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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채찍질 당하고 숲에 버려져도 굽히지 않은 E. 후튼

채찍질 당하고 숲에 버려져도 굽히지 않은 E. 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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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두들겨 맞으면 조용해지는 사람과, 두들겨 맞을수록 더 크게 소리지르는 사람. 엘리자베스 후튼(Elizabeth Hooton, 1600~1672)은 단연 후자였다. 그것도 예순이 넘은 나이에, 대서양을 건너서까지.   엘리자베스 후튼 초상화.(Elizabeth Hooton - Alchetron, The Free Social Encyclopedia) 이 나이에 웬 설교냐 , 쉰 살에 시작한 첫 여성 사제 엘리자베스 후튼은 1600년 잉글랜드 노팅엄에서 엘리자베스 캐리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1628년 올리버 후튼과 결혼해 스케그비(Skegby) 마을에 정착한 그는 평범한 농가의 부인이었다. 적어도 1646년까지는 그랬다. 그 해 조지 폭스(1624~1691)라는 청년 설교자가 스케그비 마을에 나타났다. 그는 퀘이커운동의 초기 지도자로, 교회의 형식주의와 성직자의 독점에 반대하며 모든 이 안에 신의 빛이 있다고 외쳤다. 평등, 단순, 양심의 자유. 당시로선 위험천만한 사상이었다. 후튼은 이 젊은 설교자의 말에 홀딱 빠졌다. 그 때 그의 나이 마흔여섯.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내주었고, 퀘이커운동 최초의 핵심 교도가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설교를 시작했다. 쉰 살을 바라보던 나이에. 당시 기록은 그를 두고 나이 지긋한 여성이 남성을 흉내 내어 설교를 시작했다 고 적었는데, 이 한 줄이야말로 당대 사회가 얼마나 황당해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쉰 살 여성의 설교가 흉내 라니. 지금 읽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17세기에 그린 조지 폭스 초상화(위키피디아) 입 열었다고 감옥, 교회 비판했다고 감옥, 17세기판 연행의 연속 후튼의 설교 인생은 곧 수감 인생이기도 했다. 1651년 더비에서 성직자를 꾸짖었다는 이유로 첫 투옥. 1652년에는 요크 성 감옥에서 회중 앞에서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또 구금. 1660년에는 잉글랜드 셀스턴(Selston)의 마을사제가 길을 가던 그를 알아보고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도랑에 처박았다. 이유는? 그냥 퀘이커였기 때문에. 1664년에는 링컨 감옥에 다섯 달 동안 갇혔다. 기록을 보고 있으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적어도 일관성은 있었다. 잡아 가두거나, 때리거나, 둘 다 하거나. 17세기 잉글랜드의 종교당국이 가진 레퍼토리는 그게 전부였다. 물론 일관성은 후튼 쪽에도 있었다. 풀려나면 또 설교했다.   엘리지베스 후튼.(Elizabeth Hooton - Alchetron, The Free Social Encyclopedia) 대서양을 건너간 예순의 노파, 그것도 두 번, 세 번 남편 올리버 후튼은 1657년 세상을 떴다. 홀몸이 된 엘리자베스 후튼은 놀랍게도 더 자유로워졌다. 1661년, 예순을 넘긴 나이에 동료 설교자 조안 브록솝(Joan Brocksopp)과 함께 미국 대륙으로 배를 탔다. 아들 새뮤얼은 처음에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미국에서 선교를 했다. 아무래도 어머니 앞에선 말이 안 됐던 모양이다.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도착한 두 여인을 맞이한 것은 당시 주지사 존 엔디콧(John Endicott, 1600~1665)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감옥이었다. 며칠을 굶겼다. 형틀에 가뒀다. 세 마을에서 차례로 매질했다. 그러고는 광야에 내다 버렸다. 먹을 것도 없이. 여기서 잠깐, 역사의 반전이 등장한다. 두 노파는 살아서 돌아왔다. 눈 위에 찍힌 늑대 발자국을 따라 마을을 찾아냈다. 늑대도 살고, 후튼도 살았다. 엔디콧 주지사만 역사의 악당으로 남았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튼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목표는 국왕 찰스 2세(1630~1685)였다. 왕에게 매사추세츠의 퀘이커 박해를 중단하라고 청원했다. 그것도 왕이 테니스를 치러 가는 길목에서 따라붙어 걸으며. 신하들은 경악했다. 누가 왕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가? 퀘이커들은 신 이외에 어느 인간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는데, 후튼은 그 원칙을 왕 곁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방식으로 구현했다. 어이없게도 왕은 감복했다. 매사추세츠 어느 곳에서든 땅을 사고 정착하고 예배장소를 열 수 있다는 왕실허가증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보스턴 당국은 국왕허가증을 보고도 꿈쩍하지 않았다. 다시 추방. 미국 케임브리지에서는 허가증을 들이밀었더니 채찍질하고 숲에 버렸다. 왕의 도장이 찍힌 문서를 무시한 것이다. 식민지 당국이 얼마나 제멋대로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고,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집행하는 자가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씁쓸한 진리이기도 하다.   찰스 2세 초상화(위키피디아) 일흔두 살, 마지막 항해, 야자나무 아래에서의 죽음 1670년, 일흔 살의 후튼은 다시 조지 폭스를 따라 배를 탔다. 목적지는 서인도 제도와 미국 대륙. 동료들에게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672년 1월 8일, 자메이카에서 숨을 거뒀다. 전날까지도 모임에 나가 사람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동료 제임스 랭커스터가 이층에 올라가 보니 의식이 없었다. 창문을 열고 옷을 풀어줬더니 숨이 돌아왔고, 그는 눈을 떠 랭커스터를 바라봤지만 말은 하지 못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이 일흔두 살.   엘리자베스 후튼 평전(김성수 시민기자 소장) 그가 역사에 남긴 것들 엘리자베스 후튼이 최초의 퀘이커 여성 설교자 라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여성이 공개적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법적, 사회적 금기를 동시에 깨는 일이었다. 성직자 면허도 없고, 교회의 허락도 없고, 남편의 뒷받침도 없이 오직 양심과 신념만으로 수십 년을 버텼다. 그가 속한 퀘이커교는 이후 종교적 관용, 노예제 반대, 양심적 병역거부, 여성평등 같은 굵직한 사회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후튼은 그 가장 이른 시기를 온몸으로 버텨낸 사람이다. 그는 용감한 예순 명(Valiant Sixty) 이라 불리는 초기 퀘이커 핵심설교자 집단에 포함돼 있다.   여성 설교자 엘리자베스 후튼(Elizabeth Hooton – FilmCity) 한국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 엘리자베스 후튼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꾸만 현재의 한국이 겹쳐 보인다. 몇 가지 장면을 짚어보자. 첫째, 자격 없다 는 핑계로 입을 틀어막는 구조. 후튼이 설교를 시작했을 때 당국이 내건 이유는 명확했다. 여자이고, 늙었고, 면허가 없다는 것. 자격 없는 자가 공공 담론에 나서는 것을 가로막는 방식은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하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전문가가 아니면서 , 당사자도 아니면서 라는 말이 시민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데 곧잘 쓰인다. 문제는 자격이 아니라 말의 내용이다. 둘째, 상위규범을 무시하는 하위권력. 국왕의 허가증을 들고 갔더니 채찍질하고 쫓아버린 보스턴 당국의 행태는 낯설지 않다.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와도 행정현장에서 지켜지지 않거나, 법원 명령이 집행단계에서 흐지부지되는 일은 지금 한국에서도 드물지 않다.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실행하는 사람이 무시하면 종이에 불과하다. 셋째, 나이와 젠더로 저항의 무게를 깎아내리는 습관. 17세기 기록자들이 후튼을 두고 굳이 나이 지긋한 여성 임을 강조한 것은 그의 행동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지금도 여성활동가, 노년의 시민운동가, 혹은 청소년 환경운동가를 다룰 때 언론이 비슷한 방식으로 맥락화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누가 말하느냐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넷째, 굴하지 않는 버티기의 힘. 후튼이 결국 국왕의 허가증을 받아낸 것은 테니스장 옆에서 끈질기게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전술이 아니었다. 그냥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국의 여러 사회운동, 세월호 유가족의 긴 싸움,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 요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수년간 농성이 끝내 작은 변화를 이끌어낸 방식도 결국 이 버티기 와 다르지 않다.   1764년 9월 6일, 23세의 조지프 워렌 박사는 17세의 고아 상속녀 엘리자베스 후튼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브래틀 스트리트 교회에서 결혼했다. 당시 보스턴 신문들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난 목요일 저녁, 이 도시의 의사 중 한 명인 조셉 워렌 박사와 이 도시의 상인이었던 고 리처드 후튼 씨의 외동딸이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엘리자베스 후튼 양이 결혼했다. (Revolutionary Physician | Dr Joseph Warren Foundation) 채찍질당하고 숲에 버려졌지만 살아서 돌아온 사람 역사는 영웅적 순간보다 질기게 버티는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한다. 엘리자베스 후튼은 위대한 연설을 남기지 않았다. 불멸의 저서도 없다. 단지 감옥에서 나오면 또 설교하고, 쫓겨나면 또 돌아왔다. 늑대 발자국을 따라 눈 덮인 숲을 헤쳐 나왔고, 일흔 살에 다시 배를 탔다.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지금이 낫냐고? 많은 부분에서 그렇다. 여성이 설교한다고 채찍질 당하진 않는다. 그러나 목소리를 높인다는 이유로 조용히 지워지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거나, 자격논쟁으로 끌려가는 일은 여전하다. 그러니 묻자. 지금 당신 곁에서 오래, 꾸준히, 지치지 않고 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혹시 그 사람을 나이 지긋한 여성 이라며 슬쩍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엘리자베스 후튼은 눈 위의 늑대 발자국을 따라 살아남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발자국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엘리자베스 후튼.(Elizabeth Hooton: The Radical Life of the First Quaker Woman Preacher)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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