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한 거리에서 부르는 ‘우리’ 의 노래, 아침이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민기가 노래에 한 발을 딛게 한 것은 화구 비용이었지만, 그를 노래의 늪 속으로 잡아끈 건 당대의 상황이었다. 참담한 시대 상황은 그를 고뇌하게 했고 시를 쓰고 노래를 짓게 했다. 그리고 함께 고민하는 이들 앞에 서게 했다.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서울시청 앞 노제. 김민기는 이 자리에서 백만 명의 군중이 부르는 ‘아침이슬’을 들으며 ‘이제 이 노래는 내 노래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진 출처 : 6월항쟁 공식 홈페이지
1969년이 영구집권을 추구하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재야 학생 정치권이 일전을 겨룬 저항과 충돌의 해였다면, 1970년은 희망도 전망도 사라진 그야말로 ‘허황한 거리’였다. 당시 널리 애창되던 ‘보고 싶은 얼굴’이 그린 풍경이다. 지금도 누군지 모를 ‘현암’이 작사하고 이봉조가 작곡해, 현미가 처음 부른 노래다.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거리마다 물결이, 거리마다 발길이, 휩쓸고 지나간 허황한 거리에”
두 대목이 반복하는 이 노래는 1964년 후반에 나왔다. 6‧3 항쟁이 계엄군에 진압된 난 뒤였다. 학생과 시민들은 불과 4년 전 4·19혁명의 기세로 저항했지만, 군사정권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좌절해야 했다. 가사를 쓴 이가 이런 허황한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건지 몰라도, 듣거나 부르는 이들에게는 진압당한 이들의 처참한 심사를 대변하기에 충분했다. 이 노래는 1980년대까지 폭정의 시대가 계속됐기 때문인지 세대를 바꿔가며 국민가요로 애창됐다.
1970년 절망의시대
1970년 상황은 1964년 후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69년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정치권, 양심적 지식인, 학생들이 총궐기했지만, 개헌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진 개헌안은 반대보다 두 배 가까운 찬성으로 확정됐다. 아무리 관권이 총동원됐고 불법 부정이 저질러졌다지만, 찬성 65.1%, 반대 31.4%의 결과는 야당과 재야, 학생 운동권에는 절망적이었다.
야당인 민주당은 신파와 구파 사이에 책임론 공방으로 자중지란에 빠졌고, 학생들은 허탈과 무력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패배했다는 사실보다 더 스산한 한 것은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장기 집권의 길이 활짝 열렸으니, 정권의 폭주는 계속됐다. 야당도 학생도 재야도 정권의 폭주 앞에서 지리멸렬했다.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정권의 실력자들은 제멋대로 국정을 농단하고 축재에 혈안이었다. 파렴치와 일탈도 만연했다.
일탈의 대표적인 사건은 3월에 터진 정인숙 씨 피살 사건이었다. 그는 청와대 고위층들이 즐겨 다니던 요정 ‘선운각’ 마담이었으며, 사후 그의 집에서 발견된 소지품 중에는 정관계 고위층의 명암만 26장이 있었다. 그 속에는 박정희, 정일권, 이후락, 김형욱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에게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세간에는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이라거니 아니면 정일권이라거니 하는 소문이 돌았다.
경찰은 누이의 추문에 시달리던 오빠가 권총으로 살해한 것으로 서둘러 발표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리를 경질해야 했다. 확산하던 ‘그 대통령에 그 총리’ 혹은 ‘대통령과 총리가 동서’라는 ‘비어’가 퍼지는 걸 막아야 했다.
1970년 4월 8일 붕괴된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현장에서 소방대원들이 구조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백과(서울시 소방방재청제공)
이 사건은 개인의 부도덕성으로 치부하면 됐지만, 4월 8일 터진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은 정권의 뿌리를 뒤흔드는 ‘폭탄’이었다. 정권의 ‘부정과 부패, 무능과 부실’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사고로 무려 34명이 죽고 40여 명이 다쳤으니, 그것만으로도 ‘대형 사건’이었다. 게다가 준공한 지 불과 20일밖에 안 되는 아파트였고, 착공할 때부터 주거 환경의 근대화를 상징으로 치적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활용할 중요한 홍보 아이템이기도 했다. 공사 과정에서 얼마나 빼먹었길래 준공하자마자 붕괴했을까?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은 졸지에 정권의 부실, 부정, 부패를 알리는 상징물이 되어버렸다.
이 사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예민했던지, 정권의 폭압으로 답답하기만 했던 시절 세상 사람을 포복절도하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재치 넘치던 가수 조영남의 ‘신고산타령 해프닝’이 그것이었다.
조영남의 와우아파트 타령
정권 차원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겨우 잊혀가던 5월 22일 미국에서 가수로서 이름을 떨치고 귀국하는 김시스터즈의 귀국 공연이 열렸다. 김시스터즈는 트로트의 전설 이난영의 두 딸 김숙자와 애자 그리고 조카 김민자로 이루어진 아시아 최초 미국 진출 ‘걸 그룹’이었다. 1959년 미국에 진출했는데, ‘미국 최고의 TV쇼’였던 ‘애드 설리번 쇼’에만 22번이나 출연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귀국 공연에는 이들의 금의환향에 한 자리 걸치려던 정권의 고위층이 그야말로 ‘와르르’ 몰려왔다. 그런데 찬조 출연자로 무대에 선 조영남이 재주를 부린다는 게 그만 정권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와우아파트 와르르르르,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 대통령엔 이승만 부통령엔 조영남”. 조영남은 즉석에서 신고산타령을 ‘와우아파트 타령’으로 바꿔 불렀다. 객석은 ‘와르르’ 폭소가 쏟아지다가 돌연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고위 관리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조영남은 노래가 끝나고 대기실로 들어서자마자 험악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즉시 공연장 뒷문으로 빠져나와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자택으로 피신했다. 김 총장은 조영남을 막둥이 동생처럼 아끼던 터였다. 중앙정보부 요원이 그를 체포하러 그가 숨을 만한 곳을 뒤지는 동안, 김 총장은 중정부장 등 연줄을 동원해 조영남이 감옥 대신 군에 입대하도록 주선했다.
김지하 필화사건
정권의 이런 부정부패, 일탈을 문학적으로 반영한 사건이 담시 ‘오적 필화’였다. 시인 김지하는 당시 장관과 차관, 국회의원, 재벌 등 박정희 정권의 부패한 권력층을 ‘을사오적’에 빗대어 그 추잡한 실상을 까발린 이 장편 서사시 ‘오적’을 5월호에 발표했다. 잡지가 발간되자마자 정권은 또 발칵 뒤집혔고, 김지하는 물론 편집장 김승균도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치도곤을 당했다. 정권은 이 사건을 핑계로 눈엣가시였던 를 폐간시켰다. 이와 함께 정권에 날선 비판을 하던 함석헌 선생이 창간한 도 창간하자마자 바로 폐간해 버렸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를 짓밟아도 시민의 비웃음과 비난이 수그러들지 않자, 정권은 기절초풍 할 조치를 꺼내 들었다. 그해 8월 발표한 퇴폐적 사회 풍조 일소 방안이 그것이다. 남자의 머리카락 길이와 여자의 치마 길이까지 정부가 챙기겠다고 나선 것이다.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이었다. 용모와 복장이 난잡하다 하여 이른바 ‘히피’의 입국도 금지했다.
2005년 광주 충장로 축제에서 1970년대 장발단속을 재연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황당했지만 전후 세대들은 경찰의 곤봉 앞에서 체념해야 했고, 자유분방한 ‘청년문화’에 질색하던 전쟁 세대는 환영했다. 박정희 정권은 ‘몽둥이’를 앞세워 민중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틀어막는 데 성공하긴 했다. 그러나 국제 사회에서 ‘미개국’으로 낙인찍히는 것까지 틀어막지는 못했다. 대한민국은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부족 국가 수준으로 퇴행하고 있었다.
9월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40대의 김대중 의원이 제1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기득권화된 노장 세대가 틀어쥐고 있던 야당은 물론 정치판 전체를 흔드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폭압을 이겨낼 희망까지 주지는 못했다. 그만큼 야당의 무능과 태만에 대한 시민들의 실망은 컸다.
전태일 분신사건
그런 시민사회의 무기력을 흔들어 깨우는 사건이 11월 일어났다. 13일 동대문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 씨가 분신했다. 제 몸을 태우는 불길 속에서 그가 던진 외마디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것이었다. 22살 노동자 청년의 분신은 정권에게는 일개 노동자의 수많은 죽음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양심적인 지식인, 종교인 사회와 학생 운동권에는 그들이 딛고 있는 실존적 기반을 흔드는 충격이었다.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이들은 그동안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의 참혹한 현실을 외면했다.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정치적 민주화가 이런 문제를 모두 해결하리라고 낙관했다. 한 청년 노동자의 분신 앞에서 양심적인 학생과 지식인들은 현실 인식과 관점과 전망을 새로 정비하기 시작했다.
김민기가 존경하던 조영래의 삶을 뒤흔든 것도 이 사건이었다. 그는 그해 12월 서울대 법대 교정에서 전태일 열사 서울대 법대학생장(葬)을 주도했다. 선언문도 그가 작성했다. 2년 뒤 조영래는 대학생 친구가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다는 전태일의 이야기를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서 듣는다. 비록 전태일은 떠났지만, 그의 친구가 되기로 다짐하고 조영래는 민청학련 사건 배후로 몰려 도피하는 동안 을 썼다.
조영래, 장기표 등의 이런 노력 결과일 것이다. 살인적인 장시간, 저임금, 노예노동 등 당대의 모순을 모두 짊어진 노동자, ‘또 다른 전태일’에게는 대학생 친구들이 생겼다. 김민기도 이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누구는 학원에서 노동자와 연대(‘노학연대’)를 추진하고, 누구는 사업장에서는 민주노조 결성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누구는 노래로 이들의 소망을 대변하려 했다.
그러나 더 많은 젊은이는 전혀 다른 세계로 회피했다. 당시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상징되는, 이른바 ‘청년문화’가 스멀스멀 퍼지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흘러온 것이지만, 저항은 빠지고 일탈만 나타나는 양상이었다.
젊은이들의 저항문화속 아침이슬
1968년 유럽에선 전쟁에 반대하고, 위계와 권위에 맞서며, 자본에 저항하고, 인간 소외와 차별을 극복하려 했던 68혁명이 휩쓸었다. 학생혁명의 파도는 대서양을 건너, 베트남전에 시달리던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로 넘어가 반전 및 차별철폐 운동과 함께 ‘히피’의 일탈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런 풍조 가운데 ‘일탈’과 저항의 어중간한 형태로 태평양을 건너온 게 한국판 청년문화였다. 젊은이들은 군사정권의 폭력과 억압의 현실을 회피하고 냉소하며, 차별과 불평등을 외면했다. 대신 감각적인 일탈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려 했다. 폭압이 그만큼 거칠기도 했지만, 시민사회의 저항이 번번이 실패한 데 따른 절망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허황한 거리에서 태아난 아침이슬 50년, 헌정 앨범. 2021년 6월 6일 발매됐다. 사진: 학전 제공
이 ‘허황한 거리’를 뚫고 태어난 노래가 김민기의 ‘아침이슬’이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광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묘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극적이다. ‘허황한 거리’의 좌절과 절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결단이다. 그건 패배와 냉소에 빠져 있건,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건, 당시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갈망했던 것이었다.
그해 말 김민기는 또 다른 노래 ‘아하 누가 그렇게’를 짓는다. 작가가 함구했으니 그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감정이입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이 가운데 많은 이들은 불꽃으로 사라진 전태일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했다고 생각하며 애창했다.
아하 누가 푸른 하늘 보여주면 좋겠네”
아하 누가 은하수도 보여주면 좋겠네”
아하 누가 나의 손을 잡아주면 좋겠네”
아하 내가 저 들판의 풀잎이면 좋겠네”
아하 내가 시냇가의 돌멩이면 좋겠네”
백열등 아래서 섬유 분진을 마시며 하루 종일, 폐병에 쓰러질 때까지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 이들은 하다못해 푸른 하늘이나 밤하늘 은하수조차 볼 수 없었다. 당시 노동자들이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먹여 살리기 위해 상실해야 했던 일상이었다. 차라리 들판의 풀잎으로 태어나 마음껏 싱그런 공기 마실 수 있고, 시냇가의 돌멩이가 되어 물결 따라 구를 수 있다면…, 그건 시루 속 콩나물처럼 빼곡히 앉아 용변 보는 것도 통제당하며 일해야 했던 이들의 소망이었다. 게다가 ‘나의 손 잡아줄 누군가’를 간절히 바랐던 것은 바로 그 전태일의 소망이었다.
1970년을 고비로 김민기 삶의 중심은 노래로 기울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허황한 거리’는 온기를 나누고, 희망을 나누고, 서로의 손을 잡아주려는 ‘선의’와 열정을 일으켜 깨우고 불씨를 퍼트리게 했다. 그는 노래와 함께 ‘나’의 닫힌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