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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미국 전설적 노동 투사의 추락과 진보 진영의 과제

미국 전설적 노동 투사의 추락과 진보 진영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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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캘리포니아 샌퍼난도에서 차베스 벽화를 가리는 모습 [AFP=연합뉴스] 최근 미국 농업 및 이민 노동운동의 상징이자 전설적 투사였던 세사르 차베스(César Chávez)의 성폭력 가해들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명예가 실추된 사건을 넘어, 미국의 진보적 사회운동 진영 전체에 충격과 서글픔을 안겨주었다. 차베스는 1960년대 전미농업노동연맹(UFW)을 창설하여 착취당하던 농장 노동자들을 하나로 모으고, 역사적인 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비폭력주의와 가톨릭 신앙을 결합한 그는 생전 히스패닉계의 마틴 루터 킹 이라 불릴 정도로 전설적인 노동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영향력은 사후에도 공고하여, 대통령 자유 훈장 을 수여받았으며, 미국 내 여러 주의 교과서에 그의 업적이 기록되었다. 그의 생일은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질 만큼 그는 존경과 추앙을 받아 왔다. 그는 이미 1993년에 사망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사후 30년이 더 지난 지금에야 그가 여러 여성 활동가들과 어린 여성들에게까지 성폭력을 저지르고 성적으로 학대해 왔다는 쓰라린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의 치밀한 취재와 심층 보도는 신화의 뒤에 가려져 있던 진실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많은 언론과 활동가들이 수십 년간 가려져 왔던 진실의 파편들을 맞추기 시작했다.  더욱 충격적인 지점은 피해자 명단 속에 차베스와 함께 전미농업노동연맹(UFW)을 일구어낸 핵심 공동 창설자인 돌로레스 후에르타(Dolores Huerta)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현재 96세인 후에르타가 60여 년 만에 토해낸 미투 는 이 사건이 대중적 확신으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후에르타는 차베스의 지속적인 성폭력으로 인해 두 번의 임신과 출산을 겪어야 했으며, 그 자녀들을 세상의 눈을 피해 남몰래 키우거나 후원해 왔다. 그녀는 자신이 일생을 바쳐온 노동운동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위태로워지거나 본질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자신의 피해를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침묵을 지켜왔다. 그러나 이번에 무거운 침묵의 벽을 허물었다. 나의 침묵은 여기서 끝난다. 운동을 보호하기 위해 이 비밀을 충분히 오래 간직해 왔으나, 이제 나는 숨겨진 폭력의 토대 위에 운동을 세우는 것이 진정한 정의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 짧은 문장은 평생을 투쟁에 헌신한 노활동가가 짊어져 온 고통의 무게와,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할 정의의 방향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60년만에 미투에 나선 돌로레스 후에르타의 과거 활동을 보여주는 이미지 - 출처: X  이것은 우리가 운동의 대의 라는 명분 아래 또 다른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온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한다. 이 비극은 단순히 차베스라는 개인이 아무런 기여나 긍정적 측면도 없는 위선적인 악당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적 규범과, 그것이 중남미 사회에서 나타나는 마초 문화 로부터 노동운동 또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운동 조직 내부의 폐쇄적인 구조가 문제를 키우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소수의 남성 지도자를 조직의 얼굴로 내세워 영웅화 하는 과정에서, 그와 함께 피땀 흘린 (여성) 활동가들은 그림자 속의 조력자 나 실무자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이러한 위계적 구조 속에서 지도자의 권위는 성역이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조직의 대의를 위해 희생을 감내하라는 압박이 가해졌다. 문제 제기 자체를 배신 이나 분열 로 몰아세우는 문화 속에서 문제는 덮어졌다. 구조적 비대칭성 속에서 차베스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희생한 온화한 지도자 로 과대평가된 반면, 후에르타는 가족을 팽개치고 운동에만 매달리는 극성스러운 여성 으로 과소평가되어 왔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차베스의 동상을 철거하고, 교과서 기술을 수정하며, 차베스의 날 을 보다 보편적 가치를 담은 농업 노동자의 날 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차베스와 후에르타,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가 함께 일구어낸 농업 및 이민 노동운동의 역사적 성과 전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모든 성과를 깎아내린다면, 이는 이민자를 폭력적으로 단속·추방하고 노동운동의 결실을 파괴하려는 신극우 세력이나 트럼프 정권 같은 이들에게만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정의는 과거의 공로를 방패 삼아 내부의 잘못을 덮는 데 있지 않다. 이 쓰라린 교훈을 통해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동안 노동운동이 놓쳐왔던 다양한 요구와 목소리를 더욱 민감하게 포착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진보적 가치를 외치는 조직일수록 내부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더욱 엄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수십 년 만에 터져 나온 피해자들의 증언과 견고했던 신화의 붕괴는 미투(#MeToo) 운동이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미투 운동이 시작된 이후로 여러 가지 좌충우돌과 시행착오도 있었고, 성폭력적 문화와 가해자들을 편드는 세력은 그것을 이용해 미투 운동을 폄하하고 잊혀진 과거로 만들려고 해 왔다. 하지만, 진실의 힘은 모든 방해를 뚫고 전진하고 있다.   미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스 [AP=연합뉴스] 이러한 미국의 사례는 한국의 진보적 사회운동 진영에도 과제와 교훈을 던져준다. 한국 사회에서도 운동사회 내부의 성폭력 사건은 드러나기 힘들었다. 사회운동의 도덕적 우월성 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혹은 보수 진영이나 정치 권력의 공격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조직 보위 논리 가 피해자의 입을 막는 압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사건이 왜곡되게 이해되고 도구화되거나, 피해자가 오히려 운동의 앞길을 막고 조직의 명예를 실추시킨 가해자 로 둔갑하여 공동체에서 추방되는 비극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일찍이 전희경은 그의 저서 에서 이러한 운동사회의 독특한 병폐를 날카롭게 분석한 바 있다. 운동사회에는 내부의 성폭력을 묵인, 은폐, 재생산하는 독특한 논리와 체계가 작동해 왔다는 점에서 분석이 필요하다. 사건을 묵인하고 은폐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운동사회에서 추방하는 고유의 메커니즘이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 성폭력은 여성 인권 침해가 아니라 조직의 명예 실추로 치환돼버린다. 이 지적처럼, 권력자나 정치인의 부패와 잘못에는 누구보다 서슬 퍼런 비판을 가하던 진보적 운동 단체가 정작 내부의 문제 앞에서는 침묵하거나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이중성은 피해자들에게 2차, 3차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어떤 경우에는 내부의 오점을 가리기 위해 대외적으로 더욱 선명하고 급진적인 구호를 외치며 이미지 세탁에 나서기도 한다. 물론 자본주의의 모순에 저항하고, 제국주의의 폭력에 맞서며, 노동자의 권리와 반전 평화를 외치는 모든 대외적 활동과 연대는 그 자체로 소중하며 지속되어야 할 중요한 행동들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거기에 함께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반갑게 여겨질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과 연대에 함께하면서도 피해자의 목소리가 결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더 큰 연대와 지속 가능한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구조적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세사르 차베스의 사례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경고는 분명하다. 운동의 성장과 조직의 보존을 위한 피해자의 침묵 은 결코 영원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깨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후에르타가 말했듯이 숨겨진 폭력의 토대 위에 운동을 세우는 것 은 결코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운동이 지향하는 그 어떤 급진적이고 숭고한 가치와도 양립할 수 없는 자기모순이다. 영웅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피해자들의 용기도 함께 숨 쉬는 더 건강하고 굳건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아 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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