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일기장으로 세상을 바꾼 오토 프랑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토 하인리히 프랑크(1889~1980).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딸 안네 프랑크(1929~1945)는 누구나 안다. 안네의 일기 로 전 세계에 알려진 그 소녀 말이다.
1961년 오토 프랑크.(위키피디아)
평범한 아버지의 선택
오토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사업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에 참전했고, 전쟁 후 가족을 꾸리고 평범하게 살았다. 그런데 1933년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집권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조국을 위해 싸웠고 성실하게 세금 내며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너희는 국민이 아니다 라는 선언을 들었다. 마치 몇 십 년 일한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당신은 우리 직원이 아닙니다 라는 통보를 받은 것과 비슷했을까.
오토는 1933년 가족을 데리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1940년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했고, 1942년 7월 큰딸 마르고트(Margot Frank, 1926~1945)에게 노동수용소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쉰세 살의 오토는 회사 건물 뒤편 비밀공간에 가족을 숨겼다.
1942년 7월 6일부터 1944년 8월 4일까지, 무려 761일간 8명이 숨어 지냈다. 낮에는 발소리조차 내면 안 됐다. 하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게슈타포가 들이닥쳤다. 아직도 누가 밀고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돈 때문이었을까,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이웃의 생명을 몇 푼에 판 것이다.
오토 프랑크가 1977년 암스테르담에서 안네 프랑크 동상 제막식을 거행하고 있다.(위키피디아)
홀로 살아남은 사람
8명 중 생존자는 오토뿐이었다. 아내 에디트(Edith Frank, 1900~1945)는 1945년 1월 아우슈비츠에서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두 딸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이송돼 1945년 2월과 3월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수용소는 그로부터 몇 주 후인 4월 15일 해방됐다.
1945년 6월, 오토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쉰여섯 살 홀로 몸이었다. 그때 은신처를 도왔던 미프 히스(Miep Gies, 1909~2010)가 안네의 일기장을 건넸다. 오토는 읽으며 충격을 받았다. 아빠가 너를 몰랐구나. 딸이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는 것도, 그렇게 깊은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일기를 보고 처음 알았다.
오토는 갈림길에 섰다. 딸의 사적인 일기를 공개할 것인가. 요즘으로 치면 세상을 떠난 자녀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을 공개할지 고민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는 결단했다. 1947년 안네의 일기 가 출판됐다. 오토는 남은 인생을 딸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바쳤다.
1960년 오토는 안네 프랑크 재단을 설립했다. 비밀 은신처는 박물관이 됐고, 지금까지 연간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한다. 오토는 1980년 8월 19일, 아흔한 살로 세상을 떠났다.
오토 프랑크.(https://www.annefrank.ch/en/family/otto-frank)
한국에 던지는 질문들
그의 이야기가 오늘 한국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첫째, 밀고의 문화 다. 누군가 이웃을 밀고해서 프랑크 가족이 잡혔다. 결이 다르지만, 최근 한국 사회는 서로를 신고하는 문화가 강해졌다. 주차위반, 층간소음, 불법촬영 신고 등등. 정당한 신고도 많지만, 때로는 개인적 원한이나 보상금을 노린 경우도 섞인다. 194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유대인 한 명 밀고하면 포상금을 받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 포상금 시스템 안에 있는가?
둘째, 혐오와 배제의 언어 다. 나치는 하루아침에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았다. 먼저 언어로 시작했다. 저들은 다르다 , 저들이 일자리를 빼앗는다 . 한국은 어떤가? ○○충 , ○○녀 같은 혐오 표현이 일상화됐다. 특정 지역, 세대, 성별을 향한 증오발언이 인터넷을 가득 채운다.
셋째, 침묵하는 다수 의 책임이다. 프랑크 가족을 도운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못 본 척했다. 나도 먹고 살기 바쁜데 , 괜히 나섰다가 나만 다치면 어떡하지 . 최근 한국에서도 직장 내 괴롭힘을 보고도 모른 척하기, 지하철에서 누군가 성희롱당해도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기.
넷째, 기록의 힘 이다. 안네가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오토가 출판하지 않았다면? 홀로코스트는 그저 숫자로만 남았을지 모른다. 한국의 민주화도 마찬가지다. 1980년 광주를 기록한 사진들, 1987년 이한열(1966~1987)의 사진, 한홍구 교수의 반헌법 행위자 열전 ,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증언. 기록이 없었다면 진실은 묻혔을 것이다.
다섯째, 한 사람의 결단 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오토는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딸의 일기를 들고 세상과 싸웠다. 출판사들이 거절해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한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작은 목소리라도 계속 내는 사람.
젊은 시절의 오토 프랑크.(https://www.annefrank.ch/en/family/otto-frank)
교훈 배우지 못한 인류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국가의 적 으로 규정했다. 시민들에게 유대인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줬다. 지금 한국은? 뭐뭐 신고하면 포상금 . 물론 신고 내용은 다르다. 나치는 무고한 사람을 죽였고, 한국은 위법한 행위를 신고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얼개는 닮았다. 네 이웃을 감시하라. 신고하면 돈을 주겠다.
또 하나. 나치는 순수 혈통 을 강조했다. 21세기 한국에서도 순혈주의 같은 표현이 들린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향한 차별, 이주노동자를 향한 혐오. 인류는 80년 전 치명적 실수를 했지만, 교훈은 배우지 못한 것 같다.
노년의 오토 프랑크.(https://www.facebook.com/annefrankhouse/posts/on-this-day-in-1980-otto-frank-died-in-basel-at-the-age-of-91-the-news-of-his-de/798397976098755/)
오토가 남긴 질문
오토는 이렇게 말했다. 부모는 자녀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른다. 안네의 일기를 읽고서야 내 딸을 제대로 알았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아는가? 옆집 사람을, 동료를, 이웃을. 그들도 안네처럼 꿈이 있고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충 , ○○세대 , ○○진영 으로만 분류한다.
오토는 또 말했다. 증오에 증오로 맞서면 끝이 없다. 교육과 이해만이 답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온라인은 증오의 전쟁터가 됐고, 내 편 아니면 적 이라는 이분법이 지배한다.
오토 프랑크가 자신의 가족이 숨어지내던 회사건물 뒤편 비밀공간을 보여주고 있다.(https://www.gettyimages.co.uk/detail/news-photo/amsterdam-the-netherlands-mr-otto-frank-father-of-anne-news-photo/515546254?adppopup=true)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오토 프랑크의 이야기는 묻는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프랑크 가족을 숨겨준 미프 같은 사람? 밀고한 누군가 같은 사람? 못 본 척 지나친 다수 중 한 명?
한국은 지금 갈림길에 있다.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로 갈 것인가, 연대하는 사회로 갈 것인가. 오토는 91년 인생 중 후반 35년을 딸의 목소리를 전파하는 데 썼다. 복수하지 않았다. 증오하지 않았다. 대신 교육하고, 기억하게 하고, 경고했다.
그는 죽었지만, 딸의 일기는 70여 개 언어로 번역돼 7000만 부 이상 팔렸다. 한 아버지의 선택이 만든 기적이다. 우리도 할 수 있을까? 답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생전에 결혼식에 가고 있는 오토 프랑크 가족.(https://www.gettyimages.co.uk/detail/news-photo/german-jewish-refugees-otto-and-anne-frank-walk-among-news-photo/2407448?adppopup=tr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