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 아래에 왕이··· 기적을 먹고 사는 레스터 시티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국에서 도시 이름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일종의 지적 모험이다. Leicester. 처음 보는 사람은 대부분 레이세스터 쯤 읽겠지만 영국인들은 이 도시를 레스터라고 부른다. 철자를 반쯤 잡아먹는 이 묘한 작명 센스야말로 레스터라는 도시의 성격을 압축한다. 겉으로 보기엔 별거 없는 중부도시 같지만, 뜯어보면 역사와 인물과 기적이 겹겹이 쌓여 있다.
헤이마켓 기념 시계탑은 레스터 중심부의 주요 보행자 교차로에 위치한 눈에 띄는 이정표다.(위키피디아)
로마인이 세우고 바이킹이 두드린 도시
레스터의 역사는 꽤 오래 됐다. 기원 전 47년경, 로마군이 지금의 레스터 지역에 발을 디디며 라타에 코리엘타우보룸(Ratae Corieltauvorum) 이라는 도시를 세웠다. 당시 로마는 이 일대에 목욕탕과 광장을 건설했고, 그 목욕탕의 흔적이 지금도 유대인 담장(Jewry Wall) 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서기 160년경에 건설된 이 담장은 영국에 현존하는 로마 석조건축물 중 가장 높은 부분에 해당한다. 2천 년 가까이 서 있는 벽돌 덩어리가 현재 주차장 옆에 그냥 서 있다는 사실이 영국이라는 나라를 잘 설명한다.
로마가 물러난 뒤 바이킹이 들어왔고, 중세에는 노르만 귀족들이 성을 쌓았다. 12세기에 세워진 성 마리아 드 카스트로 교회(St Mary de Castro) 는 지금도 레스터 성터 옆에 서 있다. 1107년에 로베르 드 보몽이 세운 이 교회는 한국의 어지간한 절보다 오래 됐다.
레스터의 유대인 담장: 로마 목욕탕, 궁전, 앵글로색슨 교회의 유적(위키피디아)
주차장에서 왕이 튀어나오다
레스터가 대문짝만하게 뉴스로 등장한 것은 2012년의 일이다. 시의회가 낡은 학교 건물을 사들이면서 그 주차장을 파헤쳤더니, 무려 527년 전에 죽은 잉글랜드 왕 리처드 3세(1452~1485)의 뼈가 나왔다. 리처드 3세는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에게 패해 전사한 마지막 참전 잉글랜드 군주였다. 전투에 진 뒤 그의 시신은 말 등에 얹혀 레스터 시내를 끌려 다니며 죽었음을 증명하는 데 쓰였고, 이후 허름하게 매장됐다가 수백 년간 행방이 묘연했다.
그런데 그 왕이 주차장 아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왕실보다 더 흥분한 건 레스터 시민들이었다. 시는 발 빠르게 주차장 자리에 리처드 3세 방문자 센터를 세웠고, 2015년에는 레스터 성당에 왕의 유해를 다시 안장하는 성대한 의식을 치렀다. 무려 530년 만에 제대로 치러진 장례였다. 레스터 대성당은 웨스트민스터 이외에 영국 군주의 무덤을 품은 몇 안 되는 성당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한국으로 치면 어떤 상황일까. 조선 태조 이성계의 무덤이 어딘가 강남주차장 지하에 있었는데 재개발하다 발견됐다고 상상해보라. 그 혼란과 흥분을, 그리고 그것을 관광자원으로 만들어낸 레스터의 행정력을. 우리 같으면 진영논리에 따라 묘 발굴도 찬반이 갈렸을 것이다.
레스터 성당에 안치된 리처드 3세의 유해(김성수 시민기자)
의회 민주주의를 낳은 반역자
레스터와 연결된 인물 중 역사적으로 가장 무게감 있는 이는 시몽 드 몽포트(Simon de Montfort, 1208 경~1265)다. 프랑스 태생의 이 귀족은 레스터 백작 작위를 얻어 잉글랜드에 정착했고, 헨리 3세 왕에 맞서 귀족반란을 이끌었다. 결정적인 것은 1265년 1월 20일, 그가 소집한 의회였다. 기존 의회는 귀족과 고위성직자들만의 클럽이었는데, 몽포트는 처음으로 지방 기사들과 도시 대표들, 즉 평민 대표를 불러들였다. 이것이 영국 하원의 뿌리로 꼽힌다.
몽포트 본인은 그해 에브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그가 뿌린 씨앗은 수백 년에 걸쳐 자라 오늘날 영국 민주주의의 뼈대가 됐다. 레스터에는 그의 이름을 딴 드 몽포트 대학까지 있다. 다만 최근에는 그가 1231년 유대인들을 레스터에서 추방한 흠결 때문에 대학 학생회가 교명 변경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역사의 영웅도 다면체다.
한국의 현 상황과 겹치는 지점이 있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뿌리를 다시 묻고 있다. 레스터의 교훈은 분명하다. 민주주의는 한 인물이 완성시키는 게 아니라, 그 인물이 촉발한 제도가 이어지고 싸우며 다듬어질 때 완성된다. 몽포트가 죽었어도 의회는 살아남았다.
레스터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그림으로,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트 6세를 묘사하고 있다.(위키피디아)
권력자의 말로, 그리고 수도원의 재
레스터 수도원 공원(Abbey Park)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헨리 8세의 최측근이자 추기경이었던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 1473 경~1530)가 바로 이곳에서 숨을 거뒀다. 헨리 8세의 온갖 정치적 욕망을 대신 처리해주던 울지는 첫 번째 왕비와의 이혼을 성사시키지 못하자 반역죄로 체포됐다. 런던탑으로 압송되던 중 레스터에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고, 1530년 11월 29일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권력 2인자의 비참한 말로. 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결국 왕에게 버려진 인물. 이 장면을 보며 한국정치의 그 수많은 울지들 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국회의사당과 검찰청 사이 어딘가에 자기가 울지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토머스 울지 초상화(위키피디아)
무대 위의 반항자와 구장의 기적
레스터가 낳은 인물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극작가 조 오턴(Joe Orton, 1933~1967)은 레스터 노동자계층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연극학교 장학생이 됐고,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불과 3년 동안 영국연극계를 발칵 뒤집었다. 동성애가 범죄로 취급받던 시절에 성 정체성을 공개했고, 경찰과 종교와 부르주아 도덕을 통렬하게 풍자한 희곡들을 썼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오턴적 (Ortonesque이라는 형용사는 지금도 어둡고 냉소적인 희극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34살에 파트너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맺었지만,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세계무대에서 공연된다.
축구 선수 게리 리네커(1960- )는 레스터 청과물 시장 좌판 집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 생활기록부에 축구에만 집착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고 적혔던 그는 잉글랜드 역사상 손꼽히는 공격수가 됐다. 16년 선수생활 동안 경고 한 장, 퇴장 한 번 없이 국제축구연맹(FIFA) 페어플레이 상(1990)을 받았다. 2002년에는 파산 직전의 레스터시티 구단을 구하는 투자모임을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레스터시티 축구단 이야기를 빼면 레스터 이야기는 반이 빠진다. 2015~2016시즌, 우승 배당률이 5000대 1이었던 이 팀이 잉글랜드 최상위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확률 그대로 기적이었다. 세계언론이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라고 불렀다. 돈도 스타도 없는 팀이, 모두가 비웃던 팀이 정상을 찍었다. 레스터는 주차장에서 왕을 꺼내더니 이번엔 축구장에서 기적을 만들었다.
1964년의 조 오턴(위키피디아)
축구 선수 게리 리네커(위키피디아)
레스터가 한국에 건네는 말
레스터는 어디에 있는 도시냐 는 질문을 받을 법한 곳이다. 런던도 맨체스터도 아니고, 잉글랜드 중부 어딘가에 있는 인구 약 35만의 도시. 하지만 이 도시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첫째, 역사를 발굴하는 자세. 레스터는 낡은 주차장을 팠다가 나온 왕의 뼈를 관광자원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역사유적지를 두고 얼마나 싸우는가. 레스터는 발굴하고, 연구하고, 이야기로 만들었다. 논쟁보다 먼저 땅을 팠다.
둘째, 패자도 복원하는 문화. 리처드 3세는 역사의 패자였다. 셰익스피어에게 악당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레스터는 그를 비난하거나 지워버리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꺼내 들여다봤다. 우리사회는 패자를 제대로 복원할 줄 아는가.
셋째, 제도는 사람보다 오래 산다. 시몽 드 몽포트는 1265년 전사했지만 그가 소집한 의회의 원칙은 760년을 살아남아 오늘날 민주주의의 뿌리가 됐다.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뿌리를 얼마나 단단히 키우고 있는지, 계엄 선포 한 방에 흔들리는 체계는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주차장 밑에서 왕이 나오는 나라. 5000대 1의 배당률을 이겨내는 도시. 레스터는 기적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냥 삽을 들고 판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쥐고 있는 삽 좀 들자.
14세기에 지어진 레스터 길드홀(위키피디아)
14세기에 지어진 레스터 길드홀 안에서 김성수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