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에 글 깨쳐 산업혁명의 엔진 만들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책보다 기계를 먼저 읽어 철도 혁명가로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은 영국 북동부 노섬벌랜드의 가난한 광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phenson, 1760~1835)은 탄광의 증기기관 관리인이었고,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여덟 살에 탄광에서 소를 돌보는 일을 시작했으니, 초등학교 2학년 나이에 벌써 노동자였다.
그런데 이 소년에게는 남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기계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호기심이었다.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야간학교에 다니며 글을 배웠는데, 이미 증기기관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솜씨는 숙련공 수준이었다. 책보다 기계를 먼저 읽은 셈이다.
조지 스티븐슨 (위키피디아)
로켓호, 하늘이 아닌 땅을 달리다
1814년, 서른세 살의 스티븐슨은 첫 증기기관차 블뤼허호 를 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비웃었다. 광부 주제에 무슨 기관차냐 는 조롱이 난무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짜 혁명은 1825년에 일어났다.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이것이 세계최초의 공공 증기철도였다. 스티븐슨이 설계하고 건설한 이 철도는 승객과 화물을 동시에 실어 나르는 상업철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1829년,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
리버풀-맨체스터 철도회사가 기관차 경연대회를 열었다. 조지 스티븐슨과 아들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phenson, 1803~1859)이 합작한 로켓호 가 압도적인 성능을 보였다. 시속 46㎞였다. 말의 최고 속도인 시속 70~80㎞에 못 미쳤지만 당시 다른 기관차들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날 이후 세상은 달라졌다.
오른쪽이 스티븐슨의 안전등 (위키피디아)
궤도 폭 경쟁: 천재 브루넬과의 한판 승부
스티븐슨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은 바로 표준궤 다. 그가 정한 4피트 8.5인치(약 143.5㎝)의 궤도 폭이 지금도 전 세계 철도의 60% 이상에서 사용된다. 우리 경부선, 호남선 철도도 이 규격이다.
그런데 이 표준이 확립되기까지 치열한 다툼이 있었다. 상대는 당대 최고의 천재 기술자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 1806~1859)이었다. 브루넬은 7피트 0.25인치(약 213㎝)의 광궤를 주장했다. 더 넓은 선로가 더 빠르고 안정적이다 는 그의 말은 기술적으로 옳았다. 실제로 그의 광궤 열차는 스티븐슨의 표준궤 열차보다 훨씬 부드럽고 빠르게 달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미 영국 전역에 스티븐슨의 표준궤가 깔려 있었다. 브루넬의 광궤 열차는 표준궤 선로를 달릴 수 없었다. 화물을 옮기려면 역마다 짐을 옮겨 실어야 했다. 그 넓은 선로에 코끼리라도 태울 셈인가? 조롱이 쏟아졌다. 스티븐슨도 자원 낭비 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1892년, 영국 의회는 모든 광궤를 표준궤로 교체하라는 법을 통과시켰다. 기술적으로 우수한 브루넬이 졌고, 먼저 시작한 스티븐슨이 이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궤도 전쟁 의 결말이었다. 최고가 아니라 먼저 표준이 된 자가 승리한다는 냉혹한 교훈이다.
사무엘 스마일스의 저서 엔지니어들의 생애 (1862)에 실린 초기 스티븐슨 기관차 (위키피디아)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만든 숨은 주역
스티븐슨의 철도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혈관이자 신경망이었다. 석탄과 철, 면화와 공산품이 철도를 타고 영국 전역을 누볐다. 런던에서 맨체스터까지 마차로 하루 이상 걸리던 것이 몇 시간으로 단축되었다.
경제학자들은 철도가 영국 국내총생산 성장에 10% 이상 기여했다고 추산한다. 철도건설 자체가 엄청난 고용을 창출했고, 철강 기계 토목 산업을 발전시켰다. 1848년 스티븐슨이 사망할 무렵, 영국에는 8000㎞ 넘는 철도가 깔려 있었다.
반겹침 이음 방식의 물고기 배 모양 철도 레일, 1816년 스티븐슨 특허 (위키피디아)
한국은 어떻게 철도를 놓쳤나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최초의 철도는 외세에 의해 놓였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었지만, 이는 미국인 사업가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 1844~1920)의 이권이었다가 일본으로 넘어갔다. 1905년 경부선 개통도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철도로 깔렸다. 한국인은 철도를 만든 주체가 아니라 철도에 실려 간 객체였다.
조선 후기, 대한제국 시기에도 철도 도입 논의는 있었다. 하지만 보수파는 쇠로 만든 괴물이 국토를 어지럽힌다 며 반대했고, 개혁파는 자본과 기술 부족에 좌절했다. 스티븐슨이 문맹 광부 출신으로 철도혁명을 일으킬 때, 조선은 양반과 상놈을 가르며 신분제에 갇혀 있었다. 인재는 있었을지 몰라도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사회는 아니었다.
스톡턴과 달링턴 철도의 1호 기관차인 로코모션 (위키피디아)
오늘날 한국, 스티븐슨에게 배울 점
첫째, 계급 사다리의 복원이다. 스티븐슨의 영국도 계급사회였지만, 산업혁명은 능력 있는 이들에게 기회를 열어주었다. 반면 지금 한국은 어떤가.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미래를 결정하는 수저 계급론 이 횡행한다. 대학입시부터 취업, 결혼, 출산까지 모든 것이 돈으로 귀결된다. 이공계 천재가 가난해서 대학을 포기하는 사회에서 무슨 혁신이 나오겠는가.
둘째,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다. 스티븐슨의 초기 기관차들은 고장 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는 실패할 때마다 개선했고, 주변에서도 그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었다. 한국은 어떤가. 한 번 실패하면 재기 불능을 각오해야 한다. 사업에 실패한 이는 신용불량자가 되고, 재수생은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위험을 감수하며 도전하겠는가.
셋째, 현장 기술자의 대접이다. 스티븐슨은 대학 나온 공학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땀 흘린 기술자였다. 한국도 산업화 시대엔 현장 기술자들이 존중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생산직은 기피 직종이고, 모두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길 원한다. 제조업 강국을 자처하면서 제조 현장을 천시하는 모순을 스티븐슨이 보면 혀를 찰 노릇이다.
요크 국립철도박물관에 있는 조지 스티븐슨 동상 (위키피디아)
철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다
스티븐슨의 철도는 빨랐다. 하지만 속도만 빠르다고 좋은 게 아니다.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다. 영국의 철도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실어 날랐지만, 일제의 철도는 침략과 수탈을 실어 날랐다.
현재 한국의 고속철도는 세계최고 수준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30분이면 닿는다. 하지만 그 빠른 열차를 타고 청년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울로, 또 서울로만 향한다. 지방은 소멸하고, 수도권만 비대해진다. 철도는 전국을 연결하라고 만든 건데, 오히려 격차를 심화시킨다.
스티븐슨이라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자네들, 철도를 왜 놓았나? 사람을 연결하려고? 아니면 분리하려고?
최초의 여객 철도 (위키피디아)
광부의 아들이 준 교훈
조지 스티븐슨은 1848년 68세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 현장을 떠나지 않았고, 죽기 직전까지 새로운 기관차를 구상했다. 그의 무덤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의 이름은 철도와 함께 영원하리라.
그가 남긴 건 철도만이 아니다. 출신과 학력에 관계없이 능력과 열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증거를 남겼다. 21세기 한국사회는 이 교훈을 잊은 듯하다. 명문대 졸업장과 부모 재력이 모든 걸 결정하는 사회에서 제2의 스티븐슨은 나올 수 없다.
한국에도 탄광은 많았다. 정선, 태백, 문경에서 수많은 광부가 땀 흘렸다. 그들 중에 스티븐슨 같은 천재는 없었을까. 아니,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 한국의 어딘가에 스티븐슨 같은 인재가 있을 것이다. 그에게 기회를 줄 것인가, 아니면 또다시 묻어버릴 것인가. 그 선택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증기기관차는 이제 박물관에 있다. 하지만 스티븐슨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혁신은 화려한 실험실이 아니라 땀 흘리는 현장에서 나온다. 그걸 잊는 순간, 우리의 기차는 멈춘다.
앨튼 그랜지에 있는 스티븐슨의 집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