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모르는 태산부동의 사나이, 백범 김구 [사람들] 백범 김구라는 이름의 울림은 날이 갈수록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36년간의 일제 식민지에 이어 해방되면서 나라가 분단돼 80년이 넘게 남북이 적처럼 살아가는 민족사에 비극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시절에 자주 독립과 분단 극복에 평생을 바친 김구(1876~1949)의 거친 삶은 태산처럼 분명하게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말해줍니다. 2026년 유네스코 기념 백범의 해 를 맞아 그간 잘 몰랐던 김구의 이야기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백범 김구’를 에피스드 중심으로 연재합니다.(필자 주)
백범 김구(1876~1949)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우리는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제가 장편소설 『백범 강산에 눕다』를 냈을 때 뜻밖에도 많은 사람이 우리가 백범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 3쪽에 지나지 않고,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가르칠 교사도 없습니다. 해방 후 들어선 정부는 독립운동사를 가르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 한국광복군 출신 중 일부가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나 초기 국군에 입대하면서 광복군 경력을 숨기거나 지워야 했던 사례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범은 속내를 쉽게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태산부동(泰山不動)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백범은 ‘목숨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독립운동을 시작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결심 끝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단 한 번 세상을 사는 유한한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에 각지의 청년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회원들은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상소문은 개신교계를 대표해 개화 지식인 이준이 작성했습니다.
강화도조약 때 일본은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고, 러일전쟁 때는 ‘한국의 독립과 토지주권의 보호가 전쟁의 목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끝내 한국의 주권을 강탈했다. 또 황제의 서명도 없이 박제순 등 역신이 조약에 날인한 것은 만국공법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고종은 이들 역신을 처단하고 이 조약이 무효임을 세계 열방에 알려 한국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
당시 상소자들은 일제와 그에 동조하는 대신들이 자신들을 반역이나 소요죄로 몰아 처형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상소자는 최재학(崔在學)이 대표자의 머리인 소수(疏首)를 맡았고 신상민(申相珉), 김인집(金仁楫), 신석준(申錫峻), 이시영 (李始榮, 초대부통령을 지낸 이시영과는 동명이인) 등 5인이었습니다. 이들은 미리 유서를 써두고 대한문 앞으로 갔습니다. 상소 방식은 도끼를 들고 궐문 앞에 엎드리는 ‘지부상소(持斧上疏)’였습니다. 내 말이 틀렸다면 이 도끼로 내 목을 치라”는 항거입니다.
김구는 황해도 진남포 엡윗청년회 총무 자격으로 전국대회에 참석한 상태였습니다. 아직 이름난 지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1차 상소문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1차 5인이 잡혀가면 계속 상소를 이어가며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했습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정순만의 인도로 우리 일동은 상동교회(남대문 근처)에 모여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죽기까지 일심하자고 맹약하는 기도를 올리고 일제히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다.”
김구는 이때 이미 목숨은 지키고 보전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할 때 쓰는 것이다”라는 인식으로 무장한 것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구국 운동에 나섰더라도 실제로 목숨을 완전히 바치겠다고 각오하는 일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김구는 각오했으면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특징은 평생에 걸쳐 나타납니다. 1차 상소 조가 체포된 뒤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고 대한문 앞은 봉쇄됐습니다. 결국 상소만으로는 일제를 몰아낼 수 없다는 절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동료들이 끌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무장투쟁과 교육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민족 앞에 내놓는 김구의 각오는 확실했습니다. 그 각오는 자기 자식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945년 장남 인이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김구는 아들을 어머니 곽낙원 여사 묘 곁에 묻었습니다. 이미 딸 셋과 어머니와 아내를 잃은 뒤였습니다.
1935년 11월 열여덟의 김인은 백범이 이동녕·이시영과 함께 항주(杭州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조직할 때 실무진으로 참여했습니다. 4년 후 김인은 중경(重慶 충칭)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김붕준의 큰딸 효숙을 만나 그녀의 부탁을 받고 우리는 혁명자! 정의를 우리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짤막한 글을 써주었을 정도로 독립운동에 사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인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의 장녀 안미생과 연애 끝에 결혼했습니다. 북경에서 나서 상해에서 자랐고 홍콩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뒤 곤명(昆明 쿤밍)의 서남연합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영어, 러시아어 등에도 능통해 충칭의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김인을 만났습니다.
결혼한 김인은 중경에서 폐병을 앓았습니다. 중경의 나쁜 공기로 많은 한인들이 세상을 떠났는데, 김인은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첩보 활동을 했던 긴장감으로 병을 키운 것 같습니다. 안미생은 남편이 위독해지자 시아버지 백범을 찾아가 당시 유일한 치료약이었던 페니실린을 맞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백범은 폐병으로 죽어가는 동지들은 그렇게 해주지 못했는데, 내 아들이라고 특별히 페니실린 주사를 맞게 할 수 없다며 며느리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형이 세상을 뜨자 중국 공군사관학교에서 비행 훈련을 받던 둘째 아들 신이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부모가 자식을 앞세우는 비참한 슬픔을 ‘참척’(慘慽)이라고 합니다. 둘째의 편지를 받은 김구는 비통함을 누르며 이렇게 답장합니다. 신아, 편지 잘 받았다. 네가 지금은 우리 김씨 집안의 유일한 자손이니 아버지는 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러나 혁명하는 것은 생명을 민족에 바친 것이고, 군인은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해야 한다. 생사는 마땅히 그다음의 문제이니 너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 편지에서 우리는 김구의 진정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구는 자신을 바친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나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대한민국 13년(1931년) 12월 13일, 선서인 의사 이봉창.
이보다 앞선 일이지만, 상해에서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했을 때 김구는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상해에서의 김구는 단순한 투사로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타인의 죽음까지 책임지는 자리에 섭니다. 1931년 겨울, 김구는 이봉창을 처음 만납니다. 이봉창은 번듯한 엘리트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노동 현장을 떠돌며 밑바닥 인생을 살던 청년이었습니다. 김구는 그에게서 바닥까지 밀려난 사람 특유 야생의 생명력을 봅니다.
김구는 그에게 수류탄을 맡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김구도 알고 있었습니다. 실패 가능성이 크다는 것,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는 단순히 작전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남은 생애 전체를 자기 품 안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저의 목숨을 드립니다.” 의거를 위해 홍국공원으로 가기 직전 윤봉길이 말했다. 김구는 잠시 침묵했다, 습관처럼. 그러나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대의 목숨을 받겠소. 조국의 이름으로!” 둘은 서로 시계를 바꿨다. 앞으로의 한 시간과 그 이후의 시간이 영원으로 바뀌었다.
윤봉길 의거에서는 그 관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윤봉길은 젊었고, 아내와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구는 도시락 폭탄을 맡깁니다. 의거 직전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설명도, 거창한 구호도 없었습니다. 이미 서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조국을 위해 죽으러 간다.” 나는 그런 그대를 보내고 여기 남는다.” 둘은 조국의 이름으로 서로의 목숨을 서로에게 의탁하는 관계가 됩니다.
여기서 김구의 절대적인 비극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목숨을 바치는 쪽을 비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살아남아 그 죽음을 받드는 사람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비극이 있습니다. 젊은이를 죽음의 현장으로 보내고, 실패와 죽음을 견디고, 그 이후의 모든 책임까지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 사람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의당 그래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동지들입니다. 목숨 바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아서 젊은이들이 몸 바친 그 이후를 감당해야 하는 김구는 죽은 사람에 못지않은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김구는 젊은이를 죽음의 현장으로 보냈고, 실패와 도피의 세월을 견뎠고, 그 이후의 모든 책임까지 짊어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김구가 얼마나 강력한 사나이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은 십자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영화에는 Hoc est enim Corpus Meum.”이라는 라틴어 문장이 나옵니다. 이는 내 몸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내 몸을 내어준다는 것은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영화 속 대부분 사람은 이 말을 배반합니다. 신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살육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주인공 발리앙은 다릅니다. 그는 무의미한 학살을 거부하고 시민 생명을 먼저 생각합니다. 끝까지 싸우면 예루살렘은 폐허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결국 항복 협상을 선택합니다. 자기 명예보다 사람 목숨을 먼저 본 것입니다. 이 영화가 십자군 전쟁을 다룬 서양의 영화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꼽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주제 의식을 탁월하게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임순만의 장편소설 백범 강산에 눕다 의 표지.
을사늑약 상소 때의 김구도 내 몸을 내어놓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해에 이르면 그의 투쟁은 그 지점에서 더 나아갑니다. 상해의 김구는 자기 목숨만 내놓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동지들의 목숨까지 함께 떠안는 자리로 걸어 들어갑니다. 김구가 이봉창과 윤봉길에게 폭탄을 맡기는 순간, 그 뜻은 결국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목숨과 그대의 목숨은 이제 같은 운명이다.”
그러나 태산부동의 김구는 그것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동지를 죽음의 현장으로 보내고 그 책임을 자기 품 안에 안았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김구는 더욱 장렬하고 높아 보입니다. 자기 죽음은 혼자 감당할 수 있지만, 타인의 죽음은 평생 짊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는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시대였습니다. 문제는 그 죽음을 누가 책임질 것이냐였습니다. 김구는 평생 그 책임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자기를 던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김구가 해방 후 집권하지 못했기에 성공하지 못한 정치인이라고 말합니다. 김구의 목표는 집권이 아니었습니다. 분단 극복을 목표로 한 사람에게서 집권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것은 전혀 다른 관점의 이야기입니다. 임순만 언론인 hnanj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