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다 살아난 사람에게 내려놓으라”는 반인륜 정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본 후 기자들과 문답을 진행하던 중 왼쪽 목 부위에 습격을 당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2024.01. 02 연합뉴스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사실상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는 언론 인터뷰를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살인미수 테러를 당하고 회복하고 있는 과정에 있는 이 대표에게 이러한 발언이 적절했는지 비판이 대두된다. 정 전 총리뿐 아니라 여러 정치인이 사경을 헤매던 이재명 대표에게 ‘비수를 꽂는’ 말을 쏟아내고 있다.
정세균 전 총리는 지난 9일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강희철 논설위원과의 인터뷰에서 “이 대표에게 ‘대표직 빨리 내려놔라’ 그런 취지의 말씀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때(지난해 12월 28일 회동)는 그런 취지가 포함된 것인데, (피습 이후인) 지금은 심한 얘기를 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은 아니다”고 밝혔다. 이에 강 논설위원이 “만약 이 대표가 처한 상황에 본인이 있다고 가정하면?”이라고 재차 질문하자 “결단했을 거다. 여러 가지, 종합적으로 봐 큰 변화가 필요했다. 이 대표 본인에게는 똑 부러지게 얘기했다. 대화하고 나서 발표한 내용보다 명확하게 얘기했다”고 밝혔다.
정 전 총리가 우회적으로 완곡하게 사실상 이재명 대표에 대한 사퇴 요구 발언을 한 것이다. 정 전 총리는 민주당의 문제에 대해 “개인도 문제가 있지만, 민주당 리더들 그리고 당원들까지 다 책임이 있다”면서 “대선 이후, 아니면 총선에서 뜻하지 않은 대승 이후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을 하고 국민 지지를 받는 멋진 정당으로 나아가는데 부족함이 매우 많았다”고 밝혔다. 이어 “당 전체의 문제라고 본다”면서 “물론 가장 책임이 큰 건 당 대표”라고 말했다.
총선 공천에 대해 정 전 총리는 “이번에 공천을 잘해야 한다”면서 “잘못하면 의외의 선거 결과가 나온다”고 밝혔다. 이어 “저쪽(여당)은 민생, 외교, 안보 다 어렵고, 대통령 지지율도 형편없다”면서 “그러니까 어떻게든 혁신하고 변한 모습을 보이려고 다양한 노력을 하는 데 반해, 민주당은 그런 게 안 보인다. 그래서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 전 총리는 또 “‘만약 민주당에 분열이 일어나면 그건 당 대표인 당신 책임이고 그것을 감당하고 치유해야 할 책임도 대표가 지는 거다’라고 얘기했다”고 밝혔다.
정 전 총리의 주장은 총선 시기 비주류가 주로 사용하는 ‘레토릭’과 유사하다. “혁신 공천 없이는 총선 승리 없다”, “현 대표 체제로서 총선 승리는 요원하다”, “저쪽은 저렇게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 등이 대표적인 '비주류'의 레토릭이다. 일반적으로 비주류의 ‘혁신 공천’ 주장은 지분 보장 요구로 들리기도 한다. 대표가 주류 인사의 공천을 양보하고 비주류에게도 자리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28일 서울 종로구의 한 음식점에서 오찬 회동을 하고 있다. 2023.12.28 [국회사진기자단]. 연합뉴스
현 대표가 자기 사람들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선거 승리가 요원하다는 ‘반협박성’ 발언도 곁들인다. 특히 비주류가 공천에서 요구가 관철되지 않아 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을 당 대표에게 돌린다는 특성도 있다. ‘원칙과상식’ 소속 의원들이 ‘통합비대위’를 요구한 것도 어디서 많이 들어본 레토릭이다.
정 전 총리는 2015년에도 사실상 문재인 당시 대표의 퇴진을 요구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2015년 9월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에 출연해 “전당대회에서 한 번 선출된 당 대표를 툭하면 흠집 내고 흔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게 저의 일관된 생각이지만 문 대표가 총선이나 대선 전망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문제”라면서 “결국 문 대표의 결단이 문제를 푸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비주류 탈당 사태에 대해 현 대표의 책임을 묻는 것과 관련, 소위 ‘3총리’의 일원인 김부겸 전 총리도 유사한 발언을 한 바 있다. 김부겸 당시 의원은 2015년 12월 안철수 전 대표의 탈당이 유력시되는 상황에서 성명을 내고 “안철수 전 대표를 보냈다고 ‘문재인당’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쉽게 ‘혁신’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이 분열의 상황을 얼버무리고 책임을 피하려 해서도 안 된다”면서 “당의 분열을 치유하고 함께 갈 수 있는 통합의 분위기는 누구보다 문 대표가 먼저 만들어야 한다. 서로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국민 앞에 대통합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전 총리의 이 입장은 사실상 문재인 당시 대표 사퇴 요구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비주류의 발언은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 상시적 소통을 통해 당의 발전을 위한 집단 지성을 발휘해야 한다. 또한 의정활동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의원이 비주류 계파에 소속됐다고 해서 그 이유만으로 공천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 합리적 소통과 시스템 공천을 통해 건전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당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
문제는 이재명 대표가 살인미수 테러를 당한 이 시점에 심신이 지친 이 대표를 압박해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는 움직임이다. 정 전 총리의 이번 한겨레신문 인터뷰는 당내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는다. 아무리 정치가 비정하다지만 이는 ‘반인륜적’ 처사다. 죽다 살아나 심신이 지친 사람에게 “네 몫을 내려놓고 내 몫은 내놓으라”고 집단적으로 압박하는 것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바람직한 정치 행태가 아니다.
이들이 동료 정치인인 이 대표의 살인미수 테러에 대해 계파를 떠나서 진심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진심으로 슬퍼한다면 지금과 같은 ‘반협박성’ 행태가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김한규 의원이 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제주4.3특별법 전부 개정 1주년 기념 제주4.3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3.1.17. 연합뉴스
실제 정 전 총리 발언 이후 김한규 민주당 의원은 이재명 대표를 향해 “당해 봤으니 느꼈을 것”이라는 취지로 발언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김 의원은 11일 채널A 라디오쇼 ‘정치시그널’에 출연해 “검투사 같은 느낌으로 콜로세움에 세워져 있는 검투사, 그것도 그냥 찌르면 안 되고 선혈이 낭자하게 찔러야 지지자들이 좋아하는 이런 정치 문화에 대해서 이재명 대표도 본인이 피해자가 되어 보니 한 번 더 느낀 게 있었을 것”이라면서 “더 나아가서 당 내부에도 그런 갈등들이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문제라는 의식도 한 번 더 이야기를 하셨으면 조금 더 공감을 얻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날카로운 칼로 목을 찔려 사경을 헤매던 사람에게 “당해 봤으니 느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당내 서열 관계나 연장자 논리 등을 다 떠나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발언이다. 계파 갈등 관계에서 나오는 상호 비판과 정치테러로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을 등치하는 인식 자체도 문제다.
‘원칙과상식’이 병상에 누워있는 이재명 대표에게 ‘최후통첩’을 보낸 것도 부적절했다. 조응천 의원은 9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나와 “이 대표에게 하루의 시간이 남았다”면서 “비록 병상에 누워 계시지만 당직자들 통해서 의사 표현은 가능하리라 본다”고 했다. 이어 ‘당초 연말까지 시한을 정해 통합비대위를 하자고 요청했고 지난 3일 최후통첩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지난 2일 이 대표가 불의의 피습을 당하는 바람에 최후통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탈당할 예정이었다면 그냥 하면 될 일이다. 살인 테러를 당해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에게 이러한 요구를 한다는 것은 정치를 떠나 인간적으로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렵다.
민주당 내에서는 이재명 대표 테러 이후 수면 아래 있던 ‘연동형 선거제’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실상 ‘병립형’으로 기우는 분위기 속에서 이 사태를 이용해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시도가 아닌지 우려스럽다.
비단 민주당뿐 아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1일 부산에서 열린 비대위 회의에서 ‘국회의원 금고형 이상 확정시 세비 반납’에 대해 민주당의 호응을 촉구했다. 여러 재판을 앞둔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루 전 퇴원했고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제1 야당 대표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는 제안이다.
문명사회에서 정치는 총, 칼을 들고 싸우는 야만적 패싸움을 규칙을 정한 말의 경쟁으로 바꾼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재명 대표를 향한 공격을 보면 ‘야만의 정치’를 떠오르게 한다. 검사 수십 명에게 먼지 털 듯 털리고 수백 차례 압수수색을 당하고, 급기야 날카로운 칼로 목의 급소를 찔리고 사경을 헤맸던 이재명 대표는 ”서로 죽이는 정치를 끝내자“고 제안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정치’, ‘최소한 짐승 같은 야만성은 보지 않는 정치’는 한국 사회에서 요원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