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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11번 실패하고도 12번째 시도한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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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孫文, 1866~1925)은 평생 혁명을 11번 시도해 모두 실패했다. 그런데 12번째에 성공했다. 요즘 말로 하면 꼰대 들이 좋아할 만한 포기하지 않는 정신 의 표본이다. 하지만 쑨원의 이야기는 단순한 ‘끈기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실패할 때마다 방법을 바꿨고, 동료를 바꿨으며, 전략을 수정했다. 같은 방식으로 11번 부딪혀 머리만 깨뜨린 게 아니라 매번 다른 각도로 벽을 두드린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터졌을 때 쑨원은 정작 중국에 없었다. 미국 콜로라도에서 모금 활동을 하던 중 신문으로 혁명 소식을 접했다. 혁명의 주역이 현장에 없다니 이보다 아이러니한 상황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것이 쑨원의 진면목이다. 그는 혁명을 혼자 하지 않았다. 씨앗을 뿌리고, 사람을 모으고, 생각을 퍼뜨렸다. 그래서 그가 없어도 혁명은 일어났다.   1922년 쑨원 (위키피디아) 의사에서 혁명가로, 그리고 국부 가 되기까지 쑨원은 광둥성(廣東省) 시앙산(香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형이 하와이로 이주해 성공하자 그도 13세에 하와이로 건너가 서양교육을 받았다. 홍콩에서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되었지만, 그가 치료하려 한 것은 사람의 몸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나라였다. 당시 청(清, 1644~1912년)은 망해가는 왕조였다. 아편전쟁(1839~1842년, 1856~1860년)으로 영국에 무릎 꿇고, 청일전쟁(1894~1895년)에서 일본에게 패했고, 의화단 운동(1899~1901년) 이후엔 8개국 연합군에게 짓밟혔다. 쑨원은 1894년,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했다. 중국을 부흥시키자 는 뜻이다. 이듬해 첫 봉기를 시도했지만 실패, 일본으로 망명했다. 1896년 런던에서 청나라 공사관에 납치당해 죽을 뻔했고, 필리핀에서도 쫓겨났고, 베트남에서도 추방당했다. 그야말로 국제적 수배자였다. 1905년, 도쿄에서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결성하며 삼민주의를 제창했다.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쉽게 풀면 외세 몰아내고, 국민이 주인 되고, 잘 살자 는 것이다. 21세기 한국 정치인들이 외치는 구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1905년 동아시아에서 이런 생각을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27년 1위안 은화에 새겨진 쑨원 (위키피디아) 성공한 혁명, 그러나 미완의 과제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신군(新軍)이 봉기했다. 쑨원 없이 시작된 혁명이었지만, 그가 뿌린 씨앗이 싹튼 것이었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은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다. 2천 년 넘게 이어진 황제 체제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세워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1912년 2월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년)에게 대총통 자리를 넘기고 쑨원은 다시 야인이 됐다. 1915년 위안스카이는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고, 그가 죽은 뒤 중국은 군벌들의 놀이터가 됐다. 쑨원은 1917년 광저우(廣州)에 군정부를 세우고, 1919년 중국국민당을 조직했다. 흥미로운 점은 1923년 소련과 손잡은 것이다. 적의 적은 친구 라는 격언을 실천한 셈인데, 이때 소련의 지원으로 황푸군관학교를 세웠고, 여기에서 장제스(蔣介石, 1887~1975년)와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년)가 배출됐다. 훗날 중국을 둘로 쪼갤 두 사람을 같은 학교에서 키운 셈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쑨원(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과 그의 가족 (위키피디아) 미완의 혁명가가 남긴 유산 1925년 3월 12일, 쑨원은 간암으로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 유언은 유명하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노력해야 한다(革命尚未成功, 同志仍須努力). 죽는 순간까지 혁명 타령이라니, 이 정도면 진정한 워커홀릭이다. 그가 죽은 뒤 중국은 1927년부터 1949년까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찢어졌고, 결국 두 개의 중국으로 나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쑨원은 양쪽 모두에게 국부 (國父)로 추앙받는다. 대만 국민당은 그를 창당자로 모시고, 중국 공산당은 그를 민주혁명의 선구자로 기린다. 이념이 다른데 같은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국이니 쑨원 입장에선 황당할 노릇이다.   쑨원(왼쪽에서 두 번째)과 그의 친구들인 산적 사대부(雲派陳尾, 왼쪽부터), 장소박(張侯派), 야우릿(劉青), 관경량(關景良, 서 있는 사람)이 1888년경 홍콩 중국인 의과대학에서 찍은 사진 (위키피디아) 한국은 쑨원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오늘날 한국사회를 보면 쑨원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첫째, 11번 실패하고 12번째에 성공한 그의 끈기. 요즘 한국에선 한 번 실패하면 흙수저 , 두 번 실패하면 인생 망함 으로 낙인찍힌다. 청년들에게 도전하라 고 외치면서 정작 실패에 대한 안전망은 없다. 쑨원의 시대에도 실패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지만, 그는 계속 시도했다. 우리사회는 실패를 용인하는가? 둘째, 방법론의 전환. 쑨원은 무장봉기, 외교, 선전, 교육, 정당조직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한 가지 방법에 집착하지 않았다. 한국정치는 어떤가? 내 편 네 편 가르기 와 진영 논리에 갇혀 같은 방식만 되풀이한다. 보수는 성장, 진보는 분배를 외치는데, 100년 전 쑨원은 이미 민생주의 로 둘을 통합하려 했다. 셋째, 국제적 시야. 쑨원은 하와이, 일본, 영국, 미국, 러시아를 오가며 세계를 봤다. 그래서 서양의 민주주의와 동양의 전통을 접목하려 했다. 한국은 어떤가? 미국만 보거나 중국만 보거나, 아니면 둘 사이에서 우왕좌왕한다. 쑨원처럼 주체적으로 세계를 활용할 생각은 안 하는 걸까? 넷째, 청년과 교육. 쑨원은 황푸군관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장제스든 저우언라이든, 이념은 달라도 능력 있는 인재였다. 한국은? 청년을 미래세대 라 부르면서 정작 기회는 주지 않는다. 청년 실업률은 높고, 비정규직은 넘쳐나며, 집값은 하늘을 찌른다. 쑨원이라면 이런 사회에서 혁명을 꿈꿨을 것이다.   런던 WC1 워릭 코트 4번지에 있는, 쑨원이 유배 생활을 했던 집을 기념하는 명판 (위키피디아) 지금 한국, 이대로 좋은가? 물론 총 들고 봉기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제도의 근본적 변화 없이 구호만 외치는 건 쑨원이 가장 경계한 일이다. 그는 혁명은 사상에서 시작된다 고 했다.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건 무엇인가? 양극화 해소? 쑨원의 민생주의가 답을 준다. 토지와 자본의 독점을 막고, 국민이 기본적 삶을 영위하게 하자는 것. 오늘날 한국의 부동산 문제, 재벌독점 문제와 정확히 겹친다. 민주주의 심화? 쑨원의 민권주의는 선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국민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한국은 5년마다 대통령을 뽑고 4년 마다 국회의원을 뽑지만, 정작 국민은 무력하다고 느낀다. 촛불 들어야 목소리가 들리는 사회가 정상인가? 정체성 확립? 쑨원의 민족주의는 배타적 국수주의가 아니라 자주와 평등을 지향했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북한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말레이시아 페낭 조지타운에 있는 쑨원 박물관은 그가 신해혁명을 계획했던 곳이다. (위키피디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쑨원의 유언은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중국도, 타이완도, 그리고 한국도 여전히 혁명 중 이다. 완성된 사회는 없고, 영원한 체제도 없다. 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쑨원이 위대한 건 성공해서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아서다. 11번 실패하고도 12번째를 시도한 건, 그가 믿은 게 자신이 아니라 미래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세대에 혁명이 완성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 세대가 이어가길 바랐다. 한국 청년들이여, 우리도 11번째 실패 중일지 모른다. 하지만 12번째는 오지 않을까? 쑨원이 남긴 진짜 교훈은 포기하지 말라 가 아니라 방법을 바꿔라 , 함께하라 , 미래를 보라 는 것이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시도할 기회가 있다. 쑨원이 그랬듯이. 나는 40년 동안 혁명에 헌신했다. 그 목적은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 쑨원 1921년 리 티푸의 쑨원 초상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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