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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옥스팜을 세계적 구호단체로 키운 H. 레슬리 커클리

옥스팜을 세계적 구호단체로 키운 H. 레슬리 커클리
[사람들]
영국에 살다 보면 이런 모습을 자주 본다. 동네 상가 한편에 낡은 간판 하나가 걸려 있다. 옥스팜(Oxfam) 쇼윈도에는 누군가 입었던 스웨터, 반쯤 바랜 소설책, 이름 모를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관광객들은 무심히 지나치고, 단골 주민들은 그 안을 들락거리며 2파운드짜리 명품을 찾아낸다. 세계 최초의 자선 중고품 가게. 그 뒤에 한 사람의 이름이 있다. 하워드 레슬리 커클리(Howard Leslie Kirkley, 1911~1989)   하워드 레슬리 커클리(www.quakersintheworld.org) 직장도 잃었지만 양심은 지켰다 1911년 맨체스터에서 태어난 커클리는 젊어서부터 사회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퀘이커 신앙공동체에서 영적 고향을 찾았다. 평화주의자로서 그는 1939년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등록했다. 문제는 그가 퀘이커 정식회원이 아니었다는 점. 영국법에 종교단체의 회원이 아니면 종교적 이유의 병역 면제를 신청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종교가 아닌 순수한 평화주의 신념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다. 결과는? 맨체스터 시청에서의 해고였다. 오늘날 한국으로 치면 소신 있다더니 결국 공무원 자리 날렸네 가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해고가 그의 인생을 바꾸는 출발점이 됐다.   25 캐펠 클로즈, 레슬리 커클리가 1976년부터 1989년까지 살았던 집.(Sir Leslie Kirkley: Oxfordshire Blue Plaques Board) 리즈의 기아 구호위원회, 그리고 운명적 부임 전시에 영국 리즈(Leeds)로 이사한 그는 퀘이커모임에 참석하면서 리즈 기아 구호위원회(Leeds Famine Relief Committee)를 창설하고 명예간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1951년 초, 운명의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옥스퍼드 기아 구호위원회(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의 사무총장 자리였다. 이 위원회는 원래 1942년 10월 5일에 창설됐다. 퀘이커교도, 사회활동가, 옥스퍼드 학자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였는데, 당시 나치 점령 치하 그리스에서 연합군의 해상봉쇄로 수많은 민간인이 굶어 죽는 상황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사업가 세실 잭슨콜(Cecil Jackson-Cole, 1901~1979)이 초창기 추진력을 제공했다. 하지만 1951년 커클리가 부임할 때까지 이 단체는 여전히 지역 자선단체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실 잭슨콜(Cecil Mr. Charity” Jackson-Cole (1901~1979) - Find a Grave Memorial) 직함은 사무총장, 역할은 글로벌화  설계자 커클리가 부임한 1951년, 이 단체는 그저 잘 굴러가는 지역 자선위원회 였다. 그로부터 23년 뒤 그가 떠날 때, 이 단체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창의적이며, 가장 널리 존경받는 자원봉사 구호단체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이름도 바뀌었다. 1961년부터는 공식적으로 옥스팜(Oxfam) 이라 불리게 됐다. 그의 리더십은 독특했다. 동료들은 그를 겉으로는 느긋하고, 속으로는 강단 있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퀘이커식 회의 방식을 선호해서, 표결로 밀어붙이기보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길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조용하지만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는 사람. 오늘날 한국 조직문화에 비유하자면, 회의록에 만장일치 라고 쓰기 전에 진짜로 만장일치를 만들어내는 희귀종이었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도 탁월했다. 사람에게 권한을 주되 창의적으로 일하게 하면서, 조용한 방식으로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갔다. 재능을 발굴하고 자유를 허용하되 중심을 잃지 않는 지도자. 그런 사람이 만들어가는 조직이 어떤 것인지는, 옥스팜의 역사가 증명한다.   옥스퍼드셔 푸른 명판 위원회, 레슬리 커클리 경1911–1989, 인도주의 활동가, 옥스팜 이사, 지역 자선 단체를 세계적인 구호 단체로 탈바꿈시킨 인물, 이곳에 거주, 1976~1989, 옥스퍼드 시민 협회(Sir Leslie Kirkley: Oxfordshire Blue Plaques Board) 재난현장으로 달려간 사무총장 그는 책상에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1953년 이오니아 제도(Ionian Islands)에 지진이 닥치자, 그는 직접 현장으로 날아갔다. 이것이 재난이 덮친 곳에 곧바로 달려가는 그의 첫 번째 여행이었고, 이후 여러 차례 반복됐다. 1956년에는 파키스탄, 인도, 베트남, 한국, 홍콩을 방문하는 동아시아 순방에 나섰다. 그런데 이 여행은 중간에 끊겼다. 헝가리에서 봉기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유럽으로 돌아가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피신해온 헝가리 난민들에게 물자를 전달하는 퀘이커 구호팀과 합류했다. 한국을 방문한 바로 그 해에 또 다른 비극이 유럽에서 터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3년 뒤였다. 커클리가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그 눈에 무엇이 보였을까. 폐허와 가난, 그리고 생존의 의지. 그는 그것을 보고 돌아가서 일했다.   1951년의 어느날., 심하게 파손된 남대문 근처에 탱크 한 대가 멈춰서 있다. 진 퍼트넘(위키피디아) 기아는 자연재해가 아니다, 구조적 원인을 파고들다 1959년 세계 난민의 해(World Refugee Year)가 선포됐을 때, 커클리는 홍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61년에는 콩고를 방문해 처참한 난민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같은 해 1961년부터 1965년까지는 세계 기아 극복 운동(Freedom from Hunger Campaign)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그는 방향을 하나 더 틀었다. 기존 옥스팜은 재난 구호에 집중했다. 커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아와 빈곤의 원인 을 파고드는 것이다. 구호에서 개발로, 증상치료에서 구조변화로. 당시 영국 자선단체 감독기관(Charity Commission)은 이 새로운 방향에 처음엔 저항했다. 자선단체가 구조적 원인을 따지는 건 너무 정치적 이라는 것이었다. 커클리는 조용히, 그러나 끝까지 밀고 나갔다.   1959년 세계 난민의 해 선포 당시 호주 정부에서 만든 조형물.(World Refugee Year 1959–60 | naa.gov.au) 중고품 가게에서 세계화까지 그가 재임하는 동안, 옥스팜은 여러 방향으로 몸집을 키웠다. 영국 전역에 옥스팜 중고품 가게(Oxfam shops) 망이 확장됐고, 옥스팜 무역(Oxfam Trading)이 만들어졌으며, 해외에 독립적인 옥스팜 그룹들이 생겨났다. 학교용 개발교육 프로그램도 도입됐다. 1960년대 후반에는 옥스팜을 단순한 영국단체가 아닌 세계조직으로 키울 구상을 진행해, 캐나다, 미국(1970년), 벨기에, 호주 등지에 옥스팜 조직들이 잇따라 만들어졌다. 1974년 은퇴할 때까지, 커클리는 작은 지역위원회를 세계적 인도주의 기구로 변모시켰다. 그 과정에 그가 지킨 원칙이 있다. 전문성을 높이되 영혼을 팔지 않는다. 규모가 커지면 관료화되고, 관료화되면 초심을 잃는 것이 단체의 숙명이다. 커클리는 그 함정을 피하려 했다.   1947년 12월 옥스퍼드 브로드 스트리트에 연 최초의 옥스팜 가게.(A history of Oxfam s Shops | Oxfam GB) 은퇴 후에도 30개 단체, 무덤까지 현역 1974년 옥스팜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노인빈곤 단체인 도움의 손길(Help the Aged)에서 일했고, 헬프에이지 인터내셔널(HelpAge International)의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재난비상위원회(Disasters Emergency Committee) 위원장, 자원봉사·기독교 서비스 재단(Voluntary and Christian Service Trust) 대표, 영국 난민위원회(British Refugee Council) 부위원장 등 굵직한 직함들이 줄을 이었다. 1989년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30개가 넘는 단체에서 위원, 이사, 후원자, 또는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죽을 때까지 현역 이라는 말이 있지만, 커클리의 경우는 문자그대로였다. 그것도 30곳에서 동시에. 2023년 6월 16일, 옥스포드의 그가 살았던 집(25 Capel Close) 외벽에 기념 동판이 붙었다. 그의 이름을 영구히 새겨두기 위해서.   노인빈곤 단체인 도움의 손길(Help the Aged, 위키피디아) 한국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커클리의 삶은 한국현실에 여러 거울을 들이댄다. 첫째, 양심적 거부는 경력을 끊지 않는다. 1939년 병역 거부로 직장을 잃은 청년이 20년도 안 돼 세계적 구호단체의 수장이 됐다. 한국에서 국가권력에 맞서 소신을 지킨 사람들이 경력을 망쳤다 는 낙인을 두려워하는 현실과 대조된다. 역사의 평가는 단기 인사기록표와 다르다. 둘째, 원인을 파고드는 구호가 진짜 구호다. 커클리가 단순 재난구호에서 빈곤의 구조적 원인 분석으로 옥스팜의 방향을 튼 것은 처음에 상당한 저항을 불렀다. 오늘날 한국의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증상 처방에만 머물며 구조적 문제는 손대지 않는 현실, 혹은 구조적 문제를 건드리는 순간 정치적 이라는 딱지가 붙는 현실을 생각할 때, 커클리의 선택은 여전히 날카롭다. 셋째, 리더십은 소리보다 깊이다. 퀘이커식 침묵 속의 결정 은 한국식 윗분 말씀 받들어 일사불란 과는 정반대다. 모두가 납득할 때까지 기다리는 문화, 권한을 위임하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지도력, 2024년 12월 3일 한밤중에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했던 윤석열의 우왕좌왕 리더십과 비교해보면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 실감할 수 있다. 넷째, 전문성과 영혼은 함께 갈 수 있다. 한국 시민사회에서 종종 너무 전문화되면 운동성을 잃는다 거나 현장성을 갖추면 비전문적 이라는 이분법이 통용된다. 커클리의 옥스팜은 두 가지를 동시에 키웠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의 생애가 증명한다. 맨체스터의 한 청년이 직장을 잃은 날부터, 그의 인생은 더 폭넓어지고 있었다. 양심을 지킬 때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는 이 고리타분한 진실을, 커클리는 78년의 삶으로 증명했다. 조용하고도 집요하게, 그리고 끝내 30개 단체를 동시에 이끌면서. 영국 사람들은 지금도 옥스팜 중고품 가게에서 2파운드짜리 스웨터를 산다. 그 가게 안에 커클리의 삶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든 모르든, 그의 유산은 오늘도 그 낡은 진열대 위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다.   영국 우리 동네의 옥스팜, 자원봉사자를 구하는 광고가 보인다. 나와 우리 자녀들도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김성수 시민기자)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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