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해적 시대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릉이는 좋은 정책이다. 보편 복지로서도 훌륭하고, 친환경 적인 방향성도 찬성한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쉽게 자전거에 접근하게 되었고, 친숙함에 힘입어 더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동력으로 이동하는 세태도 맘에 든다. 에너지도 아끼지만, 인구의 40%가 당뇨 전단계에 놓여 있다는 국민 건강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전기 자전거 같은 것은 친환경에도,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안 되겠지만. 그건 뭐 차차 생각해도 될 문제니까.
지금에야 쌀과 탄수화물이 마치 공공의 적인 것처럼, 인식되고 비난받지만 역사를 통틀어 보면 그렇지도 않다. 전래 동화에는 다 죽어 가던 사람이 죽 한 그릇에 살아났다는 말이 담겨 있기도 한데, 당연한 말이다. 탄수화물과, 지방, 단백질을 섭취해 자신을 이루는 우리 인간은 그중 탄수화물을 가장 쉽게 에너지로 바꾸어 활용한다. 그러니 먹는 것이 가장 큰 투쟁이었던 시대의 탄수화물이란 고귀한 생명줄이었다. 단순히 잘게 빻아 삶은 것만으로도 목숨을 구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과잉 영양의 시대에 온갖 내분비 장애와 동맥경화를 달고 사는 현대인에게나 독이지, 탄수화물의 근본은 생명력이 맞다.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 이용 건수가 2억건 돌파를 눈앞에 둔 가운데 24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 인근 따릉이 대여소에서 시민들이 따릉이를 이용하고 있다. 이날 서울시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따릉이 누적 이용 건수는 약 1억9천만건으로 집계됐다. 2024.6.24 연합뉴스
서울의 따릉이 정책이 난 딱 그런 꼴이라고 생각한다. 분단과 전쟁, 폐허에서 고도성장을 하느라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도로 규범은 빠른 것, 강한 것, 자동차 산업에 유리한 것 위주로 판이 짜여 있다. 묘하게 보행자를 차 없는 사람(혹은 거지!?)으로 인식하는 시선도 있는 듯하고. 여하 간에 횡단보도의 초록불은 맘대로 넘나들지만, 빨간불에 건너는 인간에겐 미친 듯이 클락션 울려대는 운전자의 평균에 대해 논하는 자리는 아니니까. 생각 없이 운전하다 초록불에 횡단보도를 꽉 막은 차들을 발로 차버리고 싶은 기분은 넣어 두고 이야기해보자. 서울이 자전거를 탈 만한 도시인가.
자전거는 분류상 차다. 인도를 달려선 안 된다. 나는 이것을 고향 선배의 모습과 함께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대학 새내기 시절, 두 학년의 차이는 거대해 보였고 H 선배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185가 넘는 키. 훈훈한 외모, 과묵한 언행. 말이 적어 한 마디 한 마디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처음이었는데, 자전거 동호회의 첫 주행 날 우리의 안전을 빌어주면서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바로 전날 몰상식한 자동차에 치어 왼팔에 기브스를 한 채로 나타난 형은 말했다. 그래도 자전거는 분류상 차이기 때문에 인도로 주행하면 안 돼. 그러니 더 조심하자. 자신이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 때문에 다치고도, 지켜야 할 것을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 닮고 싶은 선배의 어른스러움이었다. 지켜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막연히도 알지 못하고서.
자전거 도로교통법에 따라 자전거는 차 로 분류되며, 자전거 도로가 있는 경우 해당 도로로 통행해야 하고, 없는 경우 도로의 우측 가장자리로 주행해야 합니다. 인도 주행은 원칙적으로 금지되며(어린이, 노인 등 예외 있음), 음주운전, 야간 불빛 미사용 등은 처벌 대상입니다.
십여 년이 지났지만 법은 아직도 그대로 건만... 물론 인도를 달리고 싶어지는 마음을 이해한다. 전국 일주를 하여 국토 한 바퀴를 돌아보기도 했지만, 서울이 지방 국도나 고속 국도보다 위험하다. 자전거 도로는 자주 끊겨 있고, 차도에서의 통행도 여의치 않다. 조금만 느려져도 빵빵대고 위협 운전을 해대는 서울 놈들 사이에서, 안전한 주행이란 불가능하다. 한강에서 라이딩을 하지 않는 이상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생사를 오가는 일이 되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인도로 올라오는 것까지는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안전히 조심스레 달리고 싶은 마음까지 외면할 정도로 내가 서울 사람은 아니니까.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아는 것이 인간의 본성. 인도 위를 어지럽히는 자전거들의 행태는 이제 목불인견. 소수만 자전거를 탈 땐 그나마 나았다. 나름의 도리와 도의를 아는 이들이 더 많았고. 험하게 운전하는 중고등학생을 만날 때면 부드럽게 타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공공복지가 되어 너도 나도 자전거를 타게 된 지금은 어떤가? 권리만 챙기고 의무는 지지 않는 공유지가 쓰레기 산이 되듯. 그 어떤 도로 규범에 대한 강제도, 원칙도 없는 보급은 대 해적시대를 만들었다.
인도에서 최고 속도로 질주하는 것은 기본. 좁아지는 길목에서 사람들을 향해 맘대로 빵빵거리고(어이 여긴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란 말이다.) 심지어는 욕까지 하며 지나가는 것도 보았다. 여기에 전동 킥보드와 전기 자전거가 합세하여 인도를 횡행하니 이 어찌 보행자의 지옥이라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예 도로 규정의 기초가 무엇인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오래된 약속 하나를 마음에 품은 채로. 이기심으로 인한 자기 편의적 행위들로 인한 안전의 위협을 느끼는 나날들. 인간으로서의 어떤 존엄을 내려놓고 싶어지는 마음이 차오른다.
그건 이기적인 이들이 주장하듯, 아무도 안 다쳤으니 아무 상관 없는 사건이 아니다. 누군가를 언젠가 다치게 하고 말 확률적 폭력의 실천이다.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던지고 던지면 결국 일어나는 일처럼.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드리면 결국 비를 부르고 마는 인디언 기우제처럼. 그들은 무감각과 상대에 대한 배려 없음을 반복 수행 함으로써 크고 작은 사고의 씨앗을 키우고 있다.
22일 `차 없는 날 을 맞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역삼역∼삼성역)가 버스를 제외한 차량 운행이 통제됐다. 점심시간에 시민들이 도로를 걷고 있다. 2009.9.22 연합뉴스
여기까지 써 놓고, 며칠 묵히는 사이에 결국 송도에서 사달이 나고 말았다. 자기 멋대로 자기 편한 대로, 마음껏 방종하는 것으로 인해 선량한 사람들이 상하는 일이 나를 화나게 한다. 그간에 조금 위험하게 구는 것일 뿐인데 이렇게 화낼만한 일인가, 라고 했던 스스로의 안일함이 후회된다. 너무 속상하다. 괜한 오지랖일까 고민하던 사이에 일어나는 이런 부조리에 결국 나도 방관자로서 가해자 측에 이름이 올라간 기분. 이래도 화를 더 참아야만 하는가? 마음대로 인도를 질주하며 위협하는 행위는 남에게 가하는 확률적 폭력임이 분명 한대도!?
난 전기 자전거의 시대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아직도 걸맞지 않은 매너를 가진 인간이 편의에 빠지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 편의가 권리인 줄 알고 마구 다른 이의 권리를 침해하며 달리는 행동들이 더욱 도시를 삭막하게 만들고 있음에 분노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를 마구 무시하는 서울 안에서, 이런 행보는 도로의 위험이자 인간성의 배제로 기능하는 중이라고. 실제로 고통을 낳고 있는 중이라고 이렇게 호소한다. 우리 작더라도 자신의 작은 악행을 좌시하지 말아보자. 자기 행동이 남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자. 이대로 걷는 일상마저 비명과 횡사가 난무하는 곳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