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옷 한 벌로 세상을 바꾼 영국 사업가 세실 잭슨콜 [사람들] 1943년 봄, 옥스퍼드의 한 위원회 사무실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당신은 지나치게 사업가처럼 군다. 자선이란 조용히, 점잖게 하는 것 아닌가.
불평을 들은 사내가 잠시 침묵한 뒤 답했다.
굶어 죽는 사람은 조용히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세실 잭슨콜(Cecil Jackson-Cole, 1901~1979). 본명 앨버트 세실 콜. 1901년 11월 1일 런던 동쪽 포레스트 게이트에서 태어나 1979년 8월 9일 켄트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7세. 생전에 그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사진도 드물고 이름도 낯설다. 그러나 그가 만들거나 키워낸 기관들의 이름은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통한다. 옥스팜(Oxfam), 노인돕기회(Help the Aged, 현 에이지 유케이(Age UK)), 앵커 주거신탁(Anchor Housing Trust, 1968년), 액션에이드(ActionAid, 1972년). 이 넷만으로도 전 세계 수억 명의 삶에 닿는다.
세실 잭슨콜(Cecil-Jackson-Cole-1962-in-Oxford.jpg)
헌 옷 가게에서 국제 구호기관으로
1942년 말, 독일 점령 아래 그리스 민간인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연합군의 해상봉쇄로 식량이 끊겼고, 영국 정부는 점령국인 독일이 책임져야 한다 며 나 몰라라 했다. 그사이 수십만 명이 굶어 죽었다. 이 소식에 분개한 옥스퍼드의 퀘이커교도·교수·성직자들이 옥스퍼드 기아구호위원회(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를 결성했다. 위원장은 그리스어학 교수 길버트 머리(Gilbert Murray, 1866~1957), 공동 소집자는 대학교회 참사회원 딕 밀퍼드(Dick Milford, 1896~1987)였다.
위원회가 처음 소집된 것은 1942년 10월 5일. 격식은 있었으나 돈도 전략도 없는 모임이었다. 그해 12월, 인근 보어스 힐(Boar s Hill)에 살던 사업가 잭슨콜이 명예서기를 자원했다. 그는 1928년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인물이었다. 그가 합류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1943년 봄, 그는 그리스 주간(Greek Week) 이라는 집중 모금행사를 기획하고 거리에 가게를 열어 헌 물건을 팔아 그리스 적십자에 보냈다. 첫해 모금액은 약 1만 3천 파운드. 이 가게는 전쟁 뒤에도 문을 닫지 않았다. 1947년 12월 옥스퍼드 브로드 스트리트(Broad Street) 17번지에 세계 최초의 상설 자선가게가 열렸다. 오늘날 영국 전역 수천 곳의 자선 상점문화의 출발점이 바로 이 헌 옷 가게다.
1948년 유럽 사정이 나아지자 위원회 해산 논의가 나왔다. 잭슨콜은 단호히 반대했다.
세상 어디선가는 여전히 굶고 있습니다.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존속을 결의했고, 조직은 옥스팜 이라는 이름으로 캐나다·미국·벨기에로 뻗어나갔다. 오늘날 옥스팜은 21개 독립단체로 이뤄진 국제 연합체이며, 본부는 케냐 나이로비에 있다.
옥스퍼드 브로드 스트리트 17번지에 있는 최초 옥스팜 매장에 부착된 명판(위키피디아)
부동산 회사의 숨은 목적, 이윤은 수단이었다
잭슨콜의 진짜 독창성은 자선가게가 아니라 그 뒤에 있었다. 1946년 그는 앤드루스 앤드 파트너스(Andrews and Partners)라는 부동산 중개업체를 세웠다. 겉으로는 평범한 주택 중개 회사였으나 설립 목적은 처음부터 달랐다. 이윤을 내서 자선단체에 공급하는 것. 회사 주식 100%는 자선신탁이 보유했다. 오늘날까지도 기본 틀은 그대로다.
1953년에는 사활적 대의를 위한 도움 모임 을 만들었고, 이것이 나중에 자발적 기독교 봉사(Voluntary and Christian Service, VCS)로 발전했다. 이 틀 안에서 그는 새 단체들을 차례로 만들어 독립시켰다. 1961년 노인돕기회, 1968년 앵커 주거신탁, 1972년 인도와 케냐 아동 88명을 영국 후원자 88명이 짝지어 지원하는 방식으로 출범한 액션에이드. 모두 초기 운영비는 부동산 수익에서 나왔다.
그는 정부 보조금을 구걸하지 않았다. 국가권력에 재정을 의탁하면 독립성이 사라진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한 전기 작가는 그를 두고 박애주의자가 명확한 사명감으로 무장했다 고 평했다. 그는 발을 밟고, 깃털을 건드리고, 반발을 샀다. 그러나 그의 비전과 집요함은 결국 영국자선의 얼굴을 바꿨다.
세실 잭슨콜(왼쪽)과 캐논 T. R. 밀퍼드(가운데)가 1962년 옥스팜 하계 컨퍼런스에서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옥스팜 기록보관소)
시민사회에 묻는다, 우리의 앤드루스 부동산은 어디에?
2024년 12월 3일 밤, 헌법을 유린한 비상계엄이 선포됐다가 여섯 시간 만에 국회와 시민들의 힘으로 저지됐다. 그 밤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활동가들이 돌아가야 할 사무실의 현실은 어떤가. 한국의 시민단체 대부분은 회비와 소액후원으로 버티거나,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거나, 헌신으로 포장된 활동가 개인의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기댄다. 시민단체의 생명은 재정적 독립성 이라는 말은 교과서에나 있다.
잭슨콜의 방식은 이 문제에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그는 이윤을 내는 사업체를 만들고 그 소유권을 자선 신탁에 귀속시켰다. 후원자의 선의가 아니라 시장의 수익으로 운동을 지속시켰다. 또 하나, 그는 하나의 단체를 거대하게 키우는 데만 집착하지 않았다. 옥스팜이 궤도에 오르자 노인문제, 주거문제, 아동후원이라는 새 의제를 들고 또 다른 단체를 만들어 독립시켰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어떤가. 거대단체 중심의 자원 집중, 정치적 주목도에 따라 부침하는 존재감, 재정 불안정이라는 오래된 숙제에 쩔쩔 맨다.
2002년, 옥스팜은 브로드 스트리트 17번지 건물 외벽에 파란 명판을 달았다.
세실 잭슨콜이 이곳에 최초의 옥스팜 가게를 세웠다.
그것이 그에게 돌아온 공식 기념물의 전부였다. 이름은 작았으나 유산은 크다.
계엄의 밤을 넘긴 한국의 시민사회 앞에도 같은 질문이 놓여 있다. 광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그러나 그 열기를 제도와 재정, 지속 가능한 구조로 바꾸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시민사회의 법정에도, 안이함에 대한 공소시효는 없다.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