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카오스 시대, 또 다른 삶과 세계 꿈꾸기 [칼럼] 개발이냐 환경보전이냐. 지난 4월 21일 아르헨티나 산후안 주 칼링가스타의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로스 아술레스 구리 광산 개발 프로젝트의 미래 노천 광산 부지인 산악 초원을 항공에서 촬영한 사진.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지난 3월 광산 개발이 산맥 전체로 확산되어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 이라며, 각 주에서 새로운 지역을 광산 개발에 개방할 수 있도록 빙하 보호법을 개정했다. 환경 단체들은 이 조치가 물 접근권을 위협한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2026.4.21. AFP 연합뉴스
2022년 5월 8일 세상을 떠났으니 4년이 되었다. 그는 천재적인 시인이었으며 시대를 풍미한 민주화운동가였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동지였던 진보운동을 비판하고 비판받으며, 생명학과 개벽적 문명전환을 주창한 문제적 인물이었다. 그는 인류가 직면한 현실을 ‘빅카오스’라고 요약했다. 그는 대혼돈·대전환의 시대에 응답하고자 했다. 생태위기와 AI의 폭주, 문명 충돌의 시대, 한 마디로 ‘준거 상실의 시대’, 사상가 김지하는 ‘명시적으로’ 세 가지 대답을 내놓았다. 궁궁/태극 의 원형과 혼돈적 질서 의 패러다임, 그리고 ‘모심’과 ‘님’의 담론이 그것이다.
빅카오스 시대, 인류사적 대전환기
김지하에게 오늘의 현실은 ‘빅 카오스’다. 김지하는 단순히 ‘위기’로 보지 않았다. 근대 산업문명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문명이 태동하는 ‘문명사적’ 대전환기이며, 일만 년 홀로세의 인류문명이 끝나고 새로운 인류문명이 시작되는 ‘인류사적’ 대전환기이다. 나아가 신체와 심리와 사회와 우주가 한꺼번에 전환하는 ‘개벽적’ 대전환기이다. 최근 유행하는 ‘인류세’ 담론들과 다양한 ‘포스트휴먼’ 담론, 그리고 ‘제2의 축의 시대’ 담론 등을 떠올리게 한다.
김지하. 나무위키
이 엄청난 문명의 전환, 한 단위의 문명이 아니라 인류 문명사 전체가 바뀌는 것. ‘생각을 생각하는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나온 때를 1만년 전이라고 하는 설이 있고, 15만 년 전이라고 하는 설이 있고 5만 년 전이라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5만 년이 합당합니다만, 이 5만년 전체가 뒤집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 사이의 통일이 일어나는 ‘신인간’에 의해서 세계와 우주가 바뀌는 그러한 때입니다(『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295-296).
그러므로, 김지하가 적시하는 ‘전환기의 증후군 은 생태계 파괴, 팬데믹, 기후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극단적인 사회적 갈등과 경제적 불평등, 기술적 특이점과 AI 대전환, 나아가 가이아 지구의 대변화와 우주적 변동까지 망라한다. 동시에 김지하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신인간, 신인류의 출현이다. 인간에 대한 재정의가 그것이다. 김지하는 영성, 요가, 명상의 유행과 뇌과학 및 생태학, 우주과학 신드롬을 관찰하며 ’의식의 도약 을 예감한다. 후천개벽이란 무엇보다 인류사적 대전환이며, 그것은 ‘신인간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5만 년의 인류사적 대전환이라는 크기와 깊이에 응답할 수 있는 개벽적 사상과 담론 이 아직 출현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온갖 담론과 이론과 처방이 난무하고 있지만, ”생각을 생각하는 것 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신 사이의 통일이 일어나, ‘신인간’에 의해서 세계와 우주가 바뀌는 ‘개벽적 경험(근본적 경험)’과 그에 의거한 새로운 세계관과 서사가 창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 언론에 의하면 지금 세계는 이른바 대혼돈 즉 빅 카오스 에 빠져 있다. 인간 내면의 황폐, 세계시장의 대불황과 사회적 혼란, 그리고 지구생태계의 오염과 기상이변이 그것이다. 여기에 대해 인간, 사회, 자연의 세 차원을 관통하는 통일적 담론이 나타나야 하고 그에 기초하여 생성의 이중성의 논리학과 대카오스 과학이 출현해야 이 위기를 극복할 텐데 바로 그 첫 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지하전집 제1권』, 595)
카오스 이미지. 위키피디아
김지하의 개벽담론이 기존의 전환담론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김지하는 ‘인류사적 대전환’이라는 관점에서, 첫째 신인류의 원형 을 찾고자 했다. 둘째,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새로운 담론과 윤리를 만들어가고자 했다. ‘궁궁태극(弓弓太極)’의 원형,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 ‘모심’과 ‘님’의 담론, 이 세 가지가 빅카오스 시대, 김지하의 대답이다.
새로운 문명의 원형, 궁궁태극
김지하는 융(Carl Jung)의 원형(archetype) 개념을 빌어 새 인류의 새 원형을 제시한다. 궁궁태극(弓弓太極) 이 그것이다. 융의 원형 개념은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이미지이자 행동 패턴의 근원을 말한다. 신화, 꿈, 예술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의 배후에 있는 마음의 틀을 의미한다. 김지하에 따르면, 그 원형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원형이 출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김지하는 19세기 한국의 동학에서 그것을 발견한다.
김지하의 탐색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로부터 시작된다. 수운이 1860년 4월 5일 받은 깨달음 체험과 계시가 그것이다. 수운은 하늘님의 소리를 듣고 이렇게 보고한다. ”나에게 영험한 부적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모양은 태극이며 혹은 궁궁이라 (吾有靈符 其名仙藥 其形太極 又形弓弓) (「논학문」, 『동경대전』). 최제우는 한울님으로부터 세상을 치유할 영부(靈符)을 받았는데, 그 이미지가 ‘태극(太極)’ 같기도 하고 ‘궁궁(弓弓)’ 같기도 했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다. 김지하는 재해석한다. 아니, 재발명한다. 태극(太極)은 중국의 사상문화적 전통에서 수천 년 이어온 조화와 질서(cosmos)의 상징이었다. 반면 김지하에게 궁궁(弓弓)은 우주생명의 약동하는 기운으로, 혼돈(chaos)을 상징했다(『생명학1』). 김지하에게 ‘태극 혹은 궁궁’이란 코스모스(질서)와 카오스(혼돈)의 이중성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지하는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 최제우는 신령한 부적의 모양에 대해 언급하며 ‘태극’을 먼저, ‘궁궁’을 나중에 제시하고 있다. 즉 태극-궁궁 의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지하는 이 순서를 뒤집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궁궁 을 앞세워 궁궁태극(弓弓太極) 이라는 인류의 집단무의식적 새 원형을 제시한다. 김지하에 따르면, ”영부(靈符)는 ‘태극궁궁’으로부터 ‘궁궁태극’으로 중심이동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562).
수운 최제우의 제자이자 동학의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제시한 ‘향벽설위’(向壁設位, ‘벽’을 향한 제사)에서 ‘향아설위’(向我設位, ‘나’를 향한 제사)로의 방향 전환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순서의 역전은 결정적이다. 말 그대로 ‘대전환(great turn’)이다. 수운에게서 태극이 앞에 오는 것은 여전히 ‘질서’가 일차적이고, ‘혼돈’이 그것을 보완하는 이차적 위치에 있음을 함의한다. 그러나 빅카오스 시대에는 혼돈적 생명의 에너지가 일차적이어야 한다. 기존의 질서인 태극은 궁궁의 힘에 의해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해월 최시형. 위키피디아
해월 최시형은 궁을회문명(弓乙回文明) 이라는 경구를 남겼다. 궁을이 문명을 바꾼다. 동학도인들에게 궁을 은 신앙적 상징이었으나, 김지하에게 ’궁을‘은 궁궁과 태극의 융합으로서 혼돈적 질서 의 원형적 이미지로 재발명되었다. 새로운 인류문명의 원형은 ’궁을‘ 곧 ’궁궁태극‘이며, 궁궁태극의 마음이 새로운 문명을 태동시킬 것이라는 말이다. (※생태신학자이자 문명사상가인 토마스 베리 Thomas Berry 신부는 『위대한 과업』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우주의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살아 있는 전체의 원형으로 ‘생명의 나무’를 제시한 바 있다.)
혼돈적 질서 의 패러다임
김지하는 궁궁태극의 원형을 현대 철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오스모스(Chaosmos) 개념을 만난다. 그는 들뢰즈에게서 커다란 영감을 얻었다. ”생성적 시간관과 카오스 민중론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고 고백할 정도였다(『김지하전집 제3권』, 238). 김지하는 ’카오스모스‘ 즉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동서의 사상적 융합인 셈이다.
’혼돈적 질서‘는 ’질서의 질서‘와 구분된다. 조선의 강력한 성리학적 질서와 신분제는 그야말로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질서의 질서‘였다. 백성들은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혁명을 위해서는 혼돈적 에너지가 절실했다. 아니, 혼돈적 에너지의 분출과 폭발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살아있는 민중, 생민(生民)은 봉기로, 혁명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수운의 불연기연(不然其然, 아니다/그렇다) 은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을 잘 표현한다. 불연(不然)이 ’혼돈‘이라면 기연(其然)은 ’질서‘이다. 이 양자 사이의 ’기우뚱한 균형‘과 이중성과 역설이 생명 논리이며 혼돈적 질서의 인식 방법인 것이다. 불연기연은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the virtual)과 현재적인 것(the actual)의 역동과 비교될 수도 있다.
또한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의 저자이자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일리야 프리고진의 ’비평형 역학‘과 비교할 수도 있다. ’새로운 질서‘는 ’기존의 질서‘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폐허 위에서 새로운 질서는 태동한다. ’기우뚱한 균형‘이란 말이 시사하듯이 ’균형‘은 항상 기우뚱하다. ’평형의 평형‘, ’질서의 질서‘는 기계적 평형이며, 기계적 질서다. ’비평형의 평형‘만이 ’살아있는 평형‘인 것이다. ’혼돈적 질서‘만이 살아있는 질서인 것이다.
김지하에 따르면,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은 근대 서구,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모순’ 패러다임을 넘어서고, 중국 전통의 ‘조화’의 패러다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은 ‘모순(투쟁)’ 패러다임과 ‘조화(통합)’ 패러다임을 동시에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패러다임인 것이다. 그러나 김지하는 카오스모스 개념이나 비평형 역학과 자기조직화 이론을 수용하는 데서 머물지 않았다. 핵심은 ‘신령’이다. 김지하에게 카오스모스는 ’신령한 카오스모스‘이다.
카오스모스만으로는 절대로 아름다운 문화와 아름다운 미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 보이지 않는 질서의 안에 움직이는 어떤 신령한 생성이 있어야 합니다. (『김지하전집 제1권』, 676)
여기가 김지하의 ’체험적 독창성‘이 빛나는 지점이다. 서양의 ‘카오스모스’ 개념이 혼돈과 질서의 논리적 결합을 보여주었다면, 김지하의 신령한 카오스모스 는 신명(神明) 과 같은 동아시아적, 한국적 영성의 힘을 보여준다. 논리를 초월한 어떤 힘, 표면의 논리 아래 심연의 어떤 힘, 살아있는 것을 살아 있게 하는 힘, 역사를 움직이는 생성의 힘이 ‘혼돈적 질서’의 근원적 에너지인 것이다.
김지하에게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은 살아 생동하는 현실이다. 김지하는 일찍이 2002년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 이라는 엇박 , 혼돈박 을 경험하며 ‘혼돈적 질서’를 깨달았다.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은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야 할 대원칙이다.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은 지금 오고 있는 생태위기 시대와 AI시대와 문명충돌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새 지구문화의 기준, 새 패러다임 인 것이다(『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지난 10년간 매일 촬영한 위성 이미지를 분석하여 만든 지구의 야경. 2026년 4월 8일 공개. 2026.4.8. 로이터 연합뉴스
새로운 문명의 담론: ‘모심’과 ‘님’의 윤리
김지하에 따르면, 원형과 패러다임은 실천으로, 과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담론(discourse)이다. 김지하는 새로운 인문학적 담론의 뼈대가 동학의 본주문(本呪文)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에 담겨있다고 믿었다. 수운 최제우가 이 주문 안에 모심 과 살림 과 생명학·우주생명학 의 연찬 및 창조와 실천의 전 과정을 압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발명’되어야 한다(『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먼저 ‘모심’에 대해 생각해 보자. 김지하에 따르면, ‘모심’은 기독교의 ‘섬김’이나 성리학의 ‘공경’과 결이 다르다. 김지하가 ‘태극-궁궁’을 ‘궁궁-태극’으로 뒤집어 재발명했듯이, 동학의 한계를 적시하며 새로운 윤리의 창조를 강조한다(『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김지하는 수운 최제우의 ‘모심(侍天主)’을 재해석하고 재발명한다. 성리학과 최시형의 ‘경(敬)’ 사상은 후천개벽 여명기의 시대적 한계라는 것이다. 김지하는 단호하게 주장한다. (수직적인) 섬김만으로는 창조와 진화의 동력이 가동되지 않는다.” 김지하에게 그것은 매우 고귀하지만, 명백하게 한계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조금 옛 시절의 종교요 윤리이니 존중은 하지만 의지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또한 감각적 관조에 의해 자기 나름의 독특한 깨달음에 도달해야 하는 카오스 민중의 신체학적 미학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523-524).
그렇다면, 무엇을 모신다는 것인가? 어떻게 모신다는 것인가? 다시, 수운의 주문 해설을 뒤따라가 보자. ‘시(侍, 모심)’ 다음 글자는 ‘천(天)’이다. 그런데, 익히 알려져 있듯이, 수운 최제우는 21자 주문을 해설하면서 ‘천(天)’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노 코멘트’다. 신은 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어라고 언급을 하는 순간,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는 역설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영성’도 ‘공’도 ‘허’, ‘도’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시천주(侍天主)란 다시 말해, ‘허공을 모심’이다. 역설이다.
모심은 존재와 인식과 관계의 비밀이며, 생명과 신의 수수께끼다. 모시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생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모심이다. 무엇을 모심인가? 허공을 모심이다. 그러나 바로 이 허공의 모심이 일체 창조와 가치의 핵인 것이다. 허공은 때로 생명으로, 신으로, 부처로, 타자(他者)로, 연인으로, 부모와 자식과 인류와 뭇 민중으로 바뀌지만 그 중심에 살아 있는 무(無), 즉 허공에 대한 모심으로서만이 사람들이 그 근거를 얻는 듯하다. 따라서 참된 존재론도 참된 인식론도, 그리고 이제부터 시작될 진정한 관계론, 공경과 우애의 네트워크도 모두 그 근거로서 허공에의 모심 을 파악, 실천해야만 되는 것 아닐까?”(『김지하전집』 ‘머리글’. 강조는 필자)
‘천(天)’은 ‘비구별’과 ‘미결정’의 근원적 잠재성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시천주 사상은 공허를 자각할 수 있는 인간 및 뭇 생명의 영성적 능력을 상징한다. 수운의 하늘님(天)은 ‘불택선악(不擇善惡)’의 하늘님이다(『동경대전』, 『용담유사』). ‘선/악’을 결정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성인(聖人)’이다(해월법설). 그러나, 만인성인(萬人聖人)의 시대, 만인군자의 시대, 선/악(善/惡)과 시/비(是/非)를 결정하는 것은 이제 ‘민중들’이다. 하늘로부터 구별의 능력을 품부(稟賦) 받아 그것을 갈고닦은 보통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성취와 어려움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최제우는 자신이 ‘노 코멘트’한 그분을 ‘님(主)’이라 불러 존칭한다(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 역설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님’과의 거리이다. ‘님’과의 관계 방식이다. ‘과한 밀착’도 ‘지나친 거리’도 문제가 된다. 개인의 권리를 절대시하는 ‘자유주의’와 집단성을 강조하는 ‘공동체주의’가 동시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김지하의 모심과 님에 대한 사유는 그 ‘사이 너머’ 새로운 무엇을 상상하게 만든다. 수평적이면서도 수직적이며, 수평적이지도 않고 수직적이지도 않은 ‘비스듬한’ 관계 어딘가에 답이 있는지도 모른다. (※김지하는 중국의 네 괘상이 정방(正方)에 똑바로 서 있는 데 비해, 태극기의 네 괘상이 동서남북 간방(間方)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는 점에 유의한다.)
”‘모심’은 수운 계시의 핵심이요 첫째 조건이다. 더욱이 생태학적 ‘적정 거리’와 ‘틈’을 전제하여 부모와 같은 모든 인간, 모든 생명, 모든 물건, 모든 사태, 심지어 욕망과 한(恨)과 콤플렉스와 증오심 안에서마저 살아 생동하는 ‘님’이면서 수평적인 친구(同事)로 창조적 진화에 동역하는 윤리와 삶의 관계로, 과학적 동력으로 변화하는 곳에 참다운 모심의 위대함이 있다.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524. 강조는 필자)
2026년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이제 대답은 우리의 몫이다. 김지하는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을 제시했지만, 이란전쟁과 AI의 폭주와 트럼피즘의 득세 등 직면한 현실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류사적 대전환기라는 통찰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당장 발등의 불도 꺼야 할 형편인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면 ’문명 전환‘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전환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다음 문명‘을 살고 있다. 그래서, 빅카오스다. 나의 신체에도 내가 활동하며 생활하고 있는 전북과 순천에도 전환 문명들이 제멋대로 이미 자라나고 있다. 이미 제각각의 다음 문명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자신들만의 이름과 언어가 필요하다. 생태문명도 좋고, 생명문명도 좋다. ’또 다른‘ 이름의 문명 담론도 좋다. 생명문명이든 생태문명이든 ’자기기술(self-description)‘과 ’자기 서사(self-narrative)‘가 절실하다. 일론 머스크와 초거대 AI기업들의 문명적 비전과 우주적 서사에 맞서 우리의 꿈과 서사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무기는 자본과 기술이 될 수 없다. 그럴 능력이 없다. 우리의 무기는 섬세한 감각의 몸과 우주적 마음과 살가운 환대와 미소, 뭇 생명과 우주만물과의 연결감이다. 자신만의 구라와 스토리와 서사와 새로운 의미론이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의 제목처럼, 오늘 ”우리는 모두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이 또한 ’준거 상실 시대‘의 중후군 중 하나이다. 사실 우리는 늘 자신의 내재적 가치를 살려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 왔다. 김지하의 생명학은 목적론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절대적 기준이나 가치가 따로 있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준거와 의미세계를 발명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개벽시대의 숨은 뜻이다. ‘영성적 생명’에 대한 자각을 기초해 (‘더 나은’ 삶이 아니라) ‘또 다른’ 삶과 세계를 창조하는 활동이 곧 다시개벽시대의 생명운동이다. 활생·활명(活生·活命)의 살림운동이다.
김지하의 ‘청년 사랑’을 떠올린다. 김지하는 화엄개벽의 아방가르드로 이제껏 꼬래비 였던 이들, 즉 미성년과 여성과 비정규직 등 ‘쓸쓸한 대중’을 지목했다. 그리고는 특별히, ”아무도 알아주지도 읽어주지도 않는 괴상하고 캄캄한 병든 시 구절을 끄적거리고 있는 그 버림받은 아이들 , PC방에 앉아서 하루종일 게임만 하는 청소년들을 다시개벽의 전위로 명시했다(『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김지하에게 청소년들은 기존 질서의 폭력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령한 센서들’이며, 기존의 질서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는 ‘선지자(先知者)들’인 것이다.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존 질서의 척도로 청년들을 단죄하는 그는 누구인가?
주요섭 (사)밝은마을 생명사상연구소 대표
하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빅카오스 시대, 우리의 대답은 ‘또 다른’ 삶과 세계를 꿈꾸기이다. ‘제 몸(自身)’의 우주성을 깨달아 제 방식으로 함께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세계, 어떤 패권에도 반대하는 다문명 세계, ‘생명의 여백과 타자를 고려하는 AI’를 발명하는 세계, 인간들과 뭇 생명과 기계들이 서로 돌보고 어우러지며 공동으로 구성하는 세계, ‘은둔 청년들’과 ‘은둔 노인들’이 손잡고 새 문명의 전위로 귀환하는 세계 ..... 그리고, 또 그리고 .....주요섭의 살림정치 lifeweb@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