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이스카우트라면 꼭 참여해야 하는 캠프가 있다. 정기적인 야영 대회인 캄포리. 단 한국에서 고3은 예외였다. 지상과제인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에게 야영을 요구할 순 없다. 그러나 김민기에게 고3은 특별한 학년이 아니었다. 1년에 한번뿐인 여름 야영 대회를 빠지면서까지 공부해야 할 게 없었고, 고3이라고 분주할 일도 없었다.
문제는 동해안에 예보된 태풍주의보였다. 야영지가 강원도 북평 해변이었기 때문이었다. 협회 임원진들은 예정대로 하자느니, 중단해야 한다느니 설왕설래했다. 결론은 강행이었다. 김민기는 ‘대장’으로 참가했다. 참가 학생 가운데 학년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었다.
1990년 겨레의 노래 공연때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김민기. 사진: 학전 제공
비바람 속에 진행되던 행사 중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태풍이 몰아쳐 파도가 야영지로 밀려왔고, 일부 텐트가 침수하기도 했다. 텐트에서 자던 대원들은 혼비백산, 피신해야 했다. 이튿날 인원을 점검해 보니 대원 한 사람이 비었다. 중학생 대원이었고, 그는 결국 주검으로 발견됐다.
캄포리의 강행을 결정했던 협회 임원진을 포함한 어른들은 뒤로 숨었다. 대원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려야 했는데, 이 일조차 협회는 학생들에게 떠넘겼다. 그 책임이 결국 대장이었던 김민기에게 돌아왔다.
비명에 간 학생은 훗날 한국 연극계에 새바람을 몰고 온 연출가 김석만의 동생이었다. 비보를 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김민기와 김석만은 대학 시절부터 세상 떠나는 날까지 민족문화 운동에 헌신하고, 극단 연우무대를 연극계의 기린아로 키우는 등 공연예술의 동반자로 지냈다.
슬픔과 자책속에서 태어난 노랫말 ‘친구’
북평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교통편은 열댓 시간이 걸리는 기차뿐이었다. 김민기는 그야말로 경황이 없었다. 아무것도, 무엇도 생각나지 않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소용돌이치는 자책 속에서 그저 하얀 물거품으로 밀려왔다가 부서져 사라지고 또 밀려오는 거센 파도를 차창 밖으로 넋 놓고 볼 따름이었다.
폭풍 주의보 속 하늘은 칠흑이었다. 집어등 하나 없는 바다 역시 칠흑이었다. 하얗게 일었다가 부서지는 물거품만 점멸할 뿐이었다. 문득 그 하얀 포말과 함께 그의 마음속에서 몇 가지 낱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친구’ ‘바다’ ‘하늘’ ‘비’ ‘바람’ ‘죽음’ ‘삶’…
기차는 삼척을 지나면서 백두대간 산악지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정처 없이 겉돌던 낱말들이 이리저리 짝을 지어 문장을 이루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 문장을 되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도리질했다. 어찌 누군가의 죽음을 시나 노래를 짓는 데 이용할 수 있을까? 그것도 비명에 간 새파란 후배의 죽음을.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2025년 11월 발매한 1971 김민기 복각 LP판 이미지. 사진: 학전 제공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문장은 더 또렷해지고, 문장은 선율을 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어도 소용이 없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요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1절)
처음 그를 압도했던 것은 슬픔과 자책이었다. 사랑하는 후배를 잃은 슬픔 그리고 선배로서 후배를 챙기지 못했다는 자책은 검푸른 파도처럼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문장이 선율을 타면서 슬픔과 자책의 감정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분노가 치밀었다. 어른들의 무책임 때문이었다. 그는 ‘협회 임원 그 새끼들(김민기의 표현이다)’과 당장이라도 한바탕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후배의 부모님을 찾아가는 열차 안에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3절)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가사를 읊조리면서 분노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달리는 기차 바퀴에 맞춰 한 번, 두 번 되뇌면서 멜로디도 정리됐다.
‘전설’의 시작이 되었던 노래 ‘친구’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우리 노래 역사에서 뚜렷한 이정표가 될 이 노래는 이후 오랫동안 책상 서랍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안으로 삭이는 데 익숙하고, 자신을 드러낼 줄 모르는 김민기는 감히 이 노래를 세상에 내보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남들 앞에서는 물론이고 혼자서도 부르지 못했다. 노래를 지은 것은 그 나름의 추모하는 방식이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자랑처럼 들려줄 수 있을까?
청개구리홀에서 첫 공연, 전설의 시작
‘친구’가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흐른 뒤였다. 1970년 가을 김민기가 명동 YWCA 청개구리 홀에 드나들 때였다. 그곳에서 진행을 맡고 있던 이백천과 옥신각신한 게 인연이 되어, 엉겁결에 이 노래를 청중 앞에서 불렀다. 동양방송 음악프로그램 피디였던 이백천은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대중음악 전문가였다. 통기타 사단의 대부로 불리던 이였다. 마침 그 자리에는 또 다른 포크 음악의 후원자 김진성 CBS 피디가 있었다. 그는 김민기의 노래를 듣고는 스튜디오로 불러, ‘친구’를 녹음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이 노래를 CBS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에 송출했다.
청개구리 홀에서 ‘친구’를 처음 노래하기 얼마 전이었다. 김민기는 청개구리 홀에서 알게 된 가수 송창식을 연습실로 찾아갔다. 그의 손에는 ‘친구’의 악보가 들려 있었다. 김민기가 건넨 악보를 보고 또 기타를 반주하며 노래하는 모습을 본 송창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가사는 물론이고 화성, 조성, 선율 그리고 노랫말이 완벽했다.
그 분야에선 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앞에 불쑥 나타나 한구석에서 기타를 뜯고 있는 그 ‘천재’는 그가 보기에 한국의 ‘밥 딜런’이었다.
내가 민기의 노래를 진작에 듣고 알았다면, 가수 노릇을 포기했을 겁니다.”
‘친구’를 듣고 감명받았던 또 다른 최고의 평론가 최경식은 그로부터 1년 뒤 김민기의 노래들을 모아 앨범 를 냈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서 최고의 명반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앨범이다.
‘친구’는 송창식이 인정했듯이 김민기의 천재성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당시 기타 연주에는 쓰지 않던 메이저 세븐이나 마이너 식스 같은 코드를 활용하고 있어, 웬만한 연주 실력이 아니면 제대로 연주하기 힘들었다. 또 각 절이 동일한 멜로디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소설의 기승전결 형식처럼 전개하고 발전하고 절정에 이르렀다가 파국에 이르는 유기적이고도 서사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클래식 작곡의 대가라도 창작하기 힘든 구성이었다.
2011년 학전 20주년 기념,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에 출연한 세시봉 공연모습. 사진 맨 오른쪽 객석에 앉아 있는 뒷것 김민기. 사진:학전 제공
학전 20주년 기념공연에서 동료이자 선배인 세시봉 멤버들의 공연 모습.. 왼쪽부터 송창식 이장희 윤형주 조영남 김세환. 뒷건 김민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위 사진과 비교하면 어디쯤에 앉아 있는 지 짐작할 수 있다. 사진: 학전 제공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것을 김민기 혼자서 배우고 창안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누나에게서 통기타를 선물 받았지만, 연주는 혼자서 터득해야 했다. 밖으로 나도는 걸 싫어했으니, 학원에 갈 리도 없었고, 그러니 기타 교본을 사서 배울 수도 없었다. 그가 보고 배운 것이라곤 누나의 피아노 악보뿐이었다. 김민기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등 건반악기 전공자들의 연습용 악보로 독학했다.
피아노는 두 손으로 치기 때문에 악보도 기본이 두 줄이다. 그러나 기타는 한 손으로 친다. 다른 손은 음을 잡아야 한다. 피아노 악보를 기타 교본으로 삼으려면 먼저 기타 악보로 편곡해야 한다. 두 줄의 악보를 한 줄로 축약해야 한다. 축약하면서 동시에 원곡에 근접해야 하는 만큼 주법이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됐다. 김민기는 혼자서 이 과정을 다 해결하고 익혔다.
훗날 그가 처음 청개구리 홀에서 기타를 칠 때 초보 가수 양희은은 물론 당대 경음악 최고 전문가인 최경식, 그리고 통기타 군단의 대부 이백천이 그의 주법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한국에서 통기타는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했던 송창식 윤형주 등이 혀를 내두른 그의 기타 연주 실력은 이렇게 순전히 독학으로 이룬 것이었다.
누나 피아노 악보로 연습을 했는데, 피아노 악보는 두 손이니까 악보가 두 줄이잖아요? 그런데 기타는 악보로 치면 한 줄밖에 안 돼요. 그래서 피아노 악보의 두 줄을 한 줄로 옮겨야 했죠. 일종의 편곡을 한 셈이죠.”
제가 특히 음악적으로 매료됐던 게 바흐였는데, 바흐의 두 줄짜리 피아노곡을 내 나름대로 편곡해 기타 악보로 바꿨죠. 무조건 ‘압축한다’라는 생각으로 시도했죠. 그런데 하다 보니 방법이 있더라고요. 그때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 나이라면 무엇이든 시도하고 시험할 수 있는 때잖아요. 하다 보니 이런저런 미묘한 화성들이 나오더라고요. 그런 데서 한국의 다른 기타리스트 혹은 밴드가 내지 못하는 화성을 내거나 배울 수 있었던 거죠.”
작곡도 마찬가지였다. 통기타를 받고부터, 그는 등하교 시간 저 혼자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대개는 기존의 노래가 아니라 새것이었다. 어느 날 하나의 새로운 멜로디가 떠올라 혼자서 흥얼거리는데,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더란다.
‘이것을 멜로디로 인정하게 되면 그것이 작곡 아닌가? 작곡이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인데….’ 그는 그게 마치 범죄라도 저지르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내가 창작을 해도 되나?’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새로운 노랫말이 떠오르고, 노랫말에 어울리는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었다.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친구’가 나오기 1년 전인 1967년 그가 지은 노래가 한 곡 있었다. 어디에 박아두었는지 악보를 찾을 수 없던 이 노래를, 20여 년이 흐른 뒤 그가 겨우 되살려낸 그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1. 비가 내리누나/나 혼자 가고프나/함께 어울려 간들 어떠하리/가세 산 너머로 비 개인 그곳에/저 군중들의 함성소리 들리쟎나.
2. 눈이 내리누나/나 혼자 가고프나/함께 어울려 간들 어떠하리/가세 산 너머로 눈 그친 그곳에/저 군중들의 함성 소리 들리잖나.
1967년 당시 시국 상황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 및 굴욕외교를 규탄하는 ‘6.3 항쟁’의 여진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김민기가 중2 때인 1964년 6·3항쟁 당시 경기고 선배들은 4·19혁명 때처럼 스크럼을 짜고 학교 밖으로 진출했다. 후배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았던 조영래, 김근태, 신동수 선배 등이 주동했던 시위였다. 당시 고3이었던 조영래는 한일회담 반대 경기고 시위대를 이끌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 시청 앞을 돌아 학교로 돌아왔다가 시위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정학당했다. 그런데도 조영래는 경기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기록을 남겼다. 전설 같은 경기고의 이런 학생운동 전통은 1972년 ‘유신’ 때까지 이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 버스킹, 고맙소, 친구”
‘친구’와 관련해선 이런 ‘따듯한’ 에피소드도 있다.
1972년 말이나 1973년 초, 한겨울이었다. 통행금지 시절이었다. 광화문에서 수유리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 케이티(한국통신, 그때는 체신부) 쪽으로 가려는데, 지하도 한쪽 구석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었다. 지나칠 수 없는 노래였다. ‘친구’였다. 자신의 노래가 거리에서 이렇게 불리는 것도 신기했다.
‘친구’라는 노래가 참 재미없는 노랜데, 거기에는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코드가 들어 있었어요. 메이저 세븐이나 마이너 식스 같은 코드가 그것이죠. 그런데 그분이 바로 이 두 코드를 놓치고 있더라고요.”
민기는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려, 그 곁으로 다가가 ‘기타를 잠깐 빌려달라’고 말했다. 악사는 선선히 기타를 내줬고, 민기는 그 옆에 서서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친구’를 불렀다. 지나가던 이들이 발걸음을 멈추거나 동전을 던지고 가기도 했다. 노래가 끝나자, 악사는 물었다. 조심스럽지만 단도직입이었다.
김민기 씨인가요?”
예.”
악사는 기타 연주와 노래를 듣고는 김민기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단박에 알았다. 악사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김민기를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더란다. 악사를 뒤에 둔 채 김민기가 어깨를 웅크리고 한국통신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할 때였다. 등 뒤로 이런 한 마디가 들렸다고 한다.
고맙소. 친구.”
그것은 김민기 생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버스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