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로 읽는 삶의 인문학 [교육] 북걷사 일행은 매일 아침 윤석열 정권의 퇴진을 촉구하며 우리는 걷는다. 망국정권의 끝을 향하여 구호를 외치고 트래킹을 시작하였다. 트래킹을 다녀와서 한 달 후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였고 탄핵되었다. 박철 시민기자
1. 속도 사회에서의 저항으로서 걷기
우리는 속도에 둘러싸인 시대를 살아간다. 하루는 점점 더 촘촘해지고, 시간은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기술은 끊임없이 시간을 절약해 준다고 말하지만, 그 절약된 시간은 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일과 더 높은 성과를 요구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바뀐다. 효율은 덕목이 되었고, 바쁨은 능력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것 같지만, 모두가 보이지 않는 압박 속에서 더 빨리 움직이기를 요구받는다.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지만, 정작 어디를 향해 가는지에 대한 질문은 점점 희미해진다. 속도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질서가 되었다. 이 질서 안에서 인간은 점점 기능으로 환원된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빠르게 수행하는지, 얼마나 많은 결과를 만들어내는지가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삶은 경험되기보다 관리되고, 시간은 흐르기보다 쪼개진다. 우리는 살아간다기보다 운영되는 존재에 가까워진다. 그 과정에서 놓쳐버린 것은 방향만이 아니다. 감각이고, 여유이며,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걷기는 뜻밖의 의미를 갖는다. 걷는다는 것은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목적지에 가능한 한 빨리 도달하려는 흐름에서 벗어나, 이동의 과정 자체를 받아들이는 행위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느린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이 사회가 전제하고 있는 가치에 대한 질문이 된다. 왜 우리는 늘 빨라야 하는가, 왜 효율이 최우선이어야 하는가, 왜 결과가 과정보다 중요해야 하는가. 걷기는 이러한 질문을 말없이 던지는 행위다.
걷는 동안 우리는 생산하지 않는다.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간은 결코 공백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발걸음이 땅과 만나는 리듬을 느끼고,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결을 감지하며, 햇빛의 온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주변의 소리들이 또렷해지고, 지나치던 풍경이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제야 알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시간이 아니라 경험이었다는 사실을. 속도 사회에서는 시간이 늘 부족한 자원처럼 다루어진다. 그러나 걷는 순간 시간은 결핍이 아니라 여백이 된다. 빠르게 이동할 때 우리는 시간을 줄이려 하지만, 걸을 때 우리는 시간을 늘려 간다. 그 늘어난 시간 속에서 생각은 깊어지고, 감정은 차분해지며, 삶은 다시 호흡을 되찾는다. 시간은 더 이상 쫓기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흐르는 동반자가 된다.
걷기는 경쟁의 질서로부터 우리를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속도의 세계에서는 늘 비교가 따라다닌다. 누가 더 빠른지, 누가 더 앞서 있는지, 누가 더 많은 것을 이루었는지 끊임없이 평가된다. 그러나 걷는 순간 이러한 비교는 의미를 잃는다. 각자의 걸음은 각자의 리듬을 따른다. 빠르다고 더 나은 것도 아니고, 느리다고 부족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몸으로 체험한다. 그 체험은 비교에서 벗어난 자유를 가져온다. 이 자유는 우리를 다시 존재로 돌아가게 한다. 우리는 더 이상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가는 주체가 된다. 걷는 동안 우리는 누구의 기대에도 맞출 필요가 없다. 그저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만의 호흡을 따라간다. 이 호흡은 외부의 요구가 아니라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리듬이다. 그 리듬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청도 밀양 댐 주변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히며 들길을 걷는다. 박철 시민기자
또한 걷기는 삶의 방향에 대해 다시 묻게 만든다. 속도에 몰입할수록 방향은 흐릿해진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사실이 마치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걷는 순간 우리는 속도를 낮추고 주변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내가 가고 있는 길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질문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삶을 다시 세우는 데 필요한 질문이다. 걷기는 조용한 방식의 저항이다. 그것은 구호를 외치거나 체제를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행동이 아니다. 대신 삶의 방식을 바꾸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속도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리듬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 의지는 작아 보일 수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상의 가장 깊은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걷기의 힘은 일상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서 천천히 걸어가는 길, 일부러 돌아가는 골목, 목적 없이 이어지는 발걸음. 이 작은 선택들이 쌓이면서 삶의 결이 바뀐다. 우리는 점점 덜 조급해지고, 덜 초조해지며, 더 많이 느끼고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삶은 더 이상 쫓기는 과정이 아니라 살아내는 시간으로 변해 간다. 걷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회복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흩어졌던 생각들이 하나로 모이고, 억눌렸던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그저 존재하는 상태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여유를 갖게 된다.
결국 걷기는 이동의 방식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다. 그것은 속도 중심의 세계에 대한 질문이며, 효율 중심의 가치에 대한 재고다. 우리는 걷는 동안 덜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많은 것을 발견한다. 더 늦게 도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도달한다. 더 천천히 움직이지만, 더 분명하게 자신을 인식한다. 속도 사회는 여전히 우리를 재촉할 것이다. 더 빨리 움직이라고, 더 많은 것을 이루라고, 더 앞서 나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반드시 그 흐름에 맞출 필요는 없다는 것을. 때로는 멈추어도 되고, 때로는 돌아가도 되며, 때로는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는 것을. 걷는다는 것은 그 사실을 몸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며, 주장보다 더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우리는 오늘도 걸음을 옮긴다. 더 빨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그 걸음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리듬을 되찾는다.
2. 방향 없는 걸음의 자유
우리는 늘 방향을 요구받으며 살아간다.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목표로 삼을 것인가, 어떤 계획을 따라야 하는가. 삶은 마치 잘 설계된 지도 위를 따라 이동해야 하는 여정처럼 이해된다. 그 지도에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고, 가장 효율적인 경로가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그 길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혹여 벗어나게 될까 두려워한다. 방향을 잃는다는 것은 곧 실패나 낙오로 이어질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 속에서 방향 없는 걸음은 낯설고 불안한 선택으로 보인다.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고 걷는다는 것은 목적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계획 없이 움직이는 행위는 무책임하거나 비합리적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방향 없는 걸음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을 열어 준다. 그것은 삶을 통제하려는 습관에서 벗어나,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는 경험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과 경주시 산내면에 걸쳐 있는 문복산에 오르다. 전망이 좋은 산이다. 박철 시민기자
방향이 정해져 있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움직인다. 지금 이 순간은 그 미래로 가기 위한 통로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재는 항상 잠정적인 상태로 남는다. 그러나 방향 없이 걷는 순간, 현재는 더 이상 통로가 아니다. 그 자체로 충분한 시간과 공간이 된다. 우리는 지금의 발걸음에 집중하게 되고, 눈앞의 풍경과 소리에 온전히 머문다. 이때 현재는 비로소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방향 없는 걸음은 선택의 부담을 가볍게 만든다. 우리는 늘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길이 더 나은지, 어떤 결정이 더 유리한지 끊임없이 계산한다. 그러나 방향이 없을 때는 그 계산이 의미를 잃는다. 어느 길로 가도 괜찮고, 언제 멈춰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과를 예측하려 애쓰기보다, 지금의 감각에 귀 기울이게 된다. 햇빛이 따뜻한 방향, 바람이 부드럽게 스치는 길, 마음이 편안해지는 골목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옮겨진다.
이러한 경험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다. 우리는 그동안 삶을 하나의 직선으로 이해해 왔다. 출발점에서 도착점으로 이어지는 선 위에서 가능한 한 빠르고 정확하게 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방향 없는 걸음은 삶이 반드시 직선일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삶은 곡선으로 흐르기도 하고, 원을 그리기도 하며, 때로는 제자리에서 맴돌기도 한다. 그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방향이 없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발견한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을 때 우리의 시선은 그곳에 고정된다. 그 과정에서 주변의 수많은 요소들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목적지가 없을 때, 모든 것이 중심이 된다. 골목의 작은 꽃 한 송이, 오래된 벽에 남은 흔적, 창문 너머로 흘러나오는 음악. 이런 사소해 보이는 장면들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감각을 깨우친다. 우리는 그제야 세계가 얼마나 풍부한지 실감하게 된다.
또한 방향 없는 걸음은 통제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한다. 우리는 삶을 계획대로 이끌 수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삶은 수많은 우연과 변수를 포함하고 있다. 방향 없이 걷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길을 만나기도 하고, 막다른 길에 이르기도 한다. 때로는 되돌아가야 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길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이 반드시 두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 경험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더 이상 모든 상황을 예측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변화와 우연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길을 잃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 된다.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과 마주하고, 계획에 없던 경험을 하게 되면서 삶은 더욱 풍성해진다.
방향 없는 걸음은 또한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든다.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우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붙인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애쓴다. 그러나 방향 없이 걷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현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피곤하면 쉬고, 걷고 싶으면 걷고, 멈추고 싶으면 멈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자유는 방종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방향 없는 걸음은 아무렇게나 흩어지는 움직임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우리는 어딘가에 도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충분하다는 것을 몸으로 경험한다. 이 경험은 깊은 해방감을 준다. 우리는 더 이상 목적지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그저 살아가는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다.
랑탕 트래킹 도중 가장 높은 고도를 한 번에 끌어올려야 하는 체르고리(해발 고도 4985m)를 오르며.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박철 시민기자
더 나아가 방향 없는 걸음은 삶의 리듬을 회복하게 한다. 우리는 외부의 요구에 맞추어 살아가느라 자신의 리듬을 잃어버리기 쉽다. 일정에 맞추어 움직이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며, 사회가 정해 놓은 속도를 따르다 보면 자신의 호흡은 점점 희미해진다. 그러나 방향 없이 걷는 시간은 그 호흡을 다시 찾게 한다. 우리는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며,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머문다. 그 리듬은 외부의 기준과는 무관하게 형성된다. 결국 방향 없는 걸음은 삶의 의미를 다시 묻게 한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방향이 분명할 때는 이러한 질문을 피하기 쉽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그 질문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향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를 더 깊은 성찰로 이끈다.
방향 없는 걸음은 결코 무의미한 방황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다시 느끼고,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길 위에서 계획과 결과에 가려져 있던 감각을 되찾고, 존재 자체의 가치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꾼다. 우리는 여전히 방향을 필요로 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우며,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순간들도 많다. 그러나 때로는 방향을 내려놓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않고, 그저 걸어보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자유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 자유는 우리에게 말한다. 반드시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금 이 순간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목적지를 향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경험 그 자체를 향해서.
3. 길 위에서 만나는 나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과의 관계, 직장에서의 역할, 사회 속에서의 위치가 우리의 시간을 채운다. 그 관계들은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지만, 동시에 ‘나’라는 존재를 흐릿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점점 더 ‘누구의 무엇’으로 설명되는 존재가 되고, 그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 삶의 중심 과제가 된다. 그러는 사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뒤로 밀려난다. 바쁘다는 이유로,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를 미뤄둔다. 길 위에 서는 순간, 이 흐름은 잠시 멈춘다. 걷는다는 행위는 우리를 관계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게 한다. 길 위에서는 직함도, 지위도, 역할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한 사람의 몸으로, 한 존재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출 필요도 없고, 특정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 의무도 없다. 이때 우리는 오랜만에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외부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 시작된다.
네팔 랑탕마을에서 올려다 본 설산의 위엄. 박철 시민기자
걷는 동안 생각은 억지로 끌어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일상 속에서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천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 어떤 날은 오래된 후회가 마음을 건드리고, 어떤 날은 잊고 지냈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또 어떤 날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평온함이 조용히 스며든다. 이러한 감정들은 평소라면 밀어내거나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길 위에서는 그것들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게 된다. 걷는 리듬이 그 감정들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자기 이해로 이어진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많지 않다. 바쁜 일정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걷는 시간은 그 빈틈을 만들어준다.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명확한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질문을 통해 우리는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워진다.
길 위에서 만나는 나는 완성된 모습이 아니다. 때로는 모순되고, 때로는 불안정하며, 때로는 낯설기까지 하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과 마주하게 되고, 감추고 싶었던 모습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 모습을 부정하거나 억누르기보다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된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걷기는 그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또한 걷기는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한다. 일상 속에서는 외부의 소리가 너무 크다. 타인의 기대, 사회의 기준,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들이 우리의 생각을 덮어버린다. 우리는 무엇이 자신의 생각인지, 무엇이 외부에서 주입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길 위에서는 그 소음이 점차 줄어든다. 발걸음의 리듬과 호흡이 안정되면서, 그 사이로 자신의 목소리가 조용히 드러난다.
그 목소리는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소박하고 분명하다. 지금은 조금 쉬고 싶다는 마음, 이 길이 좋다는 감각, 이 순간이 충분하다는 느낌. 우리는 그 목소리를 종종 무시해 왔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더 급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뒤로 미뤄왔다. 그러나 걷는 시간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 길 위에서 만나는 나는 타인과 비교되지 않는 존재다. 사회 속에서는 끊임없이 비교가 이루어진다. 누가 더 앞서 있는지, 누가 더 나은 성과를 이루었는지, 누가 더 인정받는지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걷는 동안 이러한 비교는 의미를 잃는다. 각자의 걸음은 다르고, 각자의 속도는 다르다. 우리는 그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된다.
아내 김주숙과 함께 체르고리 정상을 오르던 중 설산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 한잔. 박철 시민기자
걷기는 또한 기억을 되살린다. 길을 걷다 보면 과거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의 기억, 지나간 계절의 풍경, 함께 걸었던 사람들의 모습. 그 기억들은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아프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은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일부다. 우리는 그 기억들을 다시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이어져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경험은 자기 수용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고쳐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부족한 부분과 잘못된 선택까지도 포함하여 자신을 이해하려 한다. 이는 자기 포기가 아니라 자기 인정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더 나아질 가능성을 품는다. 걷는 시간은 그 균형을 유지하게 한다.
길 위에서 우리는 또한 고독을 경험한다. 혼자 걷는 시간은 때로 외로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고독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과 깊이 만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느낀다. 고독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의 다른 방식이 된다. 걷기의 끝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안고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을 계속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자신과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하게 된다.
결국 길 위에서 만나는 나는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었던 나다. 다만 우리는 그 존재를 잊고 있었을 뿐이다. 걷기는 그 잊혀진 자신을 다시 불러내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받아들이며, 함께 걸어갈 동반자로 삼는다. 그래서 걷기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는 길 위에서 자신을 만난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일상은 이전과 같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다. 더 이상 타인의 기준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품고 다시 삶을 이어간다.
오늘도 우리는 길 위에 선다. 특별한 목적이 없어도 괜찮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 길 위에서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조용하지만 깊은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는 조금 더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조금 더 자신답게 살아가게 된다.
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