 됐던 ‘꽃 피우는 아이’를 제외하고 ‘세노야’를 포함한 음반도 있었고, ‘세노야’를 김민기가 작곡한 노래로 기재한 음반도 있었다.
‘세노야’는 김광희가 고은 시인의 시를 노랫말로 작곡한 것이었다. 청개구리 홀 시절부터 학전 시절에 이르기까지 김민기의 음악적 삶을 줄곧 함께했던 이다. 청개구리 홀에서 노래할 때 오르간이나 피아노 반주를 하거나, ‘피터, 폴 앤 메리’를 부를 때 보컬로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는 김민기의 바로 위 누나의 서울대 음대 친구였다.
김광희는 김민기의 바로 손윗 누나의 서울대 음대 친구로 청개구리홀시절부터 학전까지 뒷것 김민기를 뒤에서 도왔다. 세노야 작곡가이면서 직접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사진은 2015년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 제전 인터뷰 영상 갈무리. 출처: 유튜브 보이스오브코리아
당시 서울대 미대와 음대에는 김민기와 김광희 외에도 최고참인 최양숙(음대), 조영남(음대), 이정선(미대), 현경과 영애(미대) 등 훗날 가요사에 이름을 올리게 될 신인들이 여럿 있었다. 최양숙은 앨범 를 기획하고 제작한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의 누이였다.
이 가운데 김광희는 성격이 김민기와 많이 닮았다. ‘세노야’의 우여곡절 속에 잘 담겨 있다. 노랫말이야 고은 시인의 시라는 건 잘 알려졌지만, 누가 작곡했는지는 오랜 시간 오리무중이었다. 제가 짓고도 시치미 뚝 떼곤 했던 김민기였고, 또 노래의 정조가 김민기류였던 데다 해적판에 그렇게 수록됐으니 ‘김민기 작곡’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걸 보고도 웃어넘긴 이가 바로 김광희였다. 김광희는 매사에 제가 드러나는 걸 꺼렸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김광희
1970년 9월 말, CBS의 음악 프로그램 ‘YOUNG 840’의 진행자 최경식이 시인 고은과 술을 마시다가 노랫말로 쓸 시 한 편 지어달라고 했고, 고은 시인이 그 자리에서 지어 넘긴 게 ‘세노야’였다고 한다. 최경식은 이 시를 김민기에게 넘기며 작곡을 요청했다. 최경식은 ‘YOUNG 840’에 고은이 출연해 자신의 수필을 낭송하는 코너를 두기로 했는데, 이 노래를 수필 낭송의 배경음악으로 쓸 생각이었다. 부탁을 받은 김민기는 시를 읽어보고는 김광희를 떠올렸다. 김광희는 두말하지 않고 반나절 사이에 곡을 지어 최경식에게 건넸다고 한다.
최경식은 애초 음대 출신 가수인 동생 최양숙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노래를 받고 보니 작곡자가 직접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김민기와 김광희에게 이런 생각을 밝히자, 두 사람은 김민기의 기타 반주에 김광희의 노래로 녹음했고, 그날부터 고은 코너의 배경음악으로 방송을 탔다. 처음엔 1주일만 틀기로 했지만, ‘YOUNG 840’에선 하염없이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는 잔잔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최경식 등의 이런 기억과 김광희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1970년에 기독교 방송에 ‘꿈과 음악 사이’라는 음악 프로가 있었어요. 프로그램 중간에 고은 선생님이 수필 한 편씩을 직접 낭독하셨는데 방송국에서 배경음악으로 고은 선생님 시로 된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해, 김민기 씨에게 시 2편을 주었어요. 그중 는 김민기 씨가 만들었고 는 김민기 씨가 제게 줘서 제가 만들게 됐죠. 노래를 갖다준 그날부터 노래를 송출해야 하는데, 아무도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다른 분들이 연습할 동안에만 제가 불러 일시적으로 사용하게 된 거죠. 처음에는 김민기 씨 기타 반주로 제 목소리가 나갔고 이후 최양숙, 도비두 등이 부르게 된 거죠.”
양희은 1집 앨범에 고운노래 모임이라는 타이틀이 눈길을 끈다. 이 앨범에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김광희의 세노냐가 수록돼 있다. 김민기는 기타를 김광희는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 사진출처: 위키백과
‘세노야’는 이듬해 발매한 양희은의 1집에 실렸다. 김민기와 김광희가 나서서 기타와 피아노 반주를 했다. 당시 애창되던 ‘가난한 마음’(원래 제목은 ‘나 돌아가리라’)도 김광희가 작곡해 양희은이 불렀던 노래였다.
김광희는 김민기의 1집 제작에도 참여해, ‘아침이슬’의 피아노 편곡과 반주를 맡는 등 음반 제작의 숨은 조력자였다. 청개구리 홀 시절부터 ‘학전’에 이르기까지 김광희는 ‘뒷것’ 김민기보다 더 ‘뒤’에서 김민기를 지원했다. 뮤지컬 의 배우 오디션에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고, 각종 뮤지컬의 시사회나 모니터링에서 자문위원이 되어 음악에서 넘치고 모자라는 것을 골라냈다. 그런 김광희를 두고 김민기는 나보다 음악적으로 훨씬 더 해박하고 뛰어난 분”이라고 상찬했다.
의 뒤를 이어 나온 자작곡 포크 음반은 1972년 6월 출시한 방의경의 독집 이었다. 방의경은 김민기와 함께 청개구리 홀의 ‘한국 포크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앞서 내쉬빌 3인방(이수일, 김무영, 김유복)과 함께 1972년 초 컴필레이션 음반 를 발매한 바 있다.
김민기와 방의경, 방의경은 1970년대 여성 최초로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열었다. 사진 왼쪽은 1971년 청개구리홀 무대에서 김민기와 방의경(완쪽)이 노래를 하는 모습.사진:학전제공 . 오른쪽 사진은 방의경과 양희은이 청개구리 홀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사진출처: 한겨레신문
내쉬빌이 해체된 뒤 방의경은 대중가요계의 큰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진성 CBS 피디의 설득으로 한동안 이 방송의 청소년 인기 프로그램 ‘세븐틴’의 디제이로 활동했다. 4개월 만에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 성음제작소 나현구 사장의 제안으로 1집을 제작하게 됐다. 이 앨범에는 그가 짓고 부른 11곡과 서유석이 유일하게 그에게 허락한 ‘친구야’가 수록됐다. 그러나 이 음반도 와 마찬가지로 발매 직후 방송 및 판매 금지 처분을 당했다. 박정희 정권은 용케도 ‘한국 포크’의 미래를 열어갈 음반과 노래들만 골라서 꺾었다.
방의경은 김민기와 달리 한 성깔 했다. 가만있지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복수했다. 얼마 뒤 라이브로 진행되는 KBS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서 한 가수가 펑크를 냈고, 대타로 방의경이 선택됐을 때였다. 방의경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노래 ‘검은 산’을 불렀다. 밀실 감금, 협박, 고문, 조작의 본산으로 지목되던 중앙정보부 서울 분실이 있는 남산을 은유한 노래였다. 통쾌한 복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프로그램은 통째로 방송 정지당했다.
방의경은 1974년 TBC 음악 프로그램 ‘5시의 다이얼’ 디제이를 잠시 하다가 그만두고는 한동안 잠적했다. 고교 동창의 주선으로 장충동 스튜디오에서 비밀리에 2집을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매일 자정을 넘겨 통금 시간이 되면 스튜디오 문을 잠그고 밤샘 작업을 하였고, ‘하양나비’, ‘마른 풀’, ‘검은 산’ 등 방의경 음악의 진수를 보여주는 30여 곡을 녹음했다.
1972년 발매된 방의경 1집앨범(사진 왼쪽) 과 2016년 발매된 방의경 1.2집 앨범 사진. 1집 앨범이 일주일만에 발매 금지를 당한 것은 불나무가 사전에 없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두번째 앨범 표지가 불나무를 연상시키고 있다.
이 가운데 ‘하양나비’와 ‘마른 풀’은 그해 초 터진 민청학련사건을 소재로 만든 작품이었다. ‘하양나비’는 사형선고를 당한 이들의 모습을 그렸고, ‘마른 풀’은 지금은 가더라도 다시 소생하라는 염원을 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인에게 맡겨둔 마스터 음원이 분실되면서, 이때 녹음한 노래들은 영영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40여 년이 지난 2016년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모임 ‘바람새친구’는 십시일반 뜻을 모아 콘서트를 열었다. 방의경 본인조차 소장하지 못했던 희귀본 1집을 복각해 LP 음반으로 다시 제작하고, 그의 새로운 노래들을 녹음해 2집도 제작했다. 그리고 복각본 LP 1집과 1, 2집을 묶은 CD 전집까지 발매함으로써, 유신 정권에 의해 매장됐던 이 비로소 빛을 보게 했다.
김민기나 방의경과 함께 본의 아니게 초기 참여 포크를 견인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한대수다. 김민기보다 먼저 자작곡 포크를 발표했던 이로, 군대에 입대하지 않고 노래를 계속했다면, 한국 포크의 원조로 꼽힐 가객이었다.
2025년 공연을 위해 방한한 한대수. 사진출처: 한계레신문, 원춘호사진작가 제공
한대수와 김민기는 닮은 점도 많고 대비되는 점도 많았다. 시대를 고민하고, 삶을 성찰하고, 이웃의 고통에 함께한다는 점에서는 결이 같았다.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나면 음악보다는 시대와 삶과 철학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표현 방식에선 김민기가 내면화하고 은유하는 쪽이라면 한대수는 내지르고 터트리는 형이었다. 그래서 김민기는 한대수의 그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높이 샀고, 한대수는 김민기의 진중함을 존중했다고 한다.
대수 형은 정말 거침이 없어요. 그 자유로움이 부러울 때가 많았습니다.”(김민기)
민기는 나와는 차원이 달랐어요. 그의 침묵은 노래보다 더 강합니다.”(한대수)
한대수는 이런 평가도 덧붙였다. 김민기는 한국(음악계)이 낳은 유일한 천재.”
둘은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존경했다. 한대수가 오랜 외국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국내에선 그의 이름 석 자조차 생소했을 때, 가장 먼저 소극장 학전의 라이브 무대로 초청한 것이 김민기였고, 맨 먼저 김민기에게로 달려간 것이 한대수였다. 김민기 1집에 실린 ‘바람과 나’는 한대수가 입대하기 전 김민기가 자신의 음반에 수록할 수 있도록 지어준 것이었다.
한대수는 1948년 서울대 공대생이던 아버지와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맏딸이자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신학대 초대 학장과 대학원장을 지낸 한영교 박사였다. 집안 환경만 보면 호강하며 자라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7살, 미국 코넬대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실종되면서 그의 삶은 엉키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훗날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렸던 에드워드 텔러 박사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수소폭탄 제조 기술을 한국으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CIA가 제거했다”라는 소문이 나돈 건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실종되자 어머니는 재혼했고, 한대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부산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대학에 다녔다. 처음에는 뉴햄프셔대학 수의학과에 들어갔다가 이내 자퇴하고 뉴욕의 사진 학교로 옮겼다. 대학 시절 그는 1960년대 미국 청년의 정신세계를 뒤흔들던 히피 문화와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저항적인 포크 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그가 1968년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발표한 노래들은 그런 영향 안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 대중음악계에 미국 ‘본토’의 포크와 그 정신, 그리고 포크 음악의 태도를 처음 소개한 건 다름 아닌 한대수였다.
스무 살 되던 1968년 귀국한 한대수는 바로 쎄시봉의 문을 노크했다. 그곳에서 한 방송국 피디의 눈에 띄어 TV쇼에 출연했다. 당시 시청자들은 그의 봉두난발을 보고 여자냐, 남자냐”라며 신기해했다. 일간지에는 최초의 히피, 한국에 등장”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기도 했고, 일부 고루한 이들은 한국을 떠나라”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이런 한국 사회에 날린 한대수의 강력한 한 방이 ‘행복의 나라로’였다.
그러나 그런 ‘저항아’를 상명하복의 병영 체질에 익숙한 정치권력과 기성 사회가 그냥 둘 리 없었다. 인습 파괴의 무대와 행색에 아연하고,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라고 외치는 그의 노래에 분노해, 즉각 방송은 물론 가요무대에서 퇴출했다. 그러자 한대수는 장발을 아예 밀어 ‘배코치는’ 등 나름대로 저항하기도 했지만, 달리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가요계를 떠나 한동안 사진작가 일을 하다가 입대했다.
한대수는 1974년 제대하고서야 본격적인 가객 생활을 했다. 그해 발매한 1집 을 통해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역량을 보여줬다. 수록곡 중 ‘물 좀 주소’는 당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목이 타는’ 청춘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이 앨범은 만큼이나 충격을 던졌다. 당대의 암울한 정서를 적나라하게 표현해 대중음악계를 아연케 했다. 그로부터 한대수에게는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한국 최초의 포크록 뮤지션’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게 됐다.
1974년 발매된 한대수 앨범 1집 멀고먼길 표지사진. 그에게는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최초의 포크 록 뮤지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집을 발매할 때 스튜디오 녹음에 걸린 시간은 단 8시간, 한 자리에서 네 트랙을 동시에 녹음했다. 방의경(기타)과 정성조 쿼텟이 반주했다. ‘행복의 나라로’ 등 수록곡 어느 것 하나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그냥 넘길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사진작가인 그가 찍은 제 얼굴 사진을 전면에 실은 앨범 재킷의 표지 디자인도 파격이었다. 흑백사진 속 그는 세상, 특히 가진 자들을 조롱하는 듯 표정을 기묘하게 찌그러트리고 있다.
이런 파격 혹은 조롱의 결과는 가혹했다. 1년 후 1975년 ‘대중가요 정화’ 때 그의 2집 은 판매 금지됐다. 1집에 실린 곡들도 대부분 금지곡으로 묶였다. ‘물 좀 주소’는 (군사정권이 자행했던) 물고문을 연상케 한다”, ‘행복의 나라로’는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냐. 행복의 나라는 북한이냐?” 따위의 황당한 이유를 붙여 그를 ‘적성’ 혹은 ‘퇴폐’ 가수로 낙인찍었다.
한대수는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건 내가 열아홉, 스무 살에 작곡한 노래들이었다. 그런 노래에 무슨 정치적인 생각이 있었겠는가? 부모 사랑을 못 받고 자란 개인적 애정결핍으로 말미암은 노래인데, 그렇게들 해석하더라.”
한대수의 금지곡들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야 해금됐고, 1집 은 1989년 온전한 모습으로 재발매될 수 있었다. 1972년 판매 및 방송 금지된 김민기의 1집 노래들이 1993년에야 ‘전집’에 실려 발매된 것과 걸어온 길이 다르지 않았다. 은 2007년 가슴네트워크와 경향신문이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과 2018년 태림스코어, 멜론, 한겨레가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서 모두 8번째에 올랐다.
2024년 김민기가 훌쩍 세상을 떠났다. 한대수는 슬퍼하며 이렇게 아쉬워했다.
김민기는 평생 권력이나 명예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깨끗하고 곧은 양심 하나가 사라졌다.”
좀처럼 칭찬할 줄 모르는 한대수가 김민기 영전에 바친 격한 헌사였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