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4100억 챙긴 보통사람 … 6·29 선언은 생존기술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1권을 펼쳐 읽는다. 노태우(盧泰愚, 1932~2021) 항목을 읽으며 한 가지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참으로 묘한 인물이다. 전두환(1931~2021)이라는 강렬한 빛 옆에서 언제나 반쯤 그림자 속에 있었다. 쿠데타의 공모자였지만 민주화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도 받는다. 비자금 4100억 원을 챙겼지만 보통사람 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이 됐다. 그 묘한 이중성이야말로 노태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1989년의 노태우(위키피디아)
관성(冠星) 의 꿈, 5성회에서 하나회까지
노태우는 1932년 8월 17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현 대구 동구 신용동)에서 면서기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아버지가 철도 건널목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팔공산 사찰을 오가며 참선을 익혔고, 축음기를 틀어놓고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이 조용하고 사색적인 소년이 훗날 군사반란의 핵심 공모자가 된다.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들이 저마다 별명을 지었을 때, 전두환은 용성(勇星) , 노태우는 관성(冠星) 이었다. 으뜸가는 별이 되겠다는 뜻이다. 이 별들이 1963년 비밀 군사조직 하나회 를 결성했다. 경상도 출신 정규육사 출신들이 주축이 된 이 조직은 이후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는 사조직이 됐다.
1987년의 노태우(Roh Tae-woo: First freely elected South Korea leader with a complex legacy | The Independent)
12·12의 공모자, 탱크를 몰고 서울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1917~1979)가 피살됐다. 기회가 왔다. 1979년 12월 12일, 노태우는 9사단장으로서 예하 29연대를 서울 중앙청으로 진주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맡았다. 최전방 병력을 서울로 끌어들이는 것은 명백한 군형법 위반이었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해 미리 박철언 등에게 부인과 가족을 부탁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성공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탱크를 몰았다. 그것이 12·12 군사반란에서 노태우의 역할이었다.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전국 비상계엄 확대와 광주에서의 학살에도 하나회의 일원으로서 깊이 연루돼 있었다. 1997년 대법원은 노태우에게 반란중요임무종사죄, 내란중요임무종사죄, 뇌물죄 등을 적용해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했다.
1995년 노태우와 전두환.(Ex-South Korean President Roh Tae-woo dies at 88 | AP News)
세계사 속의 동류, 2인자로 살다 1인자가 된 자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비슷한 인물이 떠오른다. 아르헨티나의 에두아르도 비올라(Eduardo Viola, 1924~1994)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Jorge Rafael Videla, 1925~2013)의 2인자로서 더러운 전쟁에 가담했다가 비델라에 이어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비올라는 집권 9개월 만에 또 다른 군부에 의해 축출됐고, 훗날 인권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브라질의 에르네스투 가이제우(Ernesto Geisel, 1907~1996)는 군사독재 체제의 2인자에서 대통령이 된 뒤 스스로 민주화 이행을 선택한 인물이다. 그는 쿠데타의 공모자였지만 권력의 자리에서 제도적 민주화를 추진했다. 노태우의 6·29선언이 종종 이 사례와 비교된다. 차이는 브라질의 민주화 이행이 훨씬 더 치밀하게 설계된 데 반해, 노태우의 6·29선언은 폭발 직전의 민심 앞에서 내놓은 고육지책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1981년의 에두아르도 비올라(위키피디아)
6·29선언, 양보인가 생존전략인가
1987년 6월, 박종철(1965~1987) 고문치사 사건으로 불붙은 민주화 요구가 전국을 뒤흔들었다. 10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전두환은 군 투입을 검토했다. 그 분기점에서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가 1987년 6월 29일 대통령직선제 수용을 포함한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이 6·29선언 이다.
이 선언이 진정한 민주주의적 결단이었는가, 아니면 생존을 위한 계산이었는가.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 질문에 냉정하다. 당시 노태우는 직선제가 실시되면 야권이 분열할 경우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1927~2015)과 김대중(1924~2009)이 분열하는 바람에 노태우는 36.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주화의 과실은 군사반란의 공모자가 가져갔다.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당선인 김영삼(왼쪽)이 퇴임하는 노태우(오른쪽)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South Korean generals considered cheating in 1987 election - Asia Times)
보통사람 의 비자금 4100억
저는 보통사람입니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의 슬로건이었다. 군복을 벗고 양복을 입은 그의 이미지는 전두환의 살벌함과 달리 유순해 보였다. 그러나 퇴임 후 드러난 진실은 달랐다. 1995년 민주당 의원 박계동(1954~)의 폭로로 비자금 조성 사실이 드러났다. 수사 결과 기업 총수 40여 명으로부터 무려 41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확인됐다. 보통사람 의 금고에 4100억 원이 있었다. 이 보통사람은 참으로 보통이 아니었다.
1995년 11월 구속됐고, 이로써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 기록을 세웠다. 1997년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 원이 확정됐다가 같은 해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추징금은 2013년에야 완납했다. 사면에서 완납까지 16년이 걸렸다.
1996년의 노태우와 전두환(Roh Tae-woo: First freely elected South Korea leader with a complex legacy | The Independent)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도 부패한 정치인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 대통령이나 수상이 재임 중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가 사면된 뒤 추징금을 16년에 걸쳐 납부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더구나 그 비자금 가운데 일부는 사위인 최태원 SK 그룹 회장 측에 흘러갔다는 의혹이 2024년에 새롭게 제기됐다. 노태우 부인 김옥숙 여사의 이른바 904억 메모 가 소송 과정에서 공개됐고, 추징금 완납 후에도 숨겨진 비자금이 더 있다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나는 영국에서 생중계를 보며 1979년 12월 12일 밤을 떠올렸다. 계엄군이 국회로 향하던 그 밤의 문법은 노태우가 9사단 병력을 서울로 진주시키던 그 밤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노태우를 군사반란·내란·비자금으로 집권한 대통령으로 규정했다. 6·29선언으로 얻은 민주화의 공로자 라는 이미지가 이 규정을 덮을 수는 없다. 역사는 공과를 같이 기록하되, 반헌법 행위를 면죄하지 않는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노태우 1951년.(South Korea s former president Roh Tae-woo dies at 88 | The Jerusalem Post)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