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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파시즘 국가 주권, 국가 ·지도자에게… 국민은 도구로

파시즘 국가 주권, 국가 ·지도자에게… 국민은 도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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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국가적 위기(distress)’를 의미하는 뒤집힌 성조기가 정치적 항의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장면. 민주주의 질서가 위기에 처했다는 인식이 극단적 정치 담론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기라는 국가 상징이 시민적 자기성찰이 아니라 적대적 정치의 도구로 전유되는 현상은, 주권 개념의 변질을 암시한다. 지난 칼럼에서 저는 오늘날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 가지 장면을 통해, 트럼프와 MAGA 세력이 어떤 국가를 상정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미 국토안보부가 ‘1억 명 추방 이후의 평화로운 미국’을 공식 이미지로 제시한 사건, 캐나다와 그린란드의 영토를 미국 국기로 덮은 조작 이미지를 사실상 방치한 태도, 그리고 이민 단속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 미국 시민 사살 사건과 그에 대한 연방 권력의 옹호는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합니다. 이 국가에서 보호의 대상은 누구이며, 제거의 대상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장면들이 특히 충격적인 이유는, 그것이 비공식 극단주의자의 일탈이 아니라 연방정부와 대통령의 언어, 이미지, 정책 결정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단순히 정책이 급진화되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국가 권력이 국민을 대하는 방식, 국민을 정의하는 기준, 그리고 국민을 배제하는 논리가 구조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칼럼 1에서 제기한 미국은 여전히 민주주의 국가입니까”, 트럼프와 MAGA가 상정하는 국가의 주인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결국 하나의 근본 문제로 이어집니다. 바로 국가주권(國家主權)의 문제입니다. 트럼프와 MAGA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을 정당화할 때 반복해서 주권 이라는 말을 호출합니다. 대규모 추방은 국가의 자위권으로, 국제인권 규범은 외부 간섭으로, 연방 권력의 무장화는 질서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포장됩니다. It’s too fishy”라는 표현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제도와 규범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선언으로 작동합니다. 이 언어가 반복될수록 사실 확인과 절차는 무력해지고, 예외와 결단은 일상으로 굳어집니다. 이 글은 이 현상을 감정적으로 규탄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질문은 더 근본적입니다. 주권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오늘 트럼프와 MAGA가 말하는 주권은, 민주주의가 성취해 온 주권 개념과 같은 것입니까. 이를 분명히 하려면 주권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변형되어 왔는지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 주권이란 무엇인가 ― 누가, 어떤 근거로, 최종 결정을 내리는가 주권(sovereignty)이란 어떤 정치공동체 안에서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최고 권한을 의미합니다. 정치이론에서 주권은 언제나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되어 왔습니다. 누가, 어떤 근거로, 예외 없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질 때마다, 정치체제의 성격 역시 달라졌습니다. 주권에는 세 가지 핵심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최종성입니다. 주권은 다른 어떤 권위에도 상소되지 않는 마지막 결정권을 의미합니다. 둘째, 배타성입니다. 동일한 공간과 공동체 안에서 주권은 중복될 수 없으며, 하나의 최종 권위만이 존재합니다. 셋째, 강제력입니다. 주권은 도덕적 권고가 아니라 법과 행정, 물리적 강제력을 동반합니다. 따라서 주권의 문제는 언제나 권력의 문제였고, 동시에 책임의 문제였습니다. 이 점에서 주권은 본질적으로 위험한 개념입니다.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질서를 만들 수 있지만, 동시에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권의 역사는 권력을 누가 가지는가의 역사이자, 그 권력을 어떻게 제어하고 제한해 왔는가의 역사였습니다. ■ 근대 초기의 주권 ― 질서를 위해 권력을 한 곳에 모으다 근대적 의미의 주권 개념은 민주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무질서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했습니다. 16~17세기 유럽은 종교전쟁과 내전이 반복되던 공간이었습니다. 교황과 군주, 제후와 귀족, 도시와 영주가 중첩된 권위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안정은 불가능했습니다. 이 혼란을 끝내기 위한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 주권의 집중이었습니다. 이 사유를 체계적으로 정식화한 인물이 장 보댕(Jean Bodin, 1530–1596)입니다. 보댕에게 주권이란 영구적이며 절대적인 권력이었습니다. 주권은 분할될 수 없고, 국가 안에서 최고에 위치하며, 다른 어떤 인간의 법에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이 단계에서 주권은 자유의 보장이 아니라 질서 회복의 기술이었습니다. 주권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군주였고, 민주주의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 사회계약과 국가주권 ― 주권의 근거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17세기에 들어 주권론은 새로운 전환을 맞습니다. 여전히 강력한 주권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유지되었지만, 그 정당화의 근거는 달라졌습니다. 주권은 신이나 혈통이 아니라 인간의 계약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등장합니다. 이 전환을 가장 급진적으로 제시한 인물이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입니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하며, 이 무질서를 종식시키기 위해 시민들이 주권자에게 권한을 위임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때 주권자는 다시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권력이 분산되면 질서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점은, 주권의 근거가 초월적 존재에서 인간의 합의로 이동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권은 여전히 시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었습니다. ■ 국민주권의 등장 ― 주권은 통치자의 권력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다 주권 개념의 결정적 전환은 18세기에 일어납니다. 이 전환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한 인물이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입니다. 루소는 주권의 귀속 주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주권은 통치자의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것이며, 양도될 수 없고 분할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때 주권은 국가의 힘이 아니라 시민의 집합적 자기결정권이 됩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확립된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공식은 이 전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전환은 곧 새로운 문제를 낳습니다. 국민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력이 다시 집중될 경우,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정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헌법국가와 권력분립 ― 주권은 왜 스스로를 제한해야 하는가 국민주권이 곧바로 민주주의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19세기 이후의 정치사상은 하나의 질문을 집요하게 던졌습니다. 국민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헌법국가와 권력분립의 원리였습니다. 이 논의를 체계화한 인물이 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Montesquieu, 1689–1755)입니다. 그는 권력이 한 손에 집중되는 순간 자유는 파괴된다고 보았습니다.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을 분리하고 상호 견제하게 하지 않으면, 주권은 국민의 의지를 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국민 위에 군림하는 지배 장치로 변질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권력분립이 주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주권이 민주주의적 성격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근대 자유주의 정치사상은 기본권의 우위를 강조합니다. 예컨대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정부의 목적을 개인의 생명, 자유, 재산 보호로 규정하며, 다수의 의사라 하더라도 자연권을 침해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 관점에서 주권은 더 이상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력이 아니라, 헌법과 법치 속에서만 행사될 수 있는 권한으로 재정의됩니다. 이 시점부터 주권은 무제한적 권력이 아니라, 스스로를 제한하는 권력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제도적 장치의 추가가 아니었습니다. 주권 개념 자체의 변형이었습니다. 주권은 힘의 총량이 아니라, 규범 속에서 작동하는 권력으로 이동합니다. 국민주권은 이제 헌법, 권력분립, 사법적 통제, 기본권 보장이라는 조건을 통해서만 정당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 전체주의·파시즘 체제에서 주권은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 규범을 거부한 주권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했는가 근대 민주주의가 성취한 주권 개념은 분명한 전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주권은 국민에게 귀속되며, 그 주권은 헌법과 법치, 권력분립과 기본권이라는 규범적 장치 속에서만 행사될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 유럽에서 등장한 전체주의·파시즘 체제는 이 전제를 하나씩 해체하며, 주권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이 변질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째, 주권의 귀속이 변화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국민’을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주권이 국가로, 다시 지도자에게 집중됩니다. 파시즘 체제에서 국민은 주권의 주체가 아니라, 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재료로 취급됩니다. 국민의 의지는 하나의 단일한 의지로 환원되고, 그 의지를 해석하고 구현하는 권한은 지도자에게 독점됩니다. 이때 주권은 시민의 권리가 아니라, 국가와 지도자의 결단을 정당화하는 권력이 됩니다. 이 과정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독일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확인됩니다. 바이마르 헌법은 공식적으로 폐기되지 않았지만, 주권은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반영하는 절차가 아니라, 지도자의 결단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선거와 국민투표는 존재했지만, 그것은 주권의 행사라기보다 이미 결정된 권력을 승인하는 의례에 가까웠습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고 말해졌지만, 국민은 더 이상 주권의 실질적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주권과 법의 관계가 뒤집힙니다. 헌법국가에서 법은 주권을 제한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파시즘 체제에서 법은 주권을 실행하는 도구로 전락합니다. 법은 폐지되지 않고 유지되지만, 예외 조항과 비상 권한, 특별법이 일상화되면서 규범의 실질적 효력은 사라집니다. 주권은 법 위에 노골적으로 군림하지 않으면서도, 법을 언제든 중단시킬 수 있는 권한으로 행사됩니다. 이 구조를 이론적으로 정식화한 인물이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입니다. 슈미트는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규정하며, 정상 상태에서만 작동하는 규범과 절차는 국가 존립의 위기 앞에서 중단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논리는 헌법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헌법을 무력화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파시즘은 헌법을 파괴하지 않고도, 헌법을 작동 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셋째, 주권의 기능이 보호에서 배제로 전환됩니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권한입니다. 그러나 전체주의·파시즘 체제에서 주권은 국민을 선별하고 제거하기 위한 권한으로 변질됩니다. 이때 주권은 권리를 보장하는 근거가 아니라, 권리를 박탈하는 정당화 장치가 됩니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 정치적 반대자, 소수자는 범죄자가 아니라 ‘국가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규정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배제가 처음부터 대량학살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시민권의 박탈, 공직 배제, 직업 제한, 거주 이동의 통제, 강제 추방이 먼저 등장했습니다. 주권은 점진적으로 생명과 시민권을 박탈할 수 있는 권한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국민을 지키는 장치가 아니라, 국민을 분류하고 제거하는 기계로 변모합니다. 넷째, 주권은 위기 담론을 통해 상시화됩니다. 파시즘 체제에서 국가는 항상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비상 상태는 일시적 조치가 아니라 정상 상태로 고착됩니다. 이때 주권은 특정 순간의 예외적 권한이 아니라, 일상적인 통치 방식이 됩니다. 규범은 항상 ‘지금은 지킬 수 없는 것’으로 밀려나고, 결단과 속도, 효율이 정치의 최상 가치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는 외부의 적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언어와 제도를 유지한 채, 내부에서 잠식되었습니다. 선거는 있었고, 법은 존재했으며, 국가는 여전히 주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주권은 더 이상 시민의 자기결정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규범을 중단하고, 권리를 박탈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역사적 경험이 남긴 교훈은 분명합니다. 주권이 규범으로부터 이탈하는 순간, 그것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힘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권력이 됩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은 주권이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주권이 스스로를 제한하는 장치를 거부했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변질은 언제나 질서, 안전, 국가 생존이라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국가적 위기(distress)’를 의미하는 뒤집힌 성조기가 정치적 항의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장면.  ■ 1945년 이후: 주권은 누구에게 귀속되도록 재설계되었는가 ― 그리고 미국에서 그 귀속 구조는 어떻게 붕괴되었는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승전국들이 마주한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대량살상무기의 파괴력이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고, 식민지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더 이상 감당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강대국 간 충돌이 다시 전면전으로 비화할 경우, 그 결과는 어느 국가도 통제할 수 없다는 공포가 공유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전후 세계가 합의한 것은 주권을 약화시키자는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핵심은 주권이 다시 폭주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의식에서 국제연합의 창설과 국제인권선언에 대한 합의가 나왔습니다. 주요 국제 현안은 가능한 한 국제 규범과 절차의 틀 안에서 해결하고, 전쟁·집단학살·무제한적 예외 권력이 반복되는 사태를 사전에 차단하자는 최소한의 합의였습니다. 이 전후 질서는 이상주의적 선언이 아니라, 다시는 세계대전으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한 현실적 안전장치였습니다. 이 전후 질서의 중요한 설계자 중 하나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파시즘과의 전쟁을 통해 군사적 패권을 획득하는 동시에, 주권은 시민에게 귀속되어야 하며 그 행사는 헌법과 절차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민주주의 모델을 전후 세계의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 국제연합과 국제인권 규범은 주권을 제거하려는 장치가 아니라, 주권이 다시 시민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고정하기 위한 제도적 틀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주권의 개념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권의 문제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합니다. 누가, 어떤 근거로, 예외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주권은 권력의 크기나 강도의 문제가 아니라, 최종 결정권이 누구에게 귀속되어 있는가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20세기 전반의 전체주의·파시즘 체제는 이 귀속 구조를 급진적으로 변형시켰습니다. 형식적으로는 국민을 주권의 주체로 호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예외적 결정을 내릴 권한이 국가와 지도자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국민은 주권의 주체가 아니라 동원 대상으로 전락했고, 법은 주권을 제어하지 못한 채 그 결정을 집행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외는 일시적 조치가 아니라 정상적인 통치 방식이 되었고, 시민의 권리는 언제든 중단될 수 있는 조건부 권리로 바뀌었습니다. 대량학살과 전면전은 이 주권 구조가 도달한 극단적 귀결이었습니다. 전후 민주주의는 이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주권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주권이 시민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헌법·선거·사법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관리하고 고정하려 했던 것입니다. 시민의 집합적 의사가 예외적 결정을 포함한 최종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주권의 강화나 약화가 아닙니다. 문제는 주권의 귀속 구조를 떠받치던 사회적·경제적 토대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붕괴는 하루아침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지난 40여 년간 지속된 신자유주의 체제 전환의 누적된 결과였습니다. 1980년대 이후 미국 경제는 구조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무역수지와 경상수지의 만성적 적자, 이른바 쌍둥이 적자는 가속화되었고, 제조업 기반은 붕괴에 가까운 수준으로 약화되었습니다. 반면 군비 지출은 레이건 행정부 이후 40년간 단 한 번도 실질적으로 축소되지 않은 채 증대일로를 걸었습니다. 생산과 고용을 떠받치던 산업 기반은 무너졌지만, 군사·금융·투기 중심의 경제 구조는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이 경제적 붕괴는 중산층의 해체로 이어졌고, 시민의 생활 기반과 국가 경제의 하부구조를 동시에 허물었습니다. 안정적인 노동과 소득을 전제로 작동하던 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대는 약화되었고, 시민은 점점 장기적 선택과 정치적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로 밀려났습니다. 주권은 경험되지 않는 추상적 권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 또한 이 변화를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왜곡된 선거구 획정 문제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대표성과 책임성은 점점 훼손되었습니다. 이를 제어해야 할 연방대법원은 문제 해결을 방기했고, 선거 제도의 구조적 왜곡을 정치의 영역이라며 사실상 외면했습니다. 사법 제도 역시 시대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헌법 개정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 속에서 사법 제도의 근본적 개혁은 시도조차 되지 못했고, 연방대법원의 종신제는 변화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채 보수적 판결을 통해 사회 변화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 미국의 상부구조는 스스로를 갱신할 동력을 점점 상실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0여 년간의 신자유주의 체제 실패에 대해 미국의 정치권, 시민사회, 언론은 통렬한 자기 반성을 거의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니 다른 경로를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과거에 대한 평가가 부재한 사회에서는 미래의 설계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이 실패는 이제 수치로 확인됩니다. 2025년 현재 히계기준에 따르면, 미국의 연방부채는 약 37조 달러에 달합니다. 이에 대한 연간 이자 지출만 해도 연간 연방예산 약 7조 달러의 14%에 해당하는 약 1조 달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채 수준은 일반정부 부채 기준으로 볼 때, G7 국가들 가운데 일본(약 230%대), 이탈리아(130%대)에 이어 미국이 약 120% 수준으로 3위권에 해당합니다                                                                      (부채비율 순 / 일반정부 기준, 2025년 전후) * 금액은 달러 환산 추정치, 비율은 예산 대비 이자지출 비중.* 출처: 국제통화기금(IMF), Global Debt DatabaseWorld Economic Outlook(2024–2025)부채비율 순 / 일반정부 기준, 2025년 전후.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100%를 넘어서는 국면에 진입할 경우, 문제는 단순히 빚이 많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순간부터 국가는 성장과 개혁을 위한 재정을 운용하는 주체라기보다, 이미 쌓인 부채를 유지·관리하기 위해 정책 선택의 폭이 구조적으로 제한되는 상태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자 지출이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잠식하면서,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설계하기보다 기존 지출을 방어하는 데 급급해지고, 재정은 점점 경직됩니다. 위기 대응 능력은 약화되고, 그 부담은 세대 간 이전이라는 형태로 누적됩니다. 현재 미국이 직면한 문제는 이러한 고부채 구조가 고금리 환경과 결합하면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연간 이자 지출이 연방예산의 약 14%에 달하며, 국방·인프라·복지와 같은 생산적·사회적 지출보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이자 비용이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예산 항목의 변화가 아니라, 국가 재정의 성격 자체가 바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함께 미국의 재정 운용은 점점 군사력과 패권 구조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내적 생산성의 회복이나 산업 기반의 재건보다, 달러 패권과 금융 헤게모니를 통해 문제를 연기하려는 유인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고부채 상태에서 금리 인상과 재정 긴축이 동시에 어려워지자, 미국은 경제 내부의 구조 개혁보다 국제 질서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통해 부담을 외부로 분산시키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정 압박은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재정 여력이 줄어들수록 정치권은 장기적 정책 토론보다 단기적 동원에 의존하게 되고, 포퓰리즘적 공약이나 외부 위협을 강조하는 담론이 강화됩니다. 그 결과, 합리적 정책 논쟁의 공간은 축소되고, 재정 문제는 점점 정치적 갈등의 연료로 전환됩니다. 이 지점에서 일본과 미국의 차이는 분명해집니다. 일본은 부채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라”에 가까운 반면, 미국은 부채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권력과 영향력을 요구하는 나라”에 가깝습니다. 일본의 고부채는 장기 침체와 정책 무력화로 귀결되고 있는 반면, 미국의 고부채는 외교·군사·금융 영역 전반에서 더 큰 역할을 요구하는 압박으로 전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고부채 문제는 단순한 재정 악화가 아니라, 외교 전략과 군사 정책, 그리고 민주주의 운영 방식 전체를 동시에 압박하는 구조적 변수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부채가 과도해질 경우, 일본에서는 장기 침체와 정책 무력화로, 미국에서는 이자 폭증과 재정 주권의 잠식으로 그 문제가 나타납니다. 일본은 시간을 벌었지만 미래를 잃을 위험에 놓여 있고, 미국은 지금의 선택이 곧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시험하는 국면에 들어섰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대비는 단순한 재정 수치의 비교를 넘어, 21세기 국가 운영 모델이 어디까지 지속 가능한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내부적 붕괴는 국제 질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국제연합과 국제인권 규범은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국제대전의 재발을 막고 기본적인 인권 기준에 대한 상호 존중과 감시를 작동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질서를 주도했던 미국이 앞장서서 이 국제 규범의 기초를 스스로 허물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규범을 어기면서도 명분과 정당화를 동원했지만, 이제는 규범 자체를 방해물로 취급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조건에서 트럼프와 MAGA가 제시하는 주권 담론은 주권을 되찾겠다”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주권의 귀속을 시민이 아니라 국가와 지도자의 결단으로 이동시키는 담론입니다. 국제규범과 인권, 절차는 주권의 제약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규정되고, 예외적 결정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정치의 정상으로 제시됩니다. 결국 오늘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주권의 강화나 약화가 아닙니다. 문제는 주권이 다시 시민의 자기결정권에서 분리되어, 배제와 결단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위치로 이동하고 있는가라는 점입니다. 이는 특정 인물이나 집단의 일탈이 아니라, 지난 40여 년간 누적된 경제적 붕괴, 제도적 마비,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한 집단적 반성 부재가 낳은 구조적 귀결입니다. 주권은 이렇게 비워졌고, 그 빈자리를 다시 파시즘이 익숙하게 사용해온 논리가 채우고 있습니다. ■ 문화전쟁은 무엇을 파괴하는가 ―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 공격과 주권의 권위주의적 회귀 오늘날 미국 정치를 규정하는 핵심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문화전쟁(culture war)’입니다. 문화전쟁이란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가치관 충돌이나 세대·정체성 간 갈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용어는 본래 1980~90년대 미국 보수 진영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낙태·성소수자 권리·종교·교육·인종 문제 등을 둘러싼 갈등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전략을 가리킵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공화당과 보수 미디어는, 사회적 쟁점을 ‘정책 논쟁’이 아니라 ‘도덕과 정체성의 전쟁’으로 전환시키며 이 개념을 적극 활용해 왔습니다.   ‘Make America Great Again(MAGA)’ 문구가 적힌 모자를 착용한 지지자들이 집회에 모여 있는 모습. 이 상징은 단순한 선거 슬로건을 넘어, 문화전쟁과 정체성 정치의 시각적 표상으로 기능해 왔다. 본 칼럼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문화전쟁은 가치 논쟁을 넘어 주권의 귀속을 재배치하려는 정치 전략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오늘의 문화전쟁은 그 초기 형태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전쟁은 1945년 이후 미국 사회가 축적해 온 현대 민주주의의 규범과 도덕 기준을 제거하는 전쟁에 가깝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는 다민족·다종교 사회 속에서 최소한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규범을 쌓아 왔습니다. 인종차별 금지, 소수자 보호, 공적 언어의 절제, 제도적 절차의 존중은 그 핵심이었습니다. 이는 완벽한 정의의 실현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시민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 조건이었습니다.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는 이 맥락에서 등장한 생활문화 규범이었습니다. 헌법이나 법률이 아니라, 학교·언론·정당·노동조합·시민단체 등 시민사회 전반에서 이런 말과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기준으로 작동했습니다. 이 규범은 시민사회의 정의, 즉 시민 각자가 타인의 존엄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절제하는 민주주의의 일상적 작동 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규범이 흔들리기 시작한 지점에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사회 지도층과 지배 엘리트는 점잖은 언어와 도덕적 수사를 앞세우면서도, 뒤로는 불평등과 탈산업화, 금융화의 비용을 시민에게 전가했습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공적 자금으로 대형 금융기관을 구제하면서 책임을 묻지 않은 선택은, 규범을 말하던 엘리트 집단의 도덕적 권위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이때부터 너희가 말하는 정의와 규범은 위선”이라는 인식이 확산됩니다. 그러나 MAGA 세력이 선택한 방향은 위선자를 규범으로 처벌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규범을 회복하거나 재정의하는 대신, 규범 자체를 조롱하고 제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PC주의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생활문화 규범이 아니라, 엘리트가 시민을 검열하는 억압적 장치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정의는 기준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공론장은 존중과 설득의 공간이 아니라 혐오와 경멸이 유통되는 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러한 문화전쟁의 성격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준 인물 가운데 하나가 스티브 배넌(Steve Bannon, 1953– )입니다. 그는 자신의 팟캐스트 War Room을 통해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반(反)PC 담론을 조직해 왔습니다. 배넌에게 PC주의는 단순한 언어 규범이 아니라, 해체해야 할 ‘체제의 규범’이었습니다. 그의 언어에서 반PC 투쟁은 문화 논쟁이 아니라, 제도·규범·엘리트를 동시에 무너뜨리는 정치적 전쟁으로 제시됩니다. 이는 규범을 둘러싼 논쟁이 곧 주권의 귀속을 둘러싼 투쟁임을 스스로 드러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문화전쟁은 분명한 방향성을 갖습니다. PC주의 공격을 통해 규범을 붕괴시키고, 그 공백 위에 예외적 결단의 권력을 재배치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시민사회의 정의, 시민의 자기절제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적 주권론으로의 회귀입니다. 규범이 무력화된 사회에서는 다원적 가치의 조정이 불가능해지고,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빠른 결단과 강력한 지도자입니다. 이 점을 최근의 저널리즘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널리스트 앤 애플바움(Anne Applebaum, 1964– )은 저서와 주요 언론 기고를 통해, 민주주의의 위기는 제도 붕괴 이전에 규범 붕괴에서 시작된다고 지적해 왔습니다. 규범과 절차를 비웃고 제거하는 정치가 결국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부르며, 민주적 기반을 내부에서부터 허문다는 것입니다. 또한 언론인 네스린 말리크(Nesrine Malik, 1981– )는 저서 에서, PC주의가 일상문화 규범으로 형성되었음에도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왜곡되며, 그 결과 규범 전체가 ‘위선’으로 낙인찍히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문화전쟁은 중립적인 가치 논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후 민주주의가 어렵게 축적해 온 규범과 도덕 기준을 제거하고, 그 공백 위에 예외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주권을 재배치하려는 정치입니다. PC주의에 대한 공격은 그 출발점이자 시험장이었습니다. 규범을 지키는 시민사회의 정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 다음 단계는 민주주의 자체를 ‘비효율적 제약’으로 몰아붙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PC주의 공격은 단순한 반(反)엘리트 정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권위주의, 더 나아가 파시즘적 주권론으로의 회귀를 준비하는 밑자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민주적 주권은 규범을 무시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규범을 함께 떠맡고 지키려는 시민의 책임 위에서만 성립합니다. 이 규범이 무너질 때, 주권은 시민에게서 빠져나와 다시 결단의 권력으로 이동합니다. 오늘의 문화전쟁이 던지는 가장 위험한 신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국가권력과 시민의 긴장. 연방 권력 소속 무장 요원과 시위대가 대치하거나 충돌하는 장면. 민주주의에서 주권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권한이지만, 규범과 절차가 무력화될 때 국가는 시민을 통제·배제하는 장치로 전환된다. 이 이미지는 주권이 ‘보호’에서 ‘배제’로 이동하는 순간의 긴장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1. 주권·정치이론 고전 보댕, 『주권론』, 임지현 옮김, 한길사, 2003. (Jean Bodin, Les Six Livres de la République, 1576) 홉스, 『리바이어던』, 진석용 옮김, 나남, 2019. (Thomas Hobbes, Leviathan, 1651)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정성환 옮김, 책세상, 2018. (Jean-Jacques Rousseau, Du contrat social, 1762) , 『법의 정신』, 고봉만 옮김, 한길사, 2011. (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Montesquieu, De l’esprit des lois, 1748) 로크, 『통치론』, 강정인 옮김, 까치, 2014. (John Locke, Two Treatises of Government, 1689) 2. 전체주의·파시즘과 예외 주권 카를 슈미트, 『정치신학』, 김효전 옮김, 한길사, 2010.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1922) 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의 해부』, 김정훈 옮김, 교양인, 2018. (Robert O. Paxton, The Anatomy of Fascism, 2004) 3. 전후 국제질서·현대 민주주의 위기와 문화전쟁 국제연합, 『국제연합 헌장』, 외교부 번역본, 1945. 국제연합, 『세계인권선언』, 국가인권위원회 번역본, 1948. 새뮤얼 모인, 『인권의 역사』, 권현정 옮김, 글항아리, 2021. (Samuel Moyn, The Last Utopia: Human Rights in History, 2010) 앤 애플바움, 『민주주의의 황혼』, 송연석 옮김, 열린책들, 2021. (Anne Applebaum, Twilight of Democracy, 2020) 티머시 스나이더, 『폭정에 대하여』, 조행복 옮김, 열린책들, 2017. (Timothy Snyder, On Tyranny, 2017)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박세연 옮김, 어크로스, 2018. (Steven Levitsky & Daniel Ziblatt, How Democracies Die, 2018) 네스린 말리크,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2023. (Nesrine Malik, We Need New Stories, 2021) 가디언(The Guardian), Donald Trump and the normalization of authoritarian language”, 2024.10.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 How Trump’s rhetoric reshaped American sovereignty”, 2024.11.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 The culture war as a political weapon in the United States”, 2023.12. 애틀랜틱(The Atlantic),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 America’s debt, democracy, and the limits of power”, 20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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