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인가 권리인가…삼성전자와 노동운동의 미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23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의 투명하게 바꾸고, 상한폐지 실현하자-4/23 투쟁 결의대회 에서 노조 깃발이 입장하고 있다. 2026.4.23 연합뉴스
반도체 산업이 전례 없는 이른바 ‘슈퍼사이클(초호황)’의 정점을 향하고 있다. 인공지능(AI) 혁명과 데이터 센터의 폭증 속에서 삼성전자가 올해 거둬들일 것으로 전망되는 영업이익은 무려 300조 원에 달한다. 이러한 놀라운 천문학적인 이익 앞에서 삼성전자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아래로 거대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땀과 헌신이 만들어낸 결실에 대해 보상, 즉 성과급을 요구하며 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파업을 준비하고 있다. 파업이 다가오면서,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친기업 보수 언론들의 움직임 또한 바빠졌다. 이들은 노동조합을 비난하고 매도하는 보도를 매일같이 쏟아부으며, 어떻게든 이 파업을 주저앉히기 위한 공격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보수 언론이 삼성전자 노조를 공격하는 가장 일차적이고 강력한 무기는 ‘탐욕’ 프레임이다. 노조원들이 1인당 6억이 넘는 성과급을 받으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다 는 것이 이들의 주요 공격 논리다. 이들이 노동조합을 비난하는 논리는 그 밖에도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대부분 억지스럽다. 우리나라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도체 노조가 있다 는 비난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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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장은 노동조합을 민주 사회의 필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존재하지 말아야 할 사회악처럼 여기는 편협한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학벌주의를 자극하는 방식이다. 전문대나 고졸의 생산직까지 명문대 나온 박사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게 되는 게 공정한가 라고 묻는 기사들은 아주 노골적이다.
이러한 기사들 속에서는 사람을 학벌에 따라 등급 매기고 차별하는 뿌리 깊은 학벌 의식이 투명하게 투영되어 있다. 나아가 삼성전자의 노조 위원장이 파업을 앞두고 동남아에 휴가를 갔다 고 비난하는 기사를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파업이 무슨 경건한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해야 할 신성한 종교 의식이라도 되는 것일까?
이런 기사를 보면 삼성전자의 노조 위원장이 거의 유력 정치인 수준으로 24시간 밀착 감시와 취재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언론의 이러한 과도한 관심은 삼성전자 노조 내부의 작은 갈등이나 이탈을 확대하는 과장 보도로 이어진다. 그런 작은 조짐만 있으면 보수 언론들은 마치 노조가 엄청난 갈등 속에 흔들리고 무너질 것처럼 희망 섞인 보도를 일삼는다.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 인사들이 삼성전자 노조와 파업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그 발언을 정성스럽게 인용하며 대서특필하는 장면도 매우 낯설고 웃프다. 평소에는 매우 부정적인 태도로 매도하거나 무시하던 정치인들의 입을 빌려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이들의 기회주의적 태도는 언론의 사명이 어디에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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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운동이 약자와 연대하는 게 아니라 억대 연봉자들의 이익만 추구한다 라면서 이것을 한국 노동운동의 종말 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한국 자본주의는 진작에 ‘종말’을 고했어야 마땅하다. 현재 대한민국은 최상위 1%가 전체 자산의 30%를 독점하고 나머지 99%가 70%를 나누어 가지는 극심한 불평등 구조이기 때문이다.
삼성 이재용 회장의 재산은 반도체 초호황과 주가 폭등 속에서 지난 1년만에 수십 조 원이 늘어났다. 이재용 1명의 재산이면 삼성전자 12만 노동자의 성과급을 모두 지급 가능할 정도이다. 삼성전자의 고위 임원들은 이미 연간 30~60억 원에 달하는 초과이익성과급을 챙기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들에게는 ‘가진 자가 더 가지려 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이들 언론은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할 때나, 고위 판검사들이 퇴직 후 전관예우로 수십억 원을 쓸어 담을 때도 절대 ‘공정성과 박탈감’을 논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은 보통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에 기반한 체제 라면서 이런 극심한 격차를 정당화해 왔다.
동시에 부의 분배와 평등 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을 색깔론으로 공격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이기심이 평등의 가치에서 어긋난다 고 비난하는 셈이다. 결국 이들이 지금 삼성전자 노조를 공격하는 진짜 이유는 ‘가진 자가 더 가지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와 공고한 기득권의 성벽을 지키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가장 기만적인 것은 삼성전자 노조에게 ‘약자를 외면한다’고 꾸짖던 조선일보가, 반도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우리도 정당한 몫을 달라’고 요구하자 태도를 돌변하던 순간이다. 그들은 이를 두고 반도체 뜯어먹기 혈안 이라며 마치 노동자들을 ‘삥 뜯으려는 양아치’처럼 몰아세웠다. 많이 받는 자도, 적게 받는 자도 삼성의 이익에 손을 대는 순간 언론의 적이 된다.
결국 친기업 족벌언론들이 하고 싶은 말은 명확하다. ‘우리의 최대 광고주인 삼성의 돈주머니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친기업 족벌언론들의 이러한 사나운 공격은 역설적으로 이번 삼성전자 파업이 갖는 무게감을 증명한다. 현재 반도체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산업이지만, 놀랍게도 전 세계 주요 반도체 및 빅테크 기업 중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드물다.
거대 기술 자본의 일방적 지배력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이다. 만약 한국의 삼성전자에서 노동조합의 조직화와 파업이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 기술 노동자들에게 거대한 파급력과 투쟁의 물결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 삼성전자도 과거 수십 년 동안 악명 높은 ‘무노조 경영’ 방침을 고수해 왔다.
23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앞에서 열린 삼성전자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의 투명하게 바꾸고, 상한폐지 실현하자-4/23 투쟁 결의대회 에서 조합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6.4.23 [공동취재] 연합뉴스
그 두꺼운 벽을 뚫고 약 6년 전 처음으로 노동조합이 깃발을 올렸고, 2년 전인 2024년에는 역사적인 삼성전자 55년 만의 첫 파업 이 있었다. 당시 파업은 두 달 만에 큰 가시적인 성과가 없이 종료되었고, 조선일보 등은 ‘노조가 빈손으로 패배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보도했다. 실제로 그 후 노조는 내부 갈등과 약화로 여러 조직들이 갈라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2년의 세월 동안 노조는 다시 숨을 고르고 조직을 정비했다. 현재 삼성전자 내 여러 노조를 합친 조합원 수는 9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전체 직원의 대다수를 포괄하는 가공할 만한 규모다. 반도체 산업의 악명 높은 직업병과 산업재해에 노출되면서, 불황기에는 임금 동결도 감내해 왔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당당히 외치고 있다.
이 엄청난 호황을 가능하게 만든 주역인 우리에게 정당한 몫을 달라 는 목소리다.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보상하는 것이 바로 미래를 위한 투자 라는 노동조합의 논리는 그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 노동조합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깊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
노동운동은 과거 독재 정부의 탄압에 맞서 사회적 약자들과 손잡고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위해 싸웠을 때 가장 강력한 사회적 지지를 얻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는 데만 매몰되었을 때, 그들은 ‘귀족 노조’라는 프레임에 갇혀 공격받고 사회적 신뢰를 잃고 고립되었다.
자본과 언론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이 오히려 노동운동에 그 책임을 떠넘기며 이간질할 기회를 엿본다. 이러한 고립은 노동조합의 분열과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따라서 삼성전자 노조는 자신들의 몫을 챙기는 것을 넘어, 하청 및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성과 배분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야 한다.
노조라는 울타리 밖에 있는 더 열악한 노동자들과의 연대야말로 족벌언론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가장 강력한 방패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책무를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개별 노조에게만 떠넘길 수는 없다. 국가적 차원의 인프라와 지원 속에서 성장한 대기업이 특별한 상황 속에서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을 때, 이를 사회적으로 환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횡재세 도입이나 ‘초과이익공유제’, ‘협력이익배분제’와 같은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수익의 상당 부분이 국가로 환수되어 다시 재분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기업별 교섭의 한계를 극복하고 산별 교섭이나 사회적 교섭을 통해 재벌 기업의 초과 수익을 산업 생태계 전체의 노동자들과 나누는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
진보 진영과 노동운동은 이러한 대안을 위한 사회적 운동을 조직하고,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 노조들이 그 투쟁의 최전선에 서도록 이끌고 독려해야 한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노동자의 힘은 같은 입장을 가진 노동자들과 연대에서 나온다. ··· 나만 살자는 게 아니라 노동자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연대 의식이 필요하다.
경남 진주 화물연대 조합원 사상 사고 이틀째인 21일 서울 강남구 BGF리테일 본사 앞에서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 등이 CU 규탄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6.4.21. 연합뉴스
이재명 시대 에 노동운동이 직면한 과제는 이러한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화물연대의 투쟁과 승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대 유통 자본인 CU의 교섭 거부와 경찰의 무리한 대체 운송 지원 과정에서 발생한 서광석 활동가의 죽음은 너무나 가슴 아픈 비극이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시작된 ‘서광석 열사 투쟁’은 불과 열흘 만에 화물연대의 주요 요구안을 관철하며 사실상의 ‘완승’으로 마감되었다. 이 승리를 2023년 건설노조의 ‘양회동 열사 투쟁’과 비교해 보면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때도 지금도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 두 죽음 모두 자본과 정권에 책임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처절한 투쟁과 분노의 연대가 있었다. 다만 2023년에는 정권의 탄압이 매우 폭력적이고 직접적이었다. 당시 정권은 국가기구를 동원해 언론과 손잡고 대대적 건폭몰이 를 했다. 그것이 양회동의 죽음을 낳았다. 그후에 정권은 멈추긴커녕 오히려 더욱 강경한 탄압에 나섰다. 매일같이 체포와 구속이 이어졌고 건설노조 조합원은 거의 30% 이상 줄어들었다.
이것은 노동운동 전체에 타격을 가했다. 패배감 속에 민주노총 조합원과 노동조합 조직률은 계속 줄어들었다. 이번에도 관성적으로 자본의 편에 선 경찰의 대응이 노동자의 죽음을 낳았다. 하지만, 그후 정권은 당혹해하며 CU자본에 양보를 압박했다. 결국 화물연대는 대부분의 요구를 쟁취했고, 이제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노동조합으로 뭉칠 것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았을까? 2023년 건설노조의 투쟁과 연대가 2026년 화물연대의 투쟁보다 부족했을까? 그보다는 그 사이에 ‘윤석열 탄핵 투쟁과 정권 교체’라는 거대한 정치적 승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세력 관계의 변화가 현장의 공기 자체를 바꾼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투쟁의 승리가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한 경제투쟁의 승리로 이어지는 상승작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노동운동에 다시 한번 ‘기회의 창’이 열린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노동절 기념식에서 합창단 봄날의 노동가요 메들리 공연을 관람하며 박수치고 있다. 청와대가 노동절 기념식을 개최한 것은 사상 처음이며, 양대 노총이 노동절 행사를 함께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왼쪽부터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 이재명 대통령,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송치영 소상공인연합회장. 2026.5.1. 연합뉴스
물론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무조건 칼을 휘두르던 반노동자 정권 시절에는 오로지 강력한 투쟁만이 답이었지만, ‘노동 존중’과 ‘대화와 타협’을 표방하는 개혁 정권 하에서는 훨씬 더 정교한 전략과 전술이 요구된다. 이 속에서 노동운동은 자신들의 투쟁이 사회 전체의 진보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노동조합 울타리 밖의 노동자들과의 연대, 사회적 재분배의 제도화, 반전 평화 등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과의 연결, 그리고 변화된 정치적 지형을 활용한 지혜로운 투쟁과 협상의 전략이 필요하다. 족벌언론이 저주의 주문으로 써 내려가는 ‘노동운동 종말’의 서사는 노동운동의 더 폭넓고 단단한 연대와 획기적 전진의 서사로 다시 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