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들이 진범 틀림없다 대법 무죄에도 막무가내 [사회혁신]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4권을 펼쳤다. 김태현(金台鉉, 1922~2002) 항목의 부제가 눈을 잡아끌었다.
확신이 부른 검찰 최악의 조작수사 김근하 유괴살해 사건 책임자.
그리고 이 항목을 읽다가 더욱 충격적인 문장과 마주쳤다.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뒤에도 김태현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피고인들이 진범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전 수사력을 동원한다 해도 다른 진범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무죄판결이 나도 김태현은 전혀 반성이 없었다. 그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권력의 지시로 사건을 조작한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의 확신과 공명심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의 인생을 통째로 망쳤다. 그리고 그 확신은 대법원 판결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22년 경남 삼천포 출생, 고문으로 시작한 검사 경력
김태현은 1922년 12월 23일 경상남도 삼천포시(현 사천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학과에 다니던 중 학병으로 징집돼 대학을 중퇴했다. 해방 후 1952년 제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고 1954년 9월 부산지검 진주지청 검사로 임용됐다.
그런데 첫 부임지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1956년 3월 진주여고 교감 아들 조인걸 군(당시 7세)이 학교 앞에서 사라졌다가 시신으로 발견됐다. 초임 검사 김태현은 교감에게 원한을 품었다는 이유로 퇴학생 임재숙 모녀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수사과정에서 임재숙의 남동생 임재만은 바늘로 찌르기, 손가락 사이에 연필 끼워 비틀기, 거꾸로 매달고 콧구멍에 물 붓기 등 갖가지 고문을 10일 동안 당했다.
당시 경찰 수사주임은 불도저에 의한 과실치사 라고 결론 내렸는데도 김태현은 이를 무시하고 기소를 밀어붙였다. 1심은 유죄, 2심은 무죄, 대법원은 다시 유죄를 선고했다. 1964년 임재숙은 가석방됐고, 1969년 대법원은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한국인권옹호협회가 직접 현장조사에 나서 고문사실을 확인했지만 김태현은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경찰 형사 구영근은 선고유예를 받았는데, 그 구영근이 나중에 김태현의 사설정보원으로 다시 등장한다.
세계사 속의 동류, 확증편향 의 법 집행자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조의 사건이 떠오른다. 영국의 길퍼드 4인(Guildford Four) 사건이다. 1974년 아일랜드공화군(IRA) 관련 펍 폭발 사건에서 영국경찰은 네 명을 범인으로 지목해 구속했다.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냈고, 무죄를 주장하는 이들을 무시했다. 1989년 무죄가 확정됐다. 15년이 걸렸다. 영국정부는 공식사과했고, 당시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들은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됐다. 비록 최종 유죄선고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책임 추궁의 과정은 기록으로 남았다.
소련의 공안 검사 아나톨리 수하노프(Anatoly Sukhanov)도 비슷하다. 스탈린(1878~1953) 치하에서 수백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수사해 기소했다. 그의 경우 이데올로기적 압박이라는 외부요인이 있었지만, 김태현의 경우는 그 보다 더 순수하게 검사 자신의 확신 이 문제였다. 외부의 명령보다 내부의 확증편향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김태현은 몸소 증명했다.
아나톨리 수하노프.(The Dream Life Of Sukhanov Chapter Summary | Olga Grushin)
1967년 김근하 사건, 전과자에게 농락당한 엘리트 검사
김태현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것은 1967년 10월 부산에서 발생한 김근하 유괴살해 사건이다. 11세 초등학생 김근하 군이 살해돼 해변에 버려졌다. 진주여고 교감 아들 사건과 박춘우 유괴사건을 해결 한 검사로 명성을 쌓은 김태현이 수사를 지휘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부터 일이 꼬였다. 대구교도소 재소자 김금식이 경찰에 자신이 이 사건을 안다 는 식의 암시를 보내왔다. 김태현은 김금식을 교도소 밖으로 불러내 맛있는 음식과 술을 사주고 현금까지 쥐어주며 자백을 받아냈다. 더 나아가 그 자백을 기반으로 김근하의 외삼촌 최상욱과 지인 김기철, 정대범 등을 공범으로 지목해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냈다.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권총으로 머리를 위협하는 협박까지 동원됐다.
나중에 밝혀진 진실은 놀라웠다. 김금식은 단지 이 잘난 엘리트 검사들을 농락하고 싶었다 는 이유로 허위로 자백했던 것이다. 김금식이 법정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와 같은 전과자의 진술은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시험 삼아 범죄사실을 허위로 자백하여 보니 그런 사실은 전과자의 진술이라도 잘 믿더라.
전과자가 믿어줄까? 하고 시험해봤더니 국가 최고의 엘리트 검사들이 그대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여러 명의 인생을 망쳤다.
1967년 10월 20일 경향신문. 경향신문 포토라이브러리 1967년 10월 20일
1심에서 유죄, 대구고법 항소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1969년 7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그러나 김태현은 반성 대신 피고인들이 진범임에 틀림없다 고 버텼다. 대검은 재수사를 지시하면서도 김태현과 이원형의 사표를 반려했다. 전형적인 제 식구 감싸기였다.
더 기막힌 것은 이 사건 이후의 경력이다. 고문조작으로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뒤에도 김태현은 1973년 대전지검 차장, 1974년 서울지검 차장, 1975년 대검 공안부장, 1978년 또 대검 공안부장(대검 공안부장을 두 차례 역임한 것은 한국 검찰 역사상 김태현이 유일하다), 1979년 수원지검장, 1980년 부산지검장을 거쳤다. 수사 오판이 출세의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검찰요직을 두루 거쳤다.
공안검사로서의 반헌법 행위들
김태현은 유괴사건만이 아니라 공안사건에서도 광범위한 반헌법 행위를 했다. 1964년 문화방송 사장 황용주 필화사건에서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군비축소를 주장한 언론인을 반공법으로 기소했다. 1965년 한일협정 반대시위에 참가한 학생과 예비역 장성들의 호소문을 내란선동으로 몰았다.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자들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말라 고 당부한 군 원로들을 내란선동으로 기소한 것이다.
1975년 대검 공안부장으로서 재일한국인 모국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지휘했고, 1976년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 사건에서 함석헌(1901~1989), 문익환(1918~1994), 김대중(1924~2009) 등에게 중형을 구형했다. 이 사건들은 모두 훗날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김태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전두환에 의해 해임된 아이러니
박정희 정권의 공안검사로 승승장구하던 김태현의 경력을 끊은 것은 역설적으로 전두환(1931~2021)이었다. 1981년 4월 전두환이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 박정희 시대의 검찰을 자신의 검찰로 재편 하기 위해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를 단행했다. 26명이 옷을 벗었는데 김태현도 그 안에 포함됐다. 신직수 계열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한 인사였다는 해석이 있다.
독재권력에 충성한 자가 더 강한 독재권력에 의해 퇴출된 것이다. 이것이 공안권력의 세계다. 영원한 충성은 없다. 더 강한 권력이 등장하면 이전 권력의 충성자는 쓰레기가 된다.
979년 11월 6일 박정희 살해사건을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 연합뉴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의 길퍼드 4인 사건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기소한 경찰관들은 이후 긴 조사를 받았고, 영국정부는 공식사과했다. 그리고 영국은 오판방지를 위한 독립적인 형사사건검토위원회(Criminal Cases Review Commission)를 1997년 설립했다.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관이 생긴 것이다.
한국에서 김태현은 무죄판결 뒤에도 반성 없이 공안검사로 승승장구했고, 자연사했으며, 그가 저지른 수사의 피해자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고통 속에서 살았다. 조갑제가 취재해 기록한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고문 후유증 등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요절하거나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김태현을 떠올렸다. 검사의 확증편향과 공명심이 무고한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구조. 그 구조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작동하고 있지 않은지를 경계해야 한다. 전과자에게 농락당한 엘리트 검사들 이라는 조갑제의 표현이 단순히 한 사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한국검찰의 구조적 문제를 가리키는 말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