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더 돌격대’가 있다면 쿠팡 제압할 수 있을까?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966년 3월 22일 미국 연방 상원 청문회장에 제네럴모터스(GM)의 제임스 로시 사장과 시민운동가인 랠프 네이더 변호사가 나란히 앉았다. 뜻밖에도 60살의 노회한 기업인이 32살 풋내기 변호사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다. 소년 다윗이 돌팔매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순간이었다.
TV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깜짝 놀랐다. 당시 GM은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제조사였다. 1953년 인사청문회에서 찰스 윌슨 국방부 장관 지명자가 한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은 것”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때였다. 그런 GM의 대표를 무릎 꿇린 네이더는 과연 누구이고 GM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랠프 네이더가 1966년 3월 22일 미국 연방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자동차의 설계상 결함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위키미디어커먼스)
레바논 이민자 아들로 태어나 하버드 로스쿨 진학
네이더는 1934년 2월 27일 미국 북동부 코네티컷주에서 태어나 자랐다. 레바논 출신 이민자인 부모는 직물공장 노동자, 제빵소 주인, 식당 주인 등을 거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사람이었다. 네이더는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권태감을 느꼈다.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아메리카 원주민 마을이나 흑인 빈민가 등을 돌아보는가 하면 졸업 후 쿠바와 소련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1959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경력을 쌓다가 1963년 대니얼 모이니한 노동부 차관 보좌관으로 발탁됐으며, 얼마 뒤 연방 상원의 자동차 안전 관련 소위원회 자문역도 겸임했다.
네이더는 자동차 사고를 겪은 고객들을 상담하면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자동차의 안전 문제를 따져보기로 마음먹었다. 청년 시절 히치하이킹으로 전국을 돌며 숱하게 교통사고를 목격한 경험도 한몫했다. 그때는 사고가 나면 으레 운전자의 과실 탓이라고 여겼다. 당시 자동차 회사들도 안전한 운전자를 만들자”는 구호를 즐겨 사용해 운전자 책임이 크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나 네이더의 생각은 달랐다.
GM 자동차 결함 폭로하는 책 내고 본격 소비자 운동 전개
그는 자신의 경험과 수집한 자료 등을 토대로 1965년 11월 30일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미국 자동차의 설계상 위험(Unsafe at Any Speed:The Designed-In Dangers of the American Automobile)’을 펴냈다. 자동차 제조사들이 고객의 안전 문제를 등한시하며 이익 추구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고 고발한 것이다.
랠프 네이더가 1965년 11월 30일 출간한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
표적이 된 자동차는 유럽산 소형 승용차에 맞서기 위해 GM이 1960년 야심작으로 선보인 쉐보레 콜베어였다. 이 차는 엔진을 뒤쪽에 배치한 최초의 후륜구동형 모델로 외관과 가격에 집중하느라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핸들을 돌린 각도보다 바퀴가 더 돌아가는 ‘오버스티어(Oversteer)’ 현상이 나타나고, 현가장치(Suspension) 결함 탓에 미끄러짐이 발생할 때 차가 심하게 요동치고 전복 위험이 높았다. 이에 따른 사고가 빈발해 시판한 지 5년 만에 GM을 상대로 한 고소 사건이 130건 넘게 쌓인 상태였다.
네이더의 폭로로 소비자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치자 GM은 사과와 배상 등을 통한 문제 해결보다는 네이더의 약점을 잡느라 골몰했다. 메신저를 공격해 메시지를 무력화하려고 한 것이다. 사설탐정들이 네이더 학창 시절 친구와 교사들을 찾아다니며 뒤를 캐는가 하면 약점을 잡으려고 매춘부를 고용해 네이더를 유혹하기까지 했다.
랠프 네이더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된 GM의 쉐보레 콜베어 승용차. (GM)
GM 합의금 등으로 ‘네이더 돌격대’ 활약 기틀 마련
네이더가 이 사실을 폭로하자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들이 집중 취재에 나서 GM의 추악한 행태를 고발했다.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 아베 리비코프는 청문회를 열었다. 로시 사장은 네이더가 근거도 없이 GM을 헐뜯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네이더가 GM 내부 조사보고서를 증거로 제출하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해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의회가 제정한 ‘국가 교통 및 자동차 안전법’에 서명했다. 자동차의 설계 및 작동의 결과로 발생하는 불합리한 사고에 대해서는 제조사가 책임지도록 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고속도로 설계에 따른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고속도로 안전법도 곧이어 제정됐다. GM은 1969년 콜베어 생산을 중단했다.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1966년 미국 시장에서 비문학 베스트셀러가 됐다. 네이더는 GM을 사생활 침해 혐의로 고소해 1970년 42만 5000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냈다. 네이더는 출판 수익금과 합의금으로 자동차안전연구소, 공익법률연구소, 공적시민협의회 등 40여 개의 시민단체를 설립했다. 명문대 출신의 법률가, 과학자, 기술자 등 젊은 전문가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들은 ‘네이더 돌격대(Naider s Raiders)’라고 불리며 대기업과 정부를 감시했다.
미국 워싱턴의 연방 의사당 앞에서 포즈를 취한 ‘네이더 돌격대’. 맨 앞의 랠프 네이더의 뜻을 따르는 젊은 전문가들이다. (위키미디어커먼스)
이들의 활약 덕분에 1967년 자동차에 관한 안전기준 10여 가지가 마련됐다. 안전벨트 설치와 운전석 앞 안전유리(잘 깨지지 않고 깨지더라도 파편이 튀지 않도록 만든 유리) 장착 등이 의무화됐다. 이전까지 안전벨트는 선택사양이어서 없는 차가 많았고, 사고가 나면 자동차 앞유리 파편에 찔려 사망하거나 부상하는 경우가 잦았다. 1970년대에는 에어백이 개발됐다.
‘바른 선택’ 넘어 ‘정치적 행동’으로 기업 태도를 바꾼 ‘네이더리즘’
소비자 운동은 다른 분야로도 확산됐다. 납 성분이 들어간 휘발유 판매를 금지하고 식품의 제조·보관·운반에 대한 법규를 강화하거나 신설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아동보호법, 담배표기법, 인화성직물개정법, 위생법, 소비자신용보호법, 정보공개법 등도 네이더 돌격대가 거둔 성과들이다. 비행기 금연도 네이더가 1969년 처음으로 청원한 이래 끈질기게 주장해 이뤄졌다. 대기업들은 소비자 상담실과 모니터실 운영, 무상 애프터서비스 실시, 대규모 리콜제 도입 등에 나섰다.
네이더 이전에도 소비자 운동은 있었다. 1960년 4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소비자기구(CI)의 전신인 국제소비자연맹(IOCU)이 출범했다. 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962년 3월 15일 의회 연설에서 ▲안전할 권리 ▲알 권리 ▲선택할 권리 ▲의사를 반영할 권리라는 ‘4대 소비자의 기본 권리’를 선언했다.
그때까지의 소비자 운동은 대부분 상품의 품질을 비교한 자료를 제공해 소비자들의 선택을 유도하는 데 그쳤다. 네이더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네이더는 ‘바른 선택’을 넘어서서 ‘정치적 행동’을 통해 기업의 태도를 바꿔나갔다. 그의 방식은 ‘네이더리즘(Naderism)’이라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됐다. 그는 시민운동의 대부로 떠받들여졌고, 인도의 성자(聖者) 마하트마 간디에 빗대 ‘성인(Saint) 네이더’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많은 비판과 의혹, 고령에도 ‘대기업 저격수’ 역할 여전
하지만 1970년대 들어 네이더가 정치 활동에 치중하면서 압도적인 존재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직접 정치에 뛰어들었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4차례나 대선에 출마했으나 번번이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해 ‘선거 훼방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2000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표를 깎아 먹어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는 비난을 샀다.
랠프 네이더가 2004년 대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출마 과정에서 공개된 막대한 재산도 구설에 올랐다. 독신의 네이더는 강연료와 책 인세 등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의 80%를 사회에 환원했고, TV와 자동차도 없이 검소하게 생활했으나 390만 달러가 넘는 재산 자체가 곱게 비치지 않았다. 어떤 기업을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그에 대비한 투자로 재산을 불렸다는 의심도 샀다. 예를 들면 자동차 에어백 부착 의무화를 주장할 때는 에어백 제조사 주식을 미리 사놓고, 파이어스톤 타이어의 안전성이 의심된다고 지적하기에 앞서 경쟁사 타이어 회사에 투자했다는 것이다.
네이더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저격수’란 별명답게 쓴소리를 해왔다. 2019년에는 두 차례 추락 사고를 겪은 보잉 737 맥스 여객기의 영구 운항 금지를 촉구했으며 2022년에는 사고를 자주 일으키는 테슬라 완전자율주행차(FSD)의 퇴출을 요구하고 나섰다.
아직도 전문성과 정치력이 미흡한 한국 소비자 운동
우리나라에서는 서울YWCA(여자기독교청년회)가 1964년 소비자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1968년 소비자정보센터를 설립한 것이 본격적인 소비자 운동의 시작이다. 한국소비자연맹은 1970년 1월 20일 창립돼 그해 6월 25일 국제소비자연맹에 가입했다. 현재 국제소비자기구에는 한국소비자연맹,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소비자시민모임 3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서울YWCA가 1972년 9월 12~13일 서울 중구 명동의 YWCA회관에서 ‘반소비자 행위에 우리는 도전한다’란 주제 아래 제1회 전국 소비자 보호 세미나를 열고 있다. (서울YWCA)
초창기 소비자 운동은 정광모, 리숙종, 김재옥, 송보경, 강광파 등 여성운동가들이 주도했다. 금연 운동과 모유 권장 캠페인을 벌이는가 하면 잔류 농약과 백화점 사기 바겐세일 등을 폭로하고 환자 권리 선언, 약관 규제법 등을 끌어냈다. 우리나라는 1979년 소비자보호법이 제정된 12월 3일을 소비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소비자 운동이 성숙함에 따라 소비자들의 귄리와 인식도 많이 신장되고 높아졌다. 하지만 단체들의 전문성과 정치력이 미흡해 노동이나 환경 등 주요한 사회적 이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집단소송제 등 제도 마련에 뒤떨어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네이더와 그의 돌격대처럼 투철한 의지와 탄탄한 실력으로 무장해 대기업의 횡포에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이나 세력이 부족한 데다가 뉴욕타임스와 같이 광고주 눈치를 보지 않고 소비자 권리 보호에 앞장서는 언론을 찾아보기 힘든 탓이다.
쿠팡 등 대기업 행태에 무력감만 느끼고 있어야 할까?
참여연대 회원들이 2026년 2월 12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 축소 시도를 규탄하고 쿠폰 제공을 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참여연대)
더욱이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국경의 장벽이 사라지고 구글이나 엔비디아 등 초대형 다국적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주무르는 오늘날에는 소비자들이 무력감마저 느낀다. 심지어 쿠팡은 국내 시장을 기반으로 사업을 벌이면서도 미국에 본사를 두고 법망을 피해가는 것은 물론 로비를 통해 미국의 통상 압박까지 불러들이려 하고 있다.
3월 15일은 세계 소비자의 날이다. 케네디의 소비자 권리 선언을 기념해 국제소비자기구가 1983년 제정했다. 1주일 뒤는 네이더가 GM의 항복을 받아낸 지 꼬박 60년 되는 날이다. 소비자 운동의 좌표를 점검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