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 맛이야! 광고 기획, 동물 사진작가 2막 박찬원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출판사 라의 눈 제공
국내 최초의 발효조미료는 1955년 대성공업사가 선보인 미미소 였다. 이듬해 동아화성공업㈜(현 대상)이 미원 을 출시했는데 사탕수수 원당을 미생물로 발효해 만든 MSG 기반 조미료였다. 미원은 1970년대 중반까지 20년 가까이 시장을 사실상 독점했다. 소비자들의 뇌리에는 자연스럽게 조미료=미원 이 각인됐다.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은 1963년 미풍 으로 도전장을 냈지만, 미원의 벽은 높기만 했다. 제일제당은 전략을 수정, 1972년부터 쇠고기, 생선, 양파 등 천연 원료를 혼합한 조미료 개발에 착수했다. 이렇게 나온 것이 1975년 11월 20일 출시된 다시다 다. 다시다는 쇠고기와 채소를 배합한 분말형 종합조미료다. 이 제품은 발효 중심 1세대에서 복합조미료 중심 2세대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다.
다시다가 영원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미원 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 것이 1980년대 중반 시작돼 1990년대 초까지 이어진 고향의 맛, 고향의 소리 캠페인 광고 시리즈였다. 제일제당은 기업 이름이나 제품의 이름과 효능을 설명하는 것보다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시골집 부엌, 장독대, 어머니의 손 같은 이미지를 반복 노출했다.
광고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집에서 먹던 그 맛 ,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국물 맛 을 쉽게 낼 수 있다는 점을 소비자에게 각인시켰다. 조미료의 편의성과 동시에 친근함을 드러내는 식이었다. 덕분에 다시다는 감칠맛을 더하는 가루 를 넘어 바쁜 일상에서도 고향의 손맛을 재현해 주는 양념으로 자리매김했다.
제일제당 마케팅실장으로 이 광고 시리즈를 기획하고 발주해 조미료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데 힘을 보탰으며, 퇴직한 뒤에는 동물 사진작가로 변신해 제2의 인생을 의미있게 보낸 박찬원(朴贊元) 전 코리아나화장품 사장이 지난 21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24일 경기 이천 대포리 선영에 안장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고인은 닭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강원 철원을 찾았다가 갑작스럽게 쓰러졌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어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한다.
1944년 11월 30일 태어난 고인은 서울상고와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기자의 꿈을 이루지 못한 뒤 1971년 제일제당에 입사했다. 마케팅실장과 생활화학사업본부장을 거쳐 삼성물산·삼성전자 전무, 삼성전자서비스 대표이사 부사장, 코리아나화장품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한국마케팅클럽회장, 아시아태평양마케팅포럼의 전신인 상공회의소 마케팅연구회 초대 회장, 성균관대 겸임 교수로도 활동했다.
고인은 저서 당신이 만들면 다릅니다 (2009)에 광고안을 결정하고 마무리할 무렵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박승순 팀장이 조심스럽게 팀원 중 한명인 신입사원이 맛을 (계절을 상징하는) 소리와 연결하면 어떠냐고 했다 고 말을 꺼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다시다 여름 소리 편 이었다 고 썼다.
여름에는 소리가 있습니다. 여름에는 맛이 있습니다 라는 멘트로 시작한 다시다 광고는 가을 소리 편 으로 이어지며 TV 광고 최초로 동시 녹음을 시도했다. 김혜자 씨가 새를 쫓으며 훠∼어∼이, 훠∼어∼이 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여기에 더한 것이 그래, 이 맛이야! 였다.
제일제당 광고 쇠고기 다시다 화면 갈무리
고인은 저서에서 사실 그래, 이 맛이야! 는 처음부터 콘티에 있던 멘트가 아니었다. 촬영 중 김씨가 보글보글 끓는 국을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보며 그래, 이 맛이야! 하면서 군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를 한 것을 반영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제품을 살렸다 고 적었다. 또 김씨가 제일제당 모델을 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2년 동안 공백 기간이 있었다. 다른 회사로 가지 않고 기다려줬다. (판매부장으로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마케팅실장으로 돌아오니) 마침 김씨가 S식품과 전속계약을 하려 한다 는 소문을 들었고, 병이 나서 서교동 한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씨를 찾아가 타사 이동을 만류하고 다시 계약했다 는 일화를 전했다.
조미료 생산에 뛰어든 지 15년 만에 시장 주도권을 장악한 제일제당은 고향의 맛 광고 시리즈를 1990년대까지 이어갔다. 국민배우 김혜자는 25년간 모델로 활동하며 한국 최장수 CF 모델로 기록됐다. 다시다는 1991년 51%의 시장점유율을 보인 이래 71.2%(1998년), 76.3%(1999년), 80%(2002년)로 꾸준한 상승세를 이어와 지금도 국내 시장 점유율을 지키고 있다.
게토레이 광고를 발주한 것도 고인이었다. 새로운 마케팅 조사 기법 도입, 광고 중계방송, 비교 광고 등 여러 시도를 했다. 삼성전자서비스 대표이사 시절에는 서비스정보 시스템을 만들고, 사이버 서비스센터를 개설했다.
박찬원의 두근두근 중 한 쪽. 남다른 편집이 눈을 확 붙든다. 출판사 라의 눈 제공
예순여덟 살 때 대학원에 들어가 사진을 배운 뒤 작가로 변신했다. 하나의 주제를 100일 동안 촬영한다 는 남다른 원칙을 세웠다. 쉬다가 다시 하는 기간을 더하면 실제로는 한 주제를 평균 2∼3년 걸려 찍었다. 대부도 염전에 빠져 죽은 하루살이를 시작으로 거미, 돼지, 말, 젖소 등을 촬영한 뒤 사람의 손과 발을 찍었다. 2022년 9월 젖소 사진만 모아서 이렇게, 아직도, 그러나 사진전을 열었다.
저서로 앞의 첫 책과 사진하는 태도가 틀렸어요 (2016), 꿀젖잠 (2016), 어떤 여행 (2017), 말은 말이 없다 (2018), 사진, 울림 떨림 (2022), 박찬원의 두근두근 (2026) 등 사진에세이집을 내놓았다. 아들 상우 씨는 하나의 일에 몰두하면 집중하는 게 남달랐고, 남과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봤다는 점에서 시각이 창의적이었고, 항상 기록하는 습관이 있으셨다 고 돌아봤다. 철원을 찾은 것도 새로운 사진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아들은 덧붙였다.
출판사 라의 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