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가 밀어준 대법관, 김형기… 주문대로 판결 [뉴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김형기(金炯琪, 1929~2023) 항목의 부제가 눈을 잡아끌었다.
보안사와 안기부가 가장 믿고 사랑한 정치판사.
믿고 사랑한. 이 표현이 섬뜩하다. 공안기관이 판사를 믿고 사랑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판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믿음 의 증거가 바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김형기를 대법원판사에 앉히기 위해 직접 공작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보며 한 가지 생각이 든다. 영국에서라면 국가정보기관이 대법원판사 인선에 개입하는 것은 즉각 의회 청문회와 독립조사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것이 수십 년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김형기(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29년 대구 출생, TK 엘리트 코스의 전형
김형기는 1929년 7월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 경복고등학교(22회)를 졸업하고 1954년 서울법대를 나왔다. 1955년 제7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그는 1960년 대구지법 판사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경복고 선배로는 훗날 대법원장이 되는 유태흥이 있었다. 이 선후배 관계가 나중에 김형기의 출세가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한국 TK 법조 엘리트 카르텔의 세계는 참으로 좁고, 끈끈하고, 서로를 잘 지켜준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체제에 봉사한 법관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조의 인물이 떠오른다. 소련의 바실리 울리흐(Vasily Ulrikh, 1889~1951)다.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 의장으로서 스탈린(1878~1953)의 대숙청 재판을 직접 주재했다. 결론은 이미 크렘린에서 정해져 있었다. 울리흐는 그 결론을 법의 언어로 번역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권력의 개였고 정치의 집행자였다.
동독의 에리히 밀케(Erich Mielke, 1907~2000)는 슈타지 수장으로서 판검사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이용해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김형기의 경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밀케는 협박으로 판사들을 움직였고, 안기부는 믿을 수 있는 판사를 미리 선발해 요직에 앉혔다는 것이다. 더 세련된 방식이었다.
바실리 울리흐(위키데이터)
1973년, 성경과 찬송가로 내란을 꾸민다고?
김형기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가장 황당한 장면 중 하나는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이다. 1973년 4월 남산에서 열린 부활절 예배에서 박형규 목사와 권호경 전도사 등이 플래카드와 유인물을 준비했다가 경찰에 제지됐다. 그런데 보안사(사령관 강창성)는 이를 방송국과 중앙청을 점령하려 한 내란예비음모 라고 주장하며 15명을 검거했다. 기소장의 내용은 가히 창작의 경지였다. 찬송가와 성경을 든 중년 부인들이 대열을 이루어 KBS를 점령하고 국회의사당을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그 거창한 계획의 자금은 박형규 목사가 권호경 전도사에게 준 10만 원이 전부였다.
공판에서 변호사 한승헌이 박형규 목사에게 성경과 찬송가로 내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묻자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마 플래카드를 잠깐 들었다가 경찰에 제지당했을 겁니다 라는 박형규의 답변에 방청석이 다시 웃었다. 심지어 검찰내부에서도 공소장을 읽다가 검사가 킥킥댔다 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재판장 김형기는 1973년 9월 25일 박형규와 권호경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검찰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이 사건의 항소심은 박정희(1917~1979)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인 1988년 5월에야 열려 피고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사건 발생 15년 만의 일이었다.
1973년 4월 22일 서울 남산야외음악당에서 열린 부활절연합예배(경향신문 포토뱅크)
울릉도 간첩단, 5명에게 사형, 3명은 실제로 죽었다
1974년 3월 중앙정보부는 10년 만에 최대의 간첩단 사건 이라며 울릉도·전북지역 시민 47명을 간첩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울릉도 사람들과 전북 사람들이 서로 만난 적도 없었는데, 별개의 두 사건을 하나의 거대 간첩단으로 묶어 과대포장한 것이었다.
1심 재판장 김형기는 1974년 7월 24일 전영관 등 5명에게 사형을, 3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법정최고형에 처함이 마땅하다 는 판결 이유를 밝혔다. 수사과정에 고문이 자행됐고 피의자들이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는 호소는 외면됐다.
전영관, 김용득, 전영봉은 1977년 12월 5일 사형이 집행됐다. 2012년 이후 진행된 재심에서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다. 2015년 대법원은 무죄를 확정했다. 사형이 집행된 지 38년이 지난 뒤였다. 죽은 사람은 되살아오지 않는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47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정권에서 만든 최대 조작간첩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안기부가 대법원 판사를 골랐다, 역사상 가장 노골적인 사법부 개입
김형기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의 대법원판사 임명과정이다. 1984년 당시 대법원에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송씨 일가 간첩단사건 이 세 번째 판결을 앞두고 있었다. 대법원이 두 차례나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는데 서울고법이 두 번 다 치받은, 이른바 핑퐁재판 이었다. 세 번째 대법원 판결에서 안기부는 반드시 유죄를 받아야 했다.
마침 대법원판사 자리가 하나 비었다. 안기부는 움직였다. 서열상 1위는 정기승이었다. 그러나 안기부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정책적인 사건을 누구보다도 잘해낼 것 이라는 이유로 김형기를 밀었다. 정기승의 약점은 과장하고, 경쟁자 박우동은 정책적 사건에 비협조적 이라며 배제했다.
공작은 성공했다. 1984년 7월 20일 김형기가 대법원판사에 임명됐다. 8월 3일 안기부 수사단장과 법률보좌관 정형근(1939~ )이 김형기의 집을 찾아가 유죄판결 유도 를 위한 자료를 전달했다. 구형 공판 전날인 8월 15일에는 안기부 수사단장과 과장, 법률보좌관, 검사 3명, 법원의 두 배석 판사가 함께 골프를 쳤다.
11월 27일 대법원 형사3부(주심 김형기)는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고 유죄를 확정했다. 안기부가 심혈을 기울여 선발하고, 집으로 찾아가 자료를 전달하고, 골프를 함께 친 판사가 주문대로 판결을 내린 것이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겨우 이것이… 안기부의 뜻에 따라 유죄판결을 내린 김형기가 입은 유일한 불이익이었다.
그 유일한 불이익 이란 대법관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한 채 퇴임한 것이었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받은 불이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형근(나무위키)
노태우 대통령 부부와 청와대 만찬, 친밀도 의 사법적 의미
김형기의 부인과 대통령 노태우(1932~2021)의 부인 김옥숙은 경북여고 동기동창으로 청와대에서 부부동반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이 친밀도가 1990년 대법원장 후보 거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대법원장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대법원판사 임기동안 재판한 간첩조작사건들은 모두 훗날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2023년 1월 31일 김형기는 94세로 사망했다. 울릉도 간첩단사건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실제로 처형된 세 명의 피해자가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것을 그는 살아서 보았을 것이다. 그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74년 3월 15일 울릉도 간첩단사건에 관한 경향신문 기사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국가정보기관이 특정 대법원판사 후보를 밀고, 그 판사의 집을 찾아가 사건자료를 전달하고, 전날 밤 골프를 함께 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의회 청문회, 독립조사, 해당 판사의 즉각 탄핵요구가 이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관의 책임자는 형사 기소를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 사실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보고서와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자연사했거나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안기부가 골프를 치며 판사에게 판결 방향을 알려주던 1984년의 한국을 떠올렸다. 사법부의 독립이 구조적으로 침해되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