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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원자론 의 색맹 과학자 존 달톤이 전하는 메시지

원자론 의 색맹 과학자 존 달톤이 전하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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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겊 장수 아들, 과학의 역사를 다시 쓰다 존 달톤(John Dalton, 1766-1844)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화학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원자론 의 창시자다. 색맹에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정규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시골교사 출신이었다. 요즘 같으면 스펙이 부족하다 며 대기업 입사 원서조차 넣지 못했을 인물이다. 1766년 영국 북부 컴벌랜드의 가난한 퀘이커교 집안에서 태어난 달톤은 아버지가 헝겁 짜는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퀘이커교도는 일종의 이단 으로 취급받았다. 명문대학 입학도, 공직 진출도 막혀 있었다. 지금의 한국으로 치면 학벌도 없고 집안 배경도 보잘것 없는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다.   토머스 필립스가 그린 달톤의 말년 모습. 1835년 (위키피디아) 12세 교사, 색맹 과학자의 탄생 놀랍게도 달톤은 열두 살에 동네학교 교사가 됐다. 당시 시골학교는 그저 읽고 쓰기만 가르치면 됐으니까. 하지만 달톤은 달랐다. 독학으로 수학과 자연철학을 공부하며 지식을 쌓아갔다. 달톤은 색맹이었다. 빨강과 초록을 구분하지 못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회색 양말을 선물했는데, 알고 보니 빨간 양말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경험이 계기가 돼 달톤은 1794년 색맹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논문을 발표했다. 지금도 영어권에서 색맹을 달톤증(Daltonism) 이라 부르는 이유다. 장애를 단순히 불편함 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그의 태도, 이게 바로 진짜 과학자의 자세 아닐까?   존 달톤의 출생지를 기념하는 명판 (위키피디아) 2000년 묵은 철학을 과학으로 바꾸다 달톤의 진짜 업적은 1803년부터 시작된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기원 전 460?-기원 전 370?)가 주장했던 원자 개념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달톤은 단순히 옛날 철학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1808년 출간한 화학철학의 새로운 체계 에서 그는 혁명적인 주장을 펼쳤다. 각 원소는 고유한 무게를 가진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화학반응은 이 원자들이 일정한 비율로 결합하거나 분리되는 것이다. 지금 들으면 당연한 소리 같지만,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동료 과학자들은 코웃음 쳤다. 하지만 달톤의 고집 이 빛을 발한다. 그는 40년 가까이 기상관측 일지를 썼다. 무려 20만 건 이상의 기록이다. 이 집요함이 그의 원자론을 뒷받침했다. 1826년 달톤은 왕립학회 회원이 됐다. 1832년에는 옥스퍼드대학이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학벌도 없고 정규교육도 받지 못했던 시골교사가 영국 학계의 정점에 오른 순간이었다. 학력을 세탁하거나 논문을 표절하지 않고도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존 달톤의 출생지를 기념하는 현대식 명판 (위키피디아) 맨체스터가 낳은 겸손한 거인 달톤은 1793년부터 맨체스터에 정착해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당시 맨체스터는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다. 달톤은 그 속에서 묵묵히 연구했다. 화려한 런던이 아닌 지방도시에서, 거창한 연구소가 아닌 작은 실험실에서 세계를 바꿀 발견을 해냈다. 1844년 7월 27일, 그가 사망했을 때 맨체스터 시민 4만 명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당시 맨체스터 인구가 35만 명이었으니, 10명 중 1명 이상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한 셈이다. 왕족도 귀족도 아니었지만 달톤은 진정으로 존경받았다.   1793년에 출판된 달톤의 첫 번째 저서인 기상 관측 및 에세이 사본 (위키피디아) 한국이 달톤에게 배워야 할 것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지금 한국에서 달톤의 이야기가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첫째, 학벌만능주의에 대한 반성이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SKY 니 인 서울 이니 하는 학벌에 집착한다. 달톤이 현대 한국에 태어났다면? 아마 지잡대 출신으로 분류돼 수많은 입사서류에서 탈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실력은 학벌이 만들어주지 않는다. 달톤은 정규대학 교육 없이도 근대화학의 기초를 세웠다. 학벌이 아닌 실력으로, 졸업장이 아닌 업적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 둘째, 지방과 중앙의 격차 문제다. 달톤은 런던이 아닌 맨체스터에서 평생을 보냈다. 당시로서도 지방 이었던 그곳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냈다. 요즘 한국은 어떤가?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된다. 지방대학의 위기는 심각하다. 지방에 사는 청년들은 서울로 가야 기회가 있다 며 떠난다. 달톤의 사례는 묻는다. 정말 서울에만 인재가 있고, 서울에만 혁신이 가능한가? 진짜 인재는 어디서든 빛을 발한다. 문제는 지방에 그들이 빛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는 우리사회의 구조다. 셋째,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다. 달톤은 색맹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장애를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연구 주제로 삼았다. 지금 한국의 장애인 고용률은 여전히 낮다. 장애인을 배려 의 대상으로만 보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로 보지 않는 시선이 많다. 달톤이 보여준 것은 장애가 능력을 가로막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건 사회가 그들에게 기회를 주느냐는 것이다. 넷째, 기초과학의 중요성이다. 달톤의 원자론은 당장 돈이 되는 연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발견이 없었다면 현대화학, 나아가 반도체산업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은 언제까지 빨리빨리 성과 내는 응용연구에만 매달릴 것인가? 노벨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혁신을 위해서 기초과학이 필요하다. 달톤처럼 40년간 날씨를 관찰하는 쓸모없어 보이는 연구가 결국 세상을 바꾼다.   존 달톤 프로필.(위키피디아) 과학이 아닌 과학하는 태도 를 배우자 달톤의 진짜 유산은 원자론 자체가 아니다. 그의 태도다.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관찰을 믿었던 독립성, 40년간 날씨를 기록한 끈기, 색맹이라는 약점을 연구주제로 바꾼 창의성, 명예와 부를 쫓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순수성. 한국이 진정 선진국이 되려면 이런 태도를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성과 내라고 재촉하지 말고, 실패를 용인하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챈트리가 제작한 달튼 흉상, 1854년.(위키피디아) 맨체스터가 아닌 광주에서, 대구에서 달톤은 1844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원자론은 훗날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했다. 달톤이 심은 씨앗이 거대한 나무로 자란 것이다. 현재 한국에도 수많은 달톤 들이 있을 것이다. 지방대학에서 묵묵히 연구하는 학자, 장애를 딛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청년, 학벌은 없어도 실력 하나로 승부하려는 이들. 문제는 우리사회가 그들을 알아보고 기회를 주느냐는 것이다. 맨체스터가 달톤을 품었듯, 광주도, 대구도, 전주도 자신들의 달톤을 품을 준비가 돼 있는가? 색맹 과학자 달톤은 세상을 다른 색으로 봤지만, 진리만큼은 또렷하게 봤다. 우리도 편견이라는 색맹에서 벗어나 진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챈트리가 제작한 달튼 동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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