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넘치는데 화가는 없는 영국 바꾼 J. 레이놀즈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8세기 영국은 이상한 나라였다. 셰익스피어(1564~1616)는 이미 전 세계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는데, 정작 그림 쪽에서는 번듯한 화가 하나 나오지 않았다. 말과 글로는 세계를 정복했지만, 붓으로는 유럽의 변방 신세였다.
영국엔 시인은 넘치는데 화가는 없네?
프랑스와 이탈리아 화가들이 코웃음 칠만한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깬 사람이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 1723~1792)이다. 그는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한 손에는 붓을, 다른 손에는 사회적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들고 나타났다. 그 사다리를 기어오른 뒤에는, 아예 미술이라는 집 전체를 새로 지어버렸다.
레이놀즈 자화상, 1750년경.(위키피디아)
금수저의 출발선, 그러나 교양의 포장지 는 스스로 만들다
레이놀즈는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새뮤얼 레이놀즈(1685~1745)는 옥스퍼드 대학교를 나온 학교 교장이었다. 그 시절 화가라 하면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기술자 취급을 받았는데, 레이놀즈는 달랐다. 그는 그림보다 먼저 책 냄새를 맡고 자란 화가였다. 요즘 말로 하면 금수저 중의 금수저. 하지만 그는 단순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남지 않았다. 그는 고전 문학을 탐독하고, 철학자 행세를 하며 붓을 든 교양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1740년부터 1743년까지 런던의 초상화가 토머스 허드슨(1701~1779) 밑에서 그림을 배우고, 1749년부터 1752년까지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다. 그 시절 영국 화가들 대부분은 유학은커녕 제대로 된 물감을 살 돈도 없었으니, 그가 특권의 사다리를 탄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다리를 오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아예 그 사다리를 영국 미술의 표준 계단 으로 만들어버렸다.
레이놀즈 서명.(위키피디아)
초상화 한 점 값이 노동자 6년치 임금
1750년대 레이놀즈는 귀족 사회의 스타 화가가 됐다. 그가 그린 초상화 한 점 값은 1753년 48기니, 1759년 100기니, 1764년엔 150기니에 달했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대략 3000만 원에서 1억 원 사이다. 그때 평범한 남성 노동자의 주급은 10~15실링, 즉 0.5기니 남짓이었으니, 레이놀즈의 초상화 한 점은 노동자의 6년치, 여성 노동자라면 10년치 임금이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서민은 평생 일을 해야 갚을 수 있는 가격의 초상화 였다. 당시 영국사회의 양극화와 부익부 빈익빈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매일 붓을 들었다. 1년에 약 100점. 그가 그린 초상화 값만 따져도 연매출이 요즘 돈으로 수십억 원이었다. 귀족들의 허영심이 그를 억만장자로 만들어준 셈이다. 그림 한 점으로 인생 역전, 귀족도 감동한 미소 한 번에 노동자 6년치 월급! 그야말로 붓질로 계급을 초월한 남자였다.
레이눌즈 자화상, 약 24세.(위키피디아)
못생긴 귀족을 고대 조각상처럼! , 고상함의 기술자
그의 비결은 간단했다. 귀족들을 현실보다 더 고상하게, 더 위엄 있게 그려주었다. 그가 즐겨 쓴 웅대한 양식 은 사실상 미화의 기술이다. 얼굴의 주름은 은근히 눌러 그리고, 뱃살은 고대 로마 장군의 갑옷으로 감쌌다. 요즘말로 하면 뽀샵 이랄까! 말하자면 귀족의 허영심을 가장 품격 있게 포장한 화가였다. 하지만 그 고상함 은 단지 장식이 아니었다. 그는 미술을 단순한 사치품이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한 교양 활동으로 격상시켰다.
화가는 기술자가 아니라 사유하는 예술인이다.
그의 선언은 당시 영국 사회에서 신분상승의 신호탄과도 같았다.
1658년에 설립된 플림튼 올드 그래머 스쿨은 1664년에 설립되었으며, 아버지가 교장이었던 조슈아 레이놀즈가 다녔다.(위키피디아)
미술을 지적 활동으로 격상시킨 사나이
1768년 영국 왕립미술원이 창립되자 그는 초대 원장이 됐다. 1769년엔 조지 3세(1738~1820)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붓쟁이가 기사라니?
당시 사람들은 놀랐지만, 그 이후로 영국에서는 화가도 지식인 신분 이 됐다. 그는 미술원에서 강연을 했고, 그 내용은 훗날 《미술론》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그 책은 단순한 예술 이론서가 아니라, 화가라는 직업의 품격을 변호한 선언문이다. 그는 또 문학가 새뮤얼 존슨(1709~1784)과 교류하며 지식인 모임의 단골이 됐다. 그 덕에 레이놀즈는 붓 든 철학자, 그림 그리는 신사라는 새로운 인격을 세상에 내놓았다.
레이놀드의 그림, 금지된 성의 영역을 풀어주는 큐피드 (1788년). (위키피디아)
그러나 영광 뒤엔 그늘도
그의 집에는 흑인 하인이 있었다. 노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레이놀즈는 그를 그림 속에 그리기도 했다.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 화가였지만, 제국의 부와 노예제의 혜택을 고스란히 누린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붓끝에는 고상한 교양과 함께, 식민제국의 그림자도 묻어 있었다.
또한 그는 실험정신이 강해 역청을 그림 재료로 썼는데, 그게 나중에 화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림이 어두워지고 갈라졌다. 완벽을 추구한 결과, 오히려 그림이 망가진 셈이다.
완벽주의자의 욕심이 완벽을 망쳤다.
예술사의 한 아이러니다.
레이놀즈의 그림, 오두막집 사람들 , 1788년.(위키피디아)
한 화가가 바꾼 사회적 인식
레이놀즈는 1792년 2월 23일 런던 레스터 광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국가장으로 성 바오로 대성당에 안장됐다.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그는 우아한 미술의 찬사를 조국의 다른 영광에 더한 최초의 영국인 이라 추모했다. 과장이 아니었다. 레이놀즈 이전에 영국 미술은 이탈리아의 그림을 흉내 냈고, 네덜란드 풍경을 베꼈다. 그러나 그 이후, 영국은 독자적인 미술 전통을 세웠다. 그가 세운 왕립미술원은 지금도 영국 미술의 본산으로 남아 있다.
순수의 시대 (1788년경). 레이놀즈는 자신의 그림에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강조했다.(위키피디아)
붓 하나로 바꾼 문화의 지형도
레이놀즈는 금수저였고, 시대의 혜택을 받은 특권층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영국 미술을 귀족의 장식품 에서 국가의 자산 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의 초상화 한 점 값이 노동자 6~10년치 임금이었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극심한 계급 격차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예술이 사회적 권력으로 성장한 순간을 상징한다. 그의 그림은 귀족의 허영심을 그렸지만, 그 허영을 통해 영국 미술의 자존심을 세웠다. 결국 그는 붓 하나로 제국의 품격을 다시 그린 사람이다. 말하자면, 허영을 예술로, 계급을 문화로 포장한 영국판 교양의 장사꾼 이었다.
레이놀즈의 세인트 세실리아의 모습을 한 셰리던 부인 은 데번셔까지 와서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광경 으로 여겨졌다. 세상에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을 리 없고, 헬렌이나 클레오파트라도 그녀를 능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1775년).(위키피디아)
오늘의 시선으로 본다면
오늘날 레이놀즈는 노예제의 동조자 특권층의 대변자 로도 비판받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화가도 사회를 논할 수 있다 는 가능성을 열었다. 그의 붓은 권력의 얼굴을 그렸지만, 동시에 예술의 지위를 높였다. 그의 성공은 부와 학벌이 낳은 결과이면서도, 그가 그 틀 안에서 새로운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창조한 사례이기도 했다.
레이놀즈의 케펠 경 (1779년).(위키피디아)
붓 끝에 담긴 권력과 품격
레이놀즈는 단순히 초상화를 잘 그린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영국 사회에 예술은 지적 노동이며, 화가는 사유하는 인간이다 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귀족의 초상화 속 고상한 얼굴들은 사실 그 시대의 불평등을 반짝이는 금박으로 덮은 것이지만, 그의 붓질 덕분에 영국은 미술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올라섰다. 요컨대, 그는 귀족의 얼굴을 그리고, 나라의 품격을 새겼다. 붓으로 먹고 살았지만, 결국 붓으로 시대를 바꾼 사나이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재능 있는 금수저가 가장 무서운 이유는, 세상을 바꿀 만큼의 교양을 갖췄을 때다.
레이놀즈의 히스필드 경의 초상화 (1787년).(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