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토피아] ⑳선동 글에 숨은 행간의 의미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연재해. 이 삽화는 챗GPT-5로 제작했음.
[자연재해]
큰일 났어요!”
리본장어가 물살을 뚫고 허겁지겁 난파선으로 달려왔다. 단잠에 빠져있던 대왕오징어는 이 소리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곧 무시무시한 해일이 몰려올 거래요. 우리가 만든 산책로며, 저장고에 있는 먹이며, 백합상회 물건까지 다 휩쓸려 사라질 거래요!”
정신이 번쩍 든 대왕오징어는 난파선 위로 올라가 조류의 흐름을 살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문제없는 속도로 침착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냐?”
흰 수염고래님이요.”
대왕오징어는 코웃음을 쳤다.
흥, 간첩의 말을 믿고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게냐? 유언비어를 퍼뜨려 물살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려는 구닥다리 수법이렷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대왕오징어는 갯바위구 물풀동 파래 25번지를 향해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리본장어가 그 뒤를 헐레벌떡 쫓았다. 흰 수염고래는 그가 올 것을 알았다는 듯 ‘갯바위당’이 새겨진 장화 옆에서 대기 중이었다. 대왕오징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시마 라인에 서는 자신의 처지가 곤궁하다 해도 유언비어를 퍼뜨려서야 되겠습니까?”
무슨 얘긴지 모르겠군요. 전 그저 먼 곳에 사는 제 동료와 이야기를 주고받다 그 소식을 알게 되어 전달했을 따름입니다. 갑자기 동료가 트림을 하듯 끄어억, 하고 낮게 소리를 여러 번 깔더군요. 그건 자연재해가 일어날 거란 경고음입니다.”
갑자기 리본장어가 몸통이 배배 꼬이도록 크게 웃어재꼈다.
에이, 흰 수염고래님! 거짓말도 그럴 듯하게 해야죠. 아무리 크게 소리 지른다 하더라손 눈에 안 보이는 동료랑 이야길 나눈다는 게 말이 돼요?”
흰 수염고래는 비웃음일지 웃음일지 모를 미소로 응수했다.
고래의 초음파 파장은 물에서 속도가 빠르게 전파되기 때문에 먼 거리도 전달 가능합니다. 가스 탐사선의 해양소음 때문에 대화가 중단되긴 했지만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오더군요. 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먹이 저장고부터 가보시지요.”
흰 수염고래는 앞장서다 말고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대왕오징어가 농구공 같은 눈알을 부라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군주의 능력은 위기상황일 때 가장 빛을 발한다고 하더이다.”
흰 수염고래는 길을 터주며 말에 쐐기를 박았다. 대왕오징어의 먹물 주머니가 꿀렁거리던 그 때 물결이 앞뒤로 두서없이 흔들리더니 수면의 폭이 널뛰기하듯 오르내렸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쾅 하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바닷물이 한 쪽으로 화악 쏠렸다. 모든 물살이들이 속수무책으로 그 방향대로 밀려 떠내려갔다. 잠시 뒤 쓰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밀려나갔던 양보다 배로 몸집을 불린 파도가 인근의 항구까지 한 방에 덮쳤다. 갑작스런 지진해일에 대피하지 못한 물살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물살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완공을 앞두고 있던 산책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져 버렸고 백합상회도 흔적 없이 쓸려갔다. 먹이저장고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갯바위구 물풀동 파래 25번지에 심어진 파래와 난파선의 ∿ 미역 문양도 모조리 뽑혀져 버렸다. 꼬걸이와 비닐수레가 여기저기 부표처럼 떠다녔다. 이처럼 지진해일이 지나간 바다는 그야말로 무질서와 혼동 그 자체였다. 편평한 암석 밑에 몸을 숨기고 있던 리본 장어는 한참 뒤에야 패대기쳐진 [오션일보]를 세우기 위해 헤엄쳐 나왔다. 그 때 또 한 번 물결이 요동치는가 싶더니 타원형의 기다란 잠수함 하나가 굉음과 함께 난파선 옆으로 추락했다.
휴, 암컷도 못 돼보고 죽을 뻔 했네.”
일촉즉발의 위기로부터 벗어난 리본장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실실 웃음을 흘렸다.
모든 일엔 일장일단이 있는 법. 대선을 앞둔 이 시점에서 지진해일이 호재로 작용할 것 같은데? 모든 현상은 해석하기 나름!”
리본장어는 곧바로 [오션일보]에 장문의 글을 게재해 나갔다. 칼럼 형식을 띤 그것은 지진해일의 여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뻗어나갔다.
-고래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알이 아닌 ‘새끼’를 낳는가 하면 인간처럼 ‘자궁’에서 새끼를 키웁니다. 임신 기간이 ‘10개월’인 것도, 한 번에 ‘한두’ 마리의 새끼를 낳는 것도, 심지어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것도 인간과 같습니다. 아가미가 없어서 바다 위로 올라가 ‘숨을 쉬는 것’은 가장 기이해 보입니다. 비늘이 돋아야 할 자리에 ‘털’이 돋아난 고래가 바다 위에서 인간과 어떤 내통을 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번 지진해일이 일어나기 전, 흰 수염고래는 가스탐사선의 해양 소음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소음을 들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포유류와 인간 사이에 어떠한 교류가 있었단 뜻 아닐까요? 이 시간부로 물살이들은 포유류에 대한 경계태세를 바짝 취해야 할 것입니다.
선동. 이 삽화는 챗GPT-5로 제작했음.
‘흰 수염고래의 간첩 행위, 이번엔 지진해일?’라는 제목의 기사를 접한 크랩들은 하나 둘 밖으로 기어 나왔다. 무리 지어 갑론을박을 펼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다른 류의 물살이들도 가세했다.
흰 수염고래님은 지진해일이 일어날 걸 동료의 초음파를 통해 예상했다고 해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말이 왜 안 돼요?”
멀리 떨어져 있는 동료의 초음파를 알아 듣는 게 가능하냐구요. 또 거기에 동료가 진짜 있었는지 어떻게 증명해요?”
하긴 우리 같은 물살이는 초음파를 못 들으니 얼마든지 거짓말로 지어낼 수 있겠네요.”
어쩌면 가스 탐사선 소음으로 지진 신호를 판독했을지도 몰라요.”
아주 소설을 쓰세요. 자신이 초음파 못 듣는다고 막말을 해도 유분수지.”
그러니까요. 백 번 양보해서 흰 수염고래님이 인간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아 지진해일을 쏘고, 잠수함을 떨어뜨렸다 쳐요. 아니,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냐구요?”
대왕오징어님 죽이려는 거지. 보면 모르겠어요? 잠수함 떨어진 위치 좀 보라구요.”
흰 수염고래님이 대왕오징어님을 죽이긴 왜 죽여요?”
자신이 왕좌에 오르려고 그런 거지. 뻔한 걸 왜 물어?”
그럴 분 아닌 거 몰라요?”
난 그럴 분으로 보이는데?”
증거 있어요?”
포유류니까.”
논점 흐리지 말고 진실을 들여다보세요. 고래의 초음파는 인간의 주파수를 넘어섭니다. 대화가 불가능한데 대체 어떻게 소통을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간첩인 거죠. 특수훈련을 받은.”
하, 진짜 말이 안 통하네.”
다들 진정하세요. 이럴 때일수록 객관적인 사고를 해야 해요. 매년 이맘때쯤 우리는 자연재해를 겪어왔잖아요. 지진해일은 자연현상이지, 인간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아니요, 인간은 워낙 교활한데다 문명의 이기까지 누리고 있으니 그 사이 인공 지진해일을 만들어냈을지도 몰라요.”
뒤에서 흰 수염고래와 이런 딜을 했을지도 몰라요. 지진해일이랑 잠수함 쏴 줄테니 왕권 잡으면 대왕오징어 시체를 우리에게 넘겨라. 우린 고기 받아서 좋고, 너는 대왕 돼서 좋고.”
나 참. 고래는 포유류니까 인간과 내통하는 간첩일 것이다? 그래서 립스틱 사건도, 흑명태 죽음도 고래가 모두 주범이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해요? 참 살기 편하시겠어요.”
간첩이란 증거는 차고 넘쳐요. 제가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흰 수염고래님은 숨을 쉬러 수면 밖으로 나가면 머무는 시간이 꽤 길어요. 한 번은 고래바다유람선이 지나가자 지느러미 벌려 화답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구요.”
아니, 지느러미 펄럭거린 게 왜 간첩 짓이냐구요? 우리도 한 번 쯤은 인간에게 호응한 적 있잖아요.”
옳소. 무엇보다도 흑명태가 죽은 건 대왕오징어님의 짓 같단 생각이 들어요. 원래 같은 편이었다가 등 돌리면 더 무서운 법이잖아요.”
뭐래는 거야. 흰 수염고래님이 흑명태를 제 편으로 구워삶으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제거한 거라니까.”
제발 소설 좀 그만 써요.”
용왕님 말씀을 소설 따위에 비유해요?”
아니, 용왕님이라고 모든 진실을 알겠어요?”
어맛, 이건 신성모독 발언인데? 그보다도 오늘 [오션일보] 안 보셨죠? 목격담 쓴 물살이가 허위사실 게재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문 올린 거 읽어드려요?”
뭐라구요? 흑명태와 리 주필이 만나는 걸 봤다고 쓴 그 물살이 말하는 거 맞아요?”
제발 [오션일보] 좀 보세요. 가짜 뉴스 그만 보시고.”
아니, 그러면 수많은 명태 떼들이 웅덩이 가에 집합하고 있었던 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권력자의 명령 아니고서야 왜 거기 모였겠어요? 대왕이 거기에 있던 걸 여러 물살이들이 보기도 했잖아요.”
그 분의 일이 해역순찰이잖아요. 대왕님을 의심하다니, 어이가 없네.”
크랩들이 옥신각신하던 가운데 장수거북이 팔을 들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물살이 여러분, 포유류와 인간을 한통속으로 규정짓는 [오션일보]의 저의가 눈에 빤히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선을 앞둔 이 시점에서 선동 글에 숨어있는 행간의 의미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저들은 연임을 위해서 흰 수염고래님을 간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겁니다.”
맞아요! 저들의 작전에 놀아나선 안 됩니다.”
옳소. 지진해일을 미끼삼아 우리의 판단력을 흔들려는 수법에 말려들지 맙시다.”
그 때 어느 물살이가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저는 아직도 누굴 찍을지 결정 못했지만 인간을 무작정 혐오하는 건 건강한 방책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만약 물과 뭍이 상생해야 한다면 공존할 방법을 모색해야지, 증오가 무엇을 해결해주겠어요?”
이봐요, 속 좋은 소리 그만해요. 얼마 전에 등 푸른 거북 몇 마리가 대가리 껍질 벗겨진 채 발견된 거 몰라요? 지갑이라는 사치재를 만들기 위해 동족을 도려내는 것도 모자라 시체마저 그냥 버렸다구요. 이게 바로 인간이에요.”
이제부터 인간 편 드는 것들은 간첩으로 간주해 버립시다.”
네가 뭔데 간주하라 마라야!”
포유류도 아닌데 왜 이렇게 발끈하세요? 혹시 아가미 없으세요?”
이 간첩보다 더한 놈아! 우리 해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지 마!”
저는 처음부터 흰 수염고래님이 수상쩍었어요. [고래의 꿈]에는 고래와 인간이 한통속임을 의심케 하는 도서들이 많았잖아요. ‘피노키오’ 경우, 고래가 제페토 할아버지와 피노키오를 자기 뱃속에서 만나게 해줘요. 재채기해서 탈출까지 시켜주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피노키오’는 흰 수염고래님이 쓴 게 아니에요.”
그렇다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아요. 인간이 ‘고래뱃속에 안전하게 들어가는 이야기’를 왜 지어냈을까요? 같은 편인 포유류를 두둔하는 거죠.”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마세요. 우리는 물 안에서 위기를 헤쳐 나가야지, 물 밖의 인간을 끌어올 생각은 마시라구요.”
내통하는 물살이가 있으니까 이러는 거죠.”
자자, 이번 대선 때 제대로 투표하면 됩니다. 다들 내부의 적 솎아낼 준비는 되셨죠?”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리본장어가 이 때다 싶어 스윽 다가왔다. 리 주필이 시커먼 꼬리를 흔들어대자 많은 물살이들이 동조하듯 그 편으로 헤엄쳐 갔다. 장수거북의 편에 남아있는 물살이는 은빛연어를 비롯한 몇 마리뿐이었다. 저 멀리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던 흰 수염고래는 자신이 나서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지금이 아니면 제대로 된 해명의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물개나 북극곰도 포유류인가요? 이들도 내부의 적인가요?”
누군가의 돌발 질문에 흰 수염고래는 멈칫했다. 수군거리던 물결도 단박에 가라앉았다. 물개나 북극곰은 이 해역에 살지 않았기에 물음표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