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동농, 항일 투쟁 선봉에 섰던 유일한 대한제국 대신

동농, 항일 투쟁 선봉에 섰던 유일한 대한제국 대신
[뉴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1919년 10월 24일 이른 아침, 대한제국 농상공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낸 김가진은 가까운 친척집이라도 방문하려는 듯 평상복 차림으로 짐도 들지 않은 채 아들 의한의 부축을 받으며 서울 체부동 집을 나섰다. 당시 나이가 만 73세를 넘겼으니 요즘으로 치면 구순에 가까운 상노인이 먼 길을 떠나는 것으로 보일 리 만무했다. 집 앞을 지키고 있던 순사도 무심하게 보고 넘겼다. 구국 일념으로 망명길 떠난 74세 노정치인 김가진은 일제 경찰의 감시망을 따돌리느라 엉뚱한 곳을 몇 군데 들르면서 금으로 만든 의치(義齒)를 빼서 얼굴을 바꾸고 낡은 옷에 찌그러진 삿갓으로 변장했다. 일산역에 도착해 이재호에게 탑승권을 건네받은 뒤 신의주행 열차 3등칸에 몸을 실었다. 신의주에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면 중국 안동(安東·단동의 옛 이름)이다. 열차 안에서 참담한 심경과 굳은 각오를 한시로 풀어냈다. 國破君亡社稷傾(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망하고 사직은 기울었어도) 包羞忍死至今生(부끄러움 안고 죽음 참으며 여태껏 살아 있구나) 老身尙有沖霄志(늙은 몸 아직도 하늘을 꿰뚫는 뜻을 품고 있나니) 一擧雄飛萬里行(단숨에 솟아올라 만 리 길을 날아간다) 民國存亡敢顧身(민국의 존망이 달려 있으니 어찌 내 몸을 돌보리) 天羅地網脫如神(물샐틈없는 감시망을 귀신같이 빠져나왔도다) 誰知三等車中客(누가 삼등 찻간의 승객을 알아보랴) 破笠簏衣舊大臣(찢긴 갓 누더기의 옛 대신인 줄을) 며느리 정정화는 회고록 ‘『장강일기(長江日記)』에 이 시를 실으며 일흔넷의 노구를 이끌고 고국을 등진 채 해외 망명길에 오른 노정치가의 희망과 의지가 뚜렷이 담긴 시구다. 성엄(誠广·김의한)이 세세히 기록해 놓은 가족 일지에 시아버님이 의주행 열차 안에서 남기신 이 한시가 적혀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술회했다. 시에 나타난 김가진의 의중을 보면 그는 나라가 망하고 왕조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국권을 회복하면 제국이나 왕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 되는 민국을 세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충성을 바치고 의리를 지켜야 할 대상은 고종에서 끝난 것이다. 고종의 죽음과 3·1운동을 계기로 김가진은 수동적인 반일주의자에서 적극적인 항일 투사로 변신했다. 병실 기자회견 통해 일제의 새빨간 거짓말 폭로 안동에 도착한 김가진 부자는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종욱과 함께 이륭양행의 계림호를 타고 상해로 향했다. 이륭양행은 아일랜드 출신 사업가 조지 루이스 쇼가 운영하는 무역회사로 임시정부 교통국 산하 비밀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도움 덕분에 10월 29일 상해에 무사히 도착하긴 했으나 육로와 해로를 합쳐 1500㎞가 넘는 여행길의 노독으로 몸져누워야 했다.   1920년 망명 직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찍은 사진. 노년의 김가진 모습이다. (동농문화재단) 김가진은 병원에서 각국 기자들을 불러 회견을 자청했다. 그의 망명 사실이 각국 언론에 보도되자 일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한일합방’이 대한제국 황실의 요청과 귀족들의 협조 속에 순조롭게 이뤄졌다고 국제사회에 선전해왔는데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난 것이다. 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된 것도 일제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독립운동은 불평불만 많은 일부에 국한된 것이고, 임시정부도 불량배 집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정화는 일제는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다가 큰 타격을 입었다”고 『장강일기』에 기록했다. 을사늑약이나 경술국치를 맞아 여러 선비가 반대 상소를 올리고 의병으로 나서기도 하고 자결까지 감행했으나 대한제국 고관대작을 지낸 인물이 해외로 망명해 항일 투쟁에 뛰어든 사례는 김가진이 유일했다. 만약 의친왕 이강의 망명까지 성공했다면 일제 식민통치 체제가 뿌리째 흔들릴 뻔했다. 이미 독립운동 진영은 왕정복고 대신 공화국 수립으로 건국의 청사진을 그려놓긴 했지만 황족이 독립운동에 앞장선다면 상징적 의미가 클 뿐 아니라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고종 아들이자 순종 이복동생인 의친왕은 미국에 유학한 경험이 있어 국제 정세를 보는 식견도 갖추고 있었다. 비록 무산되긴 했지만 의친왕의 망명 기도도 김가진이 총재를 맡은 대동단이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김가진 망명 이후 감시와 경비가 삼엄해진 탓에 의친왕 일행은 압록강 건너 안동까지 갔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의친왕은 서울로 압송돼 남산 녹천정에 유폐됐다. 탈출을 도왔던 정남용과 이을규 등은 물론 전협 단장을 비롯한 대동단 주요 간부들까지 검거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최초 재외공관 상주 외교관 지낸 조선조 귀족 가문 출신 김가진은 1846년 2월 24일(음력 1월 29일)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신교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동농(東農), 본관은 안동으로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의 11대손이었다. 아버지 김응균은 철종 때 공조·형조판서를 역임하고 고종 때 우참찬을 거쳐 예조판서를 지낸 권신이었다. 개화파 거두 김옥균이 김가진보다 5살 아래인 아저씨뻘이었다. 김가진은 어릴 적부터 언어에 특출난 소질을 보였고 한문과 서예 솜씨도 빼어났다. 서자여서 과거를 보지 못하고 규장각 검서관으로 벼슬을 시작했다가 1882년 임오군란으로 제물포에서 회담이 열리자 주사로 발령받아 제물포 개항과 영국·독일 등과의 통상조약 실무를 맡았다.   조선 견문기를 쓴 영국인 새비지 랜도어가 1890년경 그린 김가진 초상화. 도포를 입고 머리에 정자관을 썼다. (동농문화재단) 갑신정변 이후 적서 차별이 철폐되자 1886년 과거에 급제해 홍문관 수찬에 임명됐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밀약을 추진하다가 청나라 감국대신 원세개의 압력을 받아 남원으로 유배됐다. 러시아의 구명 운동 덕분에 풀려난 뒤 청나라 천진에 파견됐다가 1887년 주일공사관 참찬관으로 떠났다. 초대 공사 민영준이 두 달 만에 귀국하자 공사대리를 거쳐 2대 공사를 맡았다.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재외공관 상주 외교관이었다. 그는 일본 재임 기간에 유력 정치인들과 교분을 맺고 열강 외교관들에게 조선이 독립국임을 알렸다. 서양 산업기계와 과학기술 서적을 수집해 조선으로 보내는가 하면 조선인 유학생 뒷바라지에도 힘썼다. 울릉도에 무단 상륙해 나무를 베어가던 일본 목재업자들의 징계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고위직 역임하며 독립문 현판 등 숱한 명필 남겨 1890년 귀국해 동부승지 겸 내무참의·여주목사를 거쳐 안동부사를 지내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해 ‘친고종 개화파’의 중추 역할을 했다. 갑오개혁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이뤄진 것이긴 하나 신분제 폐지와 근대적 행정 체제 도입 등 나라의 틀을 뒤바꾼 일대 혁명이었다. 그는 이조참판, 병조참판, 공조판서, 농상공부대신 등을 잇따라 맡아 개혁 작업을 주도하면서도 외교통상 업무도 놓지 않았다. 일어·중국어·영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김가진만큼 서양 열강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김가진은 1896년 서재필과 함께 건양협회를 창설했다가 7월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 1897년 서대문독립공원 앞에 세운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그의 작품이다. 앞뒤로 각각 한글과 한자로 새긴 ‘독립문(獨立門)’은 한동안 친일파 거두 이완용이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연구자들은 독립신문 기사, 며느리 정정화의 기록, 서체의 특징 등을 들어 김가진이 쓴 것으로 결론 내렸다.   독립문 한글과 한자 글씨. 끝이 동글동글하면서도 단단한 김가진 필체가 완연하다. 글자 양옆으로 태극기 문양이 보인다. (경기도박물관) 김가진은 뛰어난 서예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창덕궁의 부용정(芙蓉亭)과 관람정(觀纜亭) 현판, 안동 봉정사의 편액과 주련, 창의문 인근의 백운동천(白雲洞天) 각석 등이 대표작이다. 2024년 7~9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가 남긴 한시도 수십 편에 이른다. 김가진은 독립협회와 황해도 관찰사 시절 이승만과 인연을 맺어 나중에 그의 미국 유학을 도왔다. 교육뿐만 아니라 산업 진흥에도 관심이 많아 석유 직수입회사 설립을 추진하는가 하면 양잠회사를 차려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고종이 황제를 선언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단행한 광무개혁에도 궁내부 특진관이자 중추원 의장이던 김가진의 의중이 많이 반영됐다. 광무개혁은 비록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긴 했지만 대외적으로 독립국임을 분명하게 선언해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 이는 2차대전 막바지 미국·영국·중국 정상이 카이로 선언을 발표할 때 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근거가 됐다. 일제로부터 작위 받은 후 고종의 대일 창구 맡아 김가진은 자신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상소를 세 번이나 올렸다. 그러나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났다. 재임 기간 공주에 구산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교장을 맡는가 하면 대한자강회에도 참여했다. 1907년 관찰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규장각 제학을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한 뒤 기호흥학회를 창설하고 기호학교를 설립했다. 1908년에는 대한협회 회장을 맡아 교육과 계몽 운동에 힘썼다. 김가진은 한일 강제병합 때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은사금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1914년에는 105인 사건에 관해 연루됐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나라가 망하기 전, 창덕궁 후원(비원) 중수 공로로 고종에게 하사 받은 청운동 백운장도 1916년 동양척식회사에 넘어가 체부동 셋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정정화는 그 시절 시아버지가 대례복을 팔아 생활비에 보탤 만큼 궁핍하게 살았다고 기록했다. 김가진이 경술국치 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을 두고 연구자들은 고종의 생명과 안위를 마지막까지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합병 이후에도 그는 고종의 대일 창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승하함으로써 상황이 달라졌다. 고종 인산(因山)에 맞춰 3·1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자 많은 애국지사가 중국이나 러시아로 망명하거나 지하운동에 뛰어들었다. 고종 승하, 3·1운동 후 본격적 비밀 항일투쟁 나서 일진회 회원이던 전협은 그해 3월 서울 봉익동 자신의 집에서 최익환 등과 함께 비밀 항일조직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고 4월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했다. 5월 발표한 3대 강령은 ‘독립·평화·자유’였다가 9월에는 ‘독립·평화·사회주의’로 바꿨다. 전국에 지부를 두고 4월부터 대동신보를 발간했으며 2차 만세 시위도 계획했다.   지난 2월 27일부터 6월 30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특별전 ‘조선민족대동단 : 혈전을 불사코자’. 입구에 대동단원 72명의 사진이 붙어 있다. (강북구) 김가진은 조직원들이 잇따라 체포되고 일제의 감시망이 조여오자 대동단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로 하고 망명을 결심했다. 임시정부의 안창호·신규식과 긴밀히 연락하며 탈출 계획을 짠 뒤 마침내 성공했다. 그러나 의친왕 망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나마 남은 대동단 국내 조직은 와해되고 말았다. 김가진은 임시정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때까지 임정에는 고문으로 선임된 사례가 없었을뿐더러 독립 노선도 각기 다양했으나 모두 합심해 김가진에게 최고 예우를 갖췄다. 김가진은 아들 의한과 함께 프랑스 조계지의 지나우편지부 2층에 살면서 대동단 만주지부를 결성하고 제2의 독립선언문을 작성해 11월 28일 발표했다.   김가진이 1919년 11월 발표한 대동단 선언서. 제2의 독립선언문으로 불린다. (경기도박물관) 며느리와 대동단 요원을 국내에 보내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강연, 기고 등으로 독립 정신 고취에 나섰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고문도 맡았다. 그러나 고령에다가 과로와 영양 부족 등이 겹쳐 상해로 망명한 지 3년도 되지 않아 1922년 7월 4일 눈을 감았다. 이동녕·조소앙·이필규 등 임정 요인들과 아들 의한이 임종을 지켰다.   1922년 7월 8일 중국 상해에서 열린 김가진의 장례 행렬. 상해 한인의 절반 이상이 나와 눈물을 흘리며 뒤따랐다고 한다. (동농문화재단) 동포가 통곡 애도함은 실로 형언하기 어려워” 임정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7월 8일자 1면에 부고를 싣고 3면 머리기사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동농 선생 김가진 씨는 우리 구한(舊韓) 시대의 대관(大官)으로 내정 개혁과 외교에 힘씀이 컸고, 3·1 독립운동 때는 다수 지사와 연락해 도왔으며,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광복 사업에 남은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해에 도착하니 우리 동포가 성심으로 환영했던 바이라. 씨가 조국 독립을 꿈꾸며 망명했다가 온갖 곤란을 겪고 중도에 돌아가시매 우리 동포가 통곡 애도함은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바로다.” 김가진 빈소에는 임정 요인과 대동단 단원 등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7월 8일 열린 장례식은 임정이 주관한 국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홍진이 개식사에 나서고 조완구가 고인의 발자취를 소개한 데 이어 이발과 안창호가 추도사를 바쳤다. 그의 별세 소식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국내에도 알려졌고 유림연합대회가 주관해 별도로 장례식을 치렀다.   김가진 서거 소식을 보도한 1922년 7월 7일 자 동아일보 3면(위)과 김가진의 국내 유족 근황을 소개한 7월 8일 자 동아일보 3면(아래).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유해는 상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혔다. 그러나 문화혁명 때 묘소가 파괴됐으며 지금은 송경령(宋慶齡·손문의 부인)능원 외국인 묘원으로 바뀌었다.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각각 건국훈장 독립장과 애족장을 받았다. 김가진 넷째아들 김용한에게서 난 손자 김석동도 광복군에 투신해 애국장을 받았다. 김의한과 정정화 사이에서 태어나 임정 요인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손자 김자동은 ‘영원한 임시정부의 소년’으로 불린다. 조선일보와 민족일보 기자로 활동했고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도 지냈다.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김자동의 딸(동농 증손녀) 김선현은 2023년 11월 동농문화재단을 창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다.   1935년 중국 남경에서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가 손자 김자동과 함께 찍은 사진. (동농문화재단) 이희용 줌렌즈 hoprave@gmail.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