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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연인, 거꾸로 선 세상, 샤갈이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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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혹시 하늘을 난 적 있습니까? 그림 속 인물들이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소가 바이올린을 켜고, 신랑 신부가 마을 위를 날고, 랍비는 거꾸로 서 있다. 보는 이가 어리둥절해서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화가는 빙긋 웃으며 말한다. 거꾸로 선 게 나요, 아니면 당신이요? 이 능글맞은 질문을 97년 동안 세상에 던진 사람이 바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이다.   1920년 경의 샤갈(위키피디아) 제정 러시아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난 경계인 1887년 7월 7일, 지금의 벨라루스 땅 비쳅스크(Vitebsk). 당시엔 러시아 제국의 변방이었다. 샤갈은 이 작은 유대인 공동체 마을에서 아홉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자하르 샤갈은 청어 절임공장 일꾼이었고, 어머니 페이가이타는 작은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다.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시대 러시아에서 곧 2등 시민 이라는 선고였다. 유대인은 특정지역 밖으로 이주가 제한됐고, 대학입학에도 별도 할당제가 있었으며, 언제든 추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샤갈은 이 굴레를 비극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 굴레를 그림 속 공중 부양으로 승화시켰다. 억눌린 자들이 하늘을 날 수 있다면, 그게 해방 아닌가.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올라가 미술을 공부했고, 1910년에는 파리로 건너갔다. 파리에서 그는 당대 최전위 화가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페르낭 레제(Fernand Léger, 1881~1955),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와 어울렸지만, 어느 사조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다. 입체주의도 아니고, 표현주의도 아니고, 초현실주의도 아니었다.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이 그를 초현실주의 선구자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샤갈은 정중히,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꿈을 꾸는 게 아니라 내 마을을 기억하는 겁니다.   마르크 샤갈의 어린 시절 집이 있던 벨라루스 비쳅스크. 현재는 마르크 샤갈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위키피디아) 혁명, 전쟁, 또 전쟁, 도망자의 생애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샤갈은 귀국길에 올랐다가 발이 묶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잠시 기회를 봤다. 새 소비에트 정부는 비쳅스크 예술학교 책임자로 그를 임명했다. 샤갈은 들떴다. 드디어 평등한 세상? 그러나 그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9~1935)가 학교를 장악하면서 샤갈은 밀려났다. 혁명도 결국 권력싸움이더라. 1922년 샤갈은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자 샤갈은 1941년 미국으로 탈출했다. 도망자 인생이 다시 시작됐다. 뉴욕에서 그는 아내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 1895~1944)를 잃었다. 벨라는 샤갈 그림 속 하늘을 함께 날던 평생의 연인이었다. 그녀가 죽자 샤갈은 몇 달간 붓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파업이었다. 1948년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로 돌아와 정착했다. 이후 그는 세계각지의 주요건물에 유리벽화(스테인드글라스)와 천장화를 남겼다. 파리 오페라 극장 천장화(1964년), 예루살렘 하다사 병원 유리 벽화(196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벽화(1966년) 등이 그것이다. 그는 1985년 3월 28일, 남프랑스 생폴드방스에서 97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용히.   샤갈, 1912년, 우유 한 스푼(라 쿠엘레 드 라).(위키피디아) 그림이 정치다, 샤갈의 사회적 울림 샤갈의 그림은 얼핏 동화 같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주 날카로운 것이 숨어 있다. 그의 대표작 「나와 마을」(1911년)을 보자. 화면 가득 초록얼굴의 남자와 염소가 마주 보고 있다. 집들은 거꾸로 서 있고, 낫 든 농부와 물동이 이고 가는 여자가 화면 곳곳에 뒤섞여 있다. 향수? 아니다. 이건 추방당한 자, 변방인, 뿌리 뽑힌 자의 기억이다. 고향을 잃어본 사람만이 고향을 이렇게 그릴 수 있다. 「백색 십자가형」(1938년)은 더 노골적이다. 예수가 유대인이 기도할 때 쓰이는 숄을 두르고 십자가에 달려 있다. 주변에는 나치돌격대원들, 불타는 회당, 도망치는 유대인들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38년 독일 크리스탈의 밤(Kristallnacht) 직후 그려졌다. 교황 프란치스코(Pope Francis, 1936~2016)가 2013년 이 그림을 직접 언급하며 난민 문제를 이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 장의 그림이 수십 년을 넘어 정치 발언이 된 것이다. 샤갈은 어떤 이념의 나팔수도 되길 거부했다. 소련도 싫고, 나치도 싫고, 미국 자본주의의 화려함도 그의 그림에는 없다. 그는 그저 자기 마을, 자기 사람들, 자기 사랑을 그렸다. 그런데 그게 가장 강한 저항이 됐다. 체제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 그게 때로는 가장 용감한 행동이다.   마르크 샤갈, 1911년, 나와 마을, 캔버스에 유채, 192.1 × 151.4 cm, 뉴욕 현대미술관(위키피디아) 오늘 한국, 샤갈에게 묻다 요즘 한국이 참 소란스럽다. 뉴스를 켜면 온 나라가 마치 법정드라마 같다. 이런 때 97년을 살아낸 한 화가의 삶이 뜻밖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첫째, 경계인의 자리가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샤갈은 러시아인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니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다. 어느 진영도 그를 완전히 자기편이라 하지 못했다. 지금 한국에서도 우리 편이냐 아니냐 를 묻는 목소리가 넘친다. 그러나 어느 편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면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결국 오래 남는다. 샤갈이 증명했다. 둘째, 고통을 꿈으로 번역하는 능력. 추방당하고, 전쟁을 겪고, 아내를 잃고도 샤갈은 붓을 놓지 않았다. 한국사회도 지금 집단적 피로와 상처 속에 있다. 분노는 필요하다. 그러나 분노만으로는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분노를 어떤 언어로 바꿀 것인가? 샤갈은 그 언어를 색과 형태로 찾았다. 셋째, 권력이 예술을 도구로 쓰려 할 때. 소련이 샤갈을 선전도구로 쓰려 했을 때 그는 거절했다. 지금 한국의 문화·예술 지원정책을 보면 여전히 쓸모 있는 예술 과 쓸모없는 예술 을 나누려는 관성이 있다. 블랙리스트는 특정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가가 밥줄 때문에 말을 바꾸는 순간, 샤갈의 하늘에서 연인들이 추락한다. 넷째, 뿌리를 잃어도 뿌리를 기억하는 방식. 샤갈은 평생 비쳅스크를 그렸다. 단 한 번도 돌아가지 못한 고향을. 그 고집이 그를 세계적 화가로 만들었다. 한국의 많은 예술가, 활동가, 언론인들이 지금 자기 뿌리를 부정당하거나 지우도록 압박받고 있다면, 샤갈의 방식을 기억할 만하다. 지우지 마라. 그리면 된다.   샤갈, 1912년, 칼보리(골고타), 캔버스에 유화, 174.6 × 192.4cm, 뉴욕 현대미술관. 대체 제목: [골고타. 십자가형. 그리스도께 헌정됨].(위키피디아) 거꾸로 선 세상을 사는 법 샤갈의 그림 속 인물들은 왜 하늘을 나는가? 땅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억압이 너무 무겁고, 가난이 너무 무겁고, 편견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그들은 날아오를 수밖에 없다. 2026년 봄, 한국도 꽤 무겁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하늘을 나는 법이 필요하다. 마이크를 잡거나, 붓을 들거나, 신발 끈을 조여 매거나, 저마다 방식은 다르겠지만. 샤갈은 죽기 직전까지 작업실에 있었다고 한다. 97세에도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인생이 뭔지 물어봤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아직 다 못 그렸거든요. 거꾸로 선 세상에서, 우리도 아직 다 못 그렸다.   마르크 샤갈, 1917년, 산책 , 캔버스에 유채, 170 × 163.5cm, 러시아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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