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의 예수’ 주제가 주여… 민중가요의 전설로 [뉴스] 유신 전야,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탄생한 노래가 ‘주여, 이제는 여기에’다. 김지하의 지휘로 제작돼, 전국 가톨릭 교구를 순회하며 공연됐던 연극 를 여는 주제가다. 는 창작 사실주의 연극의 불모지에서 탄생해 1970년대 민중의 저항을 상징했던 연극이다. 그런데 그 명성은 오히려 주제곡 ‘주여, 이제는 여기에’에 힘입은 바 컸다.
공연은 박홍 당시 서강대 종교학과 강사(전 서강대 총장)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박홍은 1971년 김지하에게 가톨릭의 자기비판과 성찰을 담은 희곡을 지어달라고 주문했다. 당시 한국 천주교와 천주교인의 사회적 각성을 위해 추진하던 ‘가톨릭 문화운동’의 일환이었다.
연극 금관의 예수는 유신제하에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공연됐다. 사진은 1976년 일본에서 공연된 금관의 예수 공연장면.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캡처. 원본사진은 아사이그래프 12월 3일자 사진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 이후 청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박홍은 이른바 ‘종북 주사파 척결의 선봉장’이자, 민주화운동에 맞선 ‘꼴통 신부’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호기롭게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며 맞섰던 ‘운동권 종교인’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으로 1970년대 초 서강대 강사를 하면서, 가톨릭의 개혁을 추구하는 ‘크리스천 문화운동’을 제창했다. 가톨릭이 당대의 현실과 그 모순을 깨닫고, 시대의 고통에 동참하도록 한국 가톨릭의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이었다.
김지하는 임진택을 통해 문리대 연극반 출신의 이동진(당시 외교관)에게, 작품의 취지와 얼개를 설명하며 대본을 부탁했다. 얼개란 그가 1971년 창작한 희곡 의 변용이었다. 은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에서 ‘황금에 갇힌 왕자’의 모티브를 ‘구리에 갇힌 이순신’으로 바꿔 박정희의 위선과 기만을 풍자한 작품이었다. 박정희가 자신의 친일 전력을 호도하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에 이순신의 구리 동상을 세워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게 했다는 것이다.
이동진은 의 이순신을 예수로 변용해 시나리오를 개작했고, 김지하는 이동진의 원고를 받아 다시 그가 구상하던 취지와 무대 형식에 맞게 수정했다.
극에서 교회는 예수에게 가시면류관 대신 금관을 씌워 금과 권력에 대한 신도들의 숭배를 유도하고, 예수는 머리를 짓누르는 금관을 벗어버리려 한다. 예수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굶주린 문둥이와 거지는 금관을 벗겨내고, 경찰은 거지와 문둥이를 절도죄로 잡아 가둔다. 교회는 이들의 하소연을 외면한 채 이들이 처벌받는 걸 구경만 한다는 게 그 내용이다.
1976년 일본에서 공연한 금관의 예수 공연 관계자(왼쪽사진)과 공연장면.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캡처, 원본 사진은 아사이그래프에 실린 잡지 사진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예수를 황금과 권력에 눈먼 자로 만든 성직자와, 굶주리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교회의 위선을 폭로하고,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인간성을 짓밟는 세속 권력의 무도함을 까발린다. 아울러 헐벗고 내쫓기는 약자의 해방을 염원하는 민중적 예수상을 구현하려 했다.
‘두목’의 지휘에 따라 실무 작업을 총괄하다시피 했던 ‘한목’ 임진택은 가 무대에 올려지기까지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프레시안에 연재된 ‘임진택의 탈춤과 마당극 2’) 당시 ‘한목’은 대학 4년생으로 연극반 회장을 맡고 있었다.
원주의 김지하 선배가 긴급히 연극회 후배를 소집했다. 크리스천(가톨릭)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가톨릭 교구 순회공연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극에 노래가 필요하다며 특별히 김민기를 불러 앞장서도록 독려했다. 그리하여 외교관으로 재직 중이던 외교학과의 이동진 선배가 협력 작가로 나섰고, 서울대 미대 출신의 최종률 선배가 연출을 맡고, 김석만이 무대 감독, 예수 역은 유우근, 신부 역은 송지헌, 순경 역은 이상우 그리고 사장 역은 내가 맡았다. …이 파격적인 내용의 ‘유격(게릴라식) 공연’은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특히 김민기가 작곡한 주제곡(‘금관의 예수’)을 지켜본 이들은 크게 감동했다.”
연극은 원주 교구를 시작으로 수원, 대전, 광주, 대구, 부산 교구의 가톨릭회관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임진택에 따르면 순회공연을 마친 뒤 서강대학교에서 일본의 전위 극단 상황의 와 함께 공연됐다. 김지하는 ‘상황’의 연극을 보고 깨우친 바가 있어, 이후 마당을 폭넓게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암울했던 1970년대, 억눌리고 빼앗기고 숨죽이던 이들의 자유와 평화를 간구하는 기도였으며, 고단한 영혼을 위로하는 음유시였다. 1970년대 중반 한국 가톨릭이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섰을 때 이 노래는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성직자와 신도들 사이에서 찬송가로 불렸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여기에 우리와 함께…/ 우리와 함께하소서.”
연극 는 그 내용만 보면 사실 아무리 세상과 약자에 열린 교회라도 앞장서 소개하고 알리기 힘든 작품이었다. 1962~1965년 바티칸 2차 공의회를 거치며 가톨릭이 약자 곁으로 성큼 다가갔다고는 하지만, 교회(의 상층부)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이 작품에 호의적일 순 없었다. 무대까지 내주는 것은 기대하기 더 어려웠다. 첫 순회공연 장소가 서울이나 대구, 광주 등 한국 가톨릭 대교구청 성당이 아니라, 변두리 신설 교구인 원주 교구였던 건 이 때문이었다. 지학순 당시 원주 교구장은 박홍의 요청을 받고 주저하지 않고 원주 가톨릭센터를 첫 무대로 내줬다. 원주 교구에서 공연하고 난 뒤, 교계 안팎에서 호평이 잇따르자, 수원, 대전 교구에 이어 광주, 대구 대교구에서 공연할 수 있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김민기와 금관이 아닌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 사진출처: 유튜브 추영훈 화면 캡쳐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여러 곳에서 공연 요청이 더 있었지만, 상징적으로 의왕시(당시 시흥)의 가톨릭이 운영하는 나환자촌 ‘성라자로 마을’에서 한 번 더 하는 것으로 대신했고,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순회공연의 대미를 장식했다.
는 현실 비판적이기도 했지만, 예언적이기도 했다. 약자와는 여전히 담을 쌓고 있고, 타락과 부정의 유혹에 약한 교회의 생리를 풍자했다는 점에서는 현실 비판적이었다. 당시 기독교는 가톨릭의 노동청년회나 개신교의 산업선교회 등 산하 일부 조직이 사회적 모순에 주목하고, 이를 극복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지학순 주교, 박형규‧강원룡 목사 등 소수를 제외하고 주류 기독교는 여전히 돈과 권력, 가진 자들의 카르텔에 심리적 안식을 제공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렇다고 내놓고 권력과 유착하지는 않았다. 워낙 군사정권의 인권유린과 폭압이 심했던 터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 특히 대형 교회의 행태는 가 우려했던 모습과 일치한다. ‘가시면류관의 예수’는 없고 ‘돈과 권력의 금관을 쓴 예수’를 숭배하는 교회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는 예언적이었다.
연극 의 성가도 높았지만, 김지하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인정했듯이 노래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끼친 영향력은 더 컸다. 연극은 일회적으로 끝났지만, 노래는 언제 어디서고 재생할 수 있었고 부르고 또 부를 수 있었다. 연극 공연은 시간과 노력과 재원이 필요했지만, 노래는 공기처럼 마음껏 소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생명력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부를 노래가 마땅치 않았던 시위 현장이나 집회에서 ‘금관의 예수’는 어떤 구호, 어떤 연설, 어떤 이벤트보다 참여자들의 각성을 유도하고, 마음을 더 강하게 하나로 모아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로마의 압제, 로마 권력을 등에 업은 대리인들의 학정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기득권자들의 수탈에 맞서 싸운 예수, 그 가진 자들의 철옹성 같은 카르텔을 엎어버리고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천국’을 이 땅에 구현하겠다는 혁명가, 그리하여 가난하고 억눌리고 빼앗기는 이들을 해방하겠다는 메시아를 ‘이곳으로’ 간절히 부르는 노래였으니, 당시 민주주의에 목마른 이들, 헐벗고 주린 이들이 광장이건 골방이건, 혹은 의를 위해 핍박받는 교회에서 부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영혼의 노래는 없었다.
노래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고, 어둠이 깊은 곳에서는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지금까지 민중가요의 고전으로 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김민기가 ‘시대의 전설’로 부상하는 데 기여한 것도 ‘주여, 이제는 여기에’였다. 이 노래 탄생을 둘러싸고 그동안 세상에 전해져온 ‘신화’가 그 좋은 증거다. 첫 공연이 열린 가톨릭 원주 교구로 가는 버스 안에서 김민기가 노랫말을 정리하고 거기에 멜로디까지 입혀 작곡을 끝냈다는 내용의 신화가 그것이다. 구전이건 책이건 정설로 되어 있는 이야기다.
김민기가 직접 부른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1993년 김민기의 전집 3에 실려있다. 김민기가 오선지에 적은 제목은 금관의 예수였다고 한다. 사진은 김민기 전집 3 앨범 표지.
그러나 실제는 조금 다르다. 졸지에 ‘소품조’로 참가하게 된 고영수의 이야기다. 전유성과 함께 한국판 개그의 원조이자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그 고영수다.
그가 기독교방송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 ‘밤과 음악 사이에’를 진행할 때였다. 한밤중에 김민기가 방송사로 찾아왔다. 종로1가에 있던 그의 집에서 자야겠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연극 주제가 작곡을 맡았고, 바로 다음 날이 원주에서 첫 공연이 있으며, 아침 6시에 종각에서 지하 형과 만나 노래를 줘야 하는데 곡을 짓지 않았으니, 고영수 집에서 기숙하면서 노래를 짓고 새벽 일찍 나가 건네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민기의 집은 우이동이어서 ‘동가식서가숙’ 하는 날이 많았다. 김민기는 그날 새벽 3시쯤에 작곡을 끝내고 6시에 김지하를 만나 악보를 전해줬다는 게 고영수가 유투브 방송 ‘송승환의 원더풀라이프’에 출연해 한 이야기였다.
고영수도 새벽에 김민기를 따라나섰다가 김지하에게 ‘소품조’로 찍혀 공연단에 포함됐다. 애초 계획은 녹음된 음악을 틀기로 했는데, 작곡이 늦어져 녹음테이프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김민기가 직접 부르기로 했는데, 공연장에 마이크가 한 대밖에 없어 김민기가 노래하는 동안 마이크를 잡고, 반주할 때는 기타에, 노래할 때는 김민기의 입 가까이에 마이크를 대주는 역할을 하기로 한 것이다. 김민기는 ‘조명조’로 동행했다.
따라서 ‘주여, 이제는 여기에’는 고영수의 집에서 작곡됐다. 원주로 가는 버스에서 지어졌다는 ‘신화’는 김민기가 짓기만 했지, 한번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한 이 노래를 제 기타 반주에 맞춰 연습도 하고, 모난 부분을 다듬던 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상상력이 빚어냈다고 보는 게 온당할 것 같다. 김민기가 작곡한 오선지에 적힌 제목은 연극과 같은 ‘금관의 예수’였다.
여하튼 김민기는 뜻하지 않게 이 노래를 통해 비로소 ‘민중’을 제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노동자, 농민, 거지 문둥이, 창녀들의 고통으로 들어갔다. 구분하고, 나누고, 따돌리고 억압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던 그였지만, 민중의 맞은편에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경찰(정치 권력) 악덕 업주(경제 권력)와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며 기회만 엿보는 대학생(엘리트)과 신부(교회 권력)가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래 ‘금관의 예수’가 학생들 사이에서 불리면 불릴수록 김민기는 난처해졌다. ‘메시아’의 출현 소문에 헤롯의 눈이 뒤집힌 것처럼,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메시아를 간절히 찾는 노래가 그렇게 많이 불리고 있으니, 박정희와 그 아전들로서는 속이 터질 만도 했다. 김민기가 1974년 카투사로 입대했다가, 최전방 부대로 전출당한 것이, 웬만한 ‘유신 철폐’ ‘박정희 퇴진’ 시위에서 바로 이 노래가 불렸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연극 는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 후 4년 뒤에야, 그것도 나라 밖에서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1976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의 가와사키, 요코하마, 도쿄 등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작가의 한 사람이자 제작 연출을 맡았던 김지하는 감옥에 있었고, 작곡자인 김민기는 최전방에서 빡빡 기고 있을 때였다.
김지하는 한동안 연극 의 저작권 시비로 몸살을 앓았다. 이 작품의 소비자들은 열이면 열 원작자가 김지하인 것으로 알았다. ‘협력 작가’로 이름을 올렸고, 초고를 쓴 외교관 출신의 작가 이동진으로서는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이동진이 소송을 제기했고, 유치진 등 원로 극작가들이 중재에 나서고 나서야 해결됐다. 원작자는 이동진이되, 김지하 대본의 독창성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김지하는 그 전말을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정리해 올렸다.
가톨릭 문화운동에 찬성하는 신부님들, 신학자들과 김민기, 이상우, 김석만 등이 어울린 한 연극이 되었으니, 가 바로 그것이다. 가톨릭 쪽의 사람 이동진이 이미 플롯을 세운 위에 내가 이전에 쓴 ,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를 끌어들여 대폭 뼈대를 수정한 것이고, 최종률과 우리 쪽 멤버들이 연습 과정에 대거 참여해 어렌인지를 과감하게 함으로써 거의 새 작품으로 되었다.” (회고록 165, 가톨릭문화운동과 민족문화운동)
노래 ‘금관의 예수’는 김지하가 개작한 연극 도입부에 나오는 시였으므로, 저작권 시비와는 무관했다. 이 노래는 1976년 ‘주여, 이제는 그곳에’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양희은의 앨범에 실렸다. 정규앨범에는 실리기 힘들었으니, ‘캐럴’ 테이프에 담겼다. 제목만 보면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니 캐럴로 봐주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공연윤리위원회는 영악했다. 공륜은 핵심에 해당하는 노랫말 ‘여기에’를 ‘그곳에’로 바꾸도록 집요하게 압박했다.
그리하여 가사의 첫 부분 ‘얼어붙은 이 거리’도 ‘저 거리’로 수정해야 했고, ‘가난과 곤욕의 이 거리’는 ‘가난과 곤욕의 북녘땅’으로 뒤집어 버려야 했다. 서너 글자만 바꿔 얼어붙은 땅을 남쪽이 아니라 북한으로 만들어 버렸고, 지금 여기 권력을 비판하는 노래를 박정희 정권 보위 건전가요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극악을 떨어도, 부르는 이들은 ‘이곳, 이 거리’로 불렀으니, 그게 무슨 소용일까.
원곡 그대로 1978년 일본에서 발매된 노래 금관의 예수 앨범 표지사진
원곡 그대로 ‘주여, 이제는 여기에’로 실린 음반이 나온 것은 1978년 일본에서였다. 유신 정변 이후 일본에서 결성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가 ‘지하 저항의 노래’라는 부제가 달린 엘피판을 비공식적으로 발매했다. 이 판에는 모두 16곡이 실렸는데, 3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김민기의 노래였다. 한때 경매 사이트에서 560만 원에 낙찰됐던, 전설적인 희귀 음반이다. 1978년 일본의 여가수 나카야마 치나츠는 ‘금관의 예수’와 ‘서울로 가는 길’을 리메이크하여 싱글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노래 ‘주여, 이제는 그곳에’가 정권의 질곡에서 벗어난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였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주교회의나 교구에서 내는 청년 성가집이나 복음 성가집에 ‘금관의 예수’라는 제목으로 수록했다. 성가 수준의 대접을 한 것인데 사순절 때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군인 성가에도 실린 적이 있다. 김민기가 직접 부른 노래는 1993년 발매한 에 실려 있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