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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동북아 정세 급변따라 부침 거듭했던 한중관계

동북아 정세 급변따라 부침 거듭했던 한중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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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청나라는 조선과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금강(禁江) 이라 이름 짓고 국경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조선 정부가 두만강 북쪽의 간도 지역을 영토로 설정한 사례는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하면서 이 지역을 봉금지대로 비워 두자, 조선인들이 강을 넘어가 농사를 짓는 월경 경작이 나타났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쇄환해서 처벌했지요. 1881년에 청이 봉금을 해제하고 개발 정책으로 중국인들의 간도 이주가 폭증하자, 조선은 1882~1883년 청에 ‘월경 엄금’을 약속하고, 유민을 청 호적에서 빼내 귀환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청이 약화되고 대등한 관계의 한청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이라면서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어요. 정부도 1902년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파견해 간도 주민에 대한 직접 행정·보호 사무를 전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청의 강력한 항의에 봉착하여 결국 이범윤은 소환되었어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도 간도에 대한 영토분쟁을 시도했다가 1909년 간도협약을 맺어 마침내 간도를 청의 영토로 확정해 주었습니다, 아무래도 근거가 부족했던 것이지요. ​3.1운동 뒤 대한독립 투쟁의 중심 기지가 된 간도 1910년 대한제국이 사라지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정치적인 망명을 시도했는데, 가장 많은 사람들은 중국을 선택했어요. 바로 강을 건너면 다다를 수 있고 이미 간도에 이주해 있는 동포들도 많았으며, 말은 달라도 한자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일본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결국 중국에 의존하게 된 것이지요. 당시 그들은 정식으로 일본의 여권을 발급 받아, 중국의 입국허가를 받아 떠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의주를 통해 중국의 안동으로 넘어가는 철도는 일본 경찰이 도항증명서를 확인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주로 강폭이 좁은 압록강 중류를 넘어 서간도로, 또는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로 ‘불법입국’로 중국에 이주했어요. 신민회 인사들이 1910년 전후 망명해 서간도의 삼원보를 개척하고, 한인 자치기구인 경학사,부민단, 군사교육기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북간도의 용정·왕청 등에서는 간민회, 중광단, 뒤이은 북로군정서 등 무장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3·1운동 이후 무장투쟁의 중심 기지가 되었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가능했던 조건이었어요.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중화민국에서 ‘민국’의 아이디어 얻은 대한민국임시정부 3·1운동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상하이·베이징으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습니다. 아울러 토지조사사업과 소작인들에 대한 수탈 심화로 생활이 어려워 진 사람들이 만주로 꾸준히 넘어갔어요. 만주의 한국인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고, 1910년대에만 수십만 명 단위의 이주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간도나 북간도가 아닌 상하이 등 중국 관내로 가는 방법은 부산에서 일본을 거쳐 홍콩에서 밀입국하거나, 황해를 밀항해서 상하이나 난징 등지로 이동하는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김마리아의 경우에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체포되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밀항선을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였어요. 중국 관내로 넘어간 한국인들 가운데에는 중국의 신해혁명과 공산당 활동에 가담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서 민국이라는 개념은 중화민국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이기도 했지요. 비록 처음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한 것은 아니지만, 법적 보호는 해주었던 것입니다.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 걸려 있는 1919년 당시 임시정부 직원 사진.. 2026.1.7 연합뉴스 광복군은 국민당, 조선의용군은 공산당과 함께 일제와 싸워 일제의 식민지 기간 내내 중국은 한국인들에게 기댈 언덕이었고 피난지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자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하여 양국 군대가 함께 힘을 모아 저항운동을 벌였어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국민당 정권과 함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공산당 세력과 함께 싸웠습니다. 그런데 국민당 정부는 1941년 광복군 창설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중국의 지휘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을 요구하였어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복군의 재정을 중국 정부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결국 1944년에 가서야 광복군의 통수권을 되찾았습니다.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지지, 중공은 북한 지원 참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민당이 이끄는 중화민국은 대한민국의 최초 수교국’이 되었어요. 1948년 12월 UN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한 뒤, 1949년 1월 중화민국이 한국을 정식 승인하고 서울에 대사관을 설치했습니다. 당시 중화민국은 UN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으로서, 늘 대한민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을 유지했어요. 양국은 모두 공산당 세력과 맞선 반공 전선을 공유하며, 스스로를 분단·반공의 동류 국가로 인식했습니다. 서로를 ‘형제지방(兄弟之邦)’으로 칭하며 정치·외교·군사 협력을 이어갔습니다. 국공내전 중임에도 장제스(蔣介石, 당시 국민당 총재)는 1949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대한민국을 비공식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과 진해회담을 가졌습니다.   1953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이 장제스 대만 총통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공산당의 대륙 장악 위기 속에서 반공 동맹을 모색한 자리였지만, 장제스 정부는 타이완으로 넘어갔고 10월 1일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중화민국을 자유중국이라고 불렀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공’이라고 불렀지요.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 음식점에는 장제스의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6.25 전쟁에서 ‘중공’은 북한을 지원하였고 UN군이 압록강까지 진출하여 북한 정권이 붕괴 위기에 빠지자 직접 참전하였어요.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야간 기습 공격으로 UN군을 다시 남쪽으로 밀어 냈어요. 중국 측에서는 당시 사망자를 약 18만 3천 명, 부상자를 약 38만 명 수준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1958년까지 북한에 머물렀지요. 세계사의 흐름 거부하지 못한 대만과의 단교 1971년 10월 25일 제26차 유엔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이때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부는 반대표를 던졌지요. 박정희는 1966년 2월 중화민국에서 열리는 아시아반공연맹 제3회 총회 참석을 겸해서 국빈 방문을 할 정도로, 반공을 내세우고 독재를 하던 장제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1966년 박정희의 대만 방문. 장제스 총통이 공항까지 직접 마중을 나왔다. 일본은 이미 1972년에 단교를 했고 미국은 1992년에 단교를 했지만, 한국은 중화민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서울과 타이베이에 대사관을 계속해서 서로 유지했어요. 오히려 실무협력을 강화하면서 경제·무역 중심으로 교역량을 확대하여, 1970년대 연 10억 달러에서 1991년에는 70억 달러로 급증하였습니다. ​그런데 냉전 종식과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을 위해 노태우 정부는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한중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했습니다. 중국이 요구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중화민국과 단교를 수용했지요. 이는 중화민국의 강한 항의를 불렀고, 대사관 폐쇄를 통해 양국의 공식 관계는 종료되었습니다.   1992년 주한 중화민국 대사관의 마지막 국기 하강식. 지금의 대중 관계는 대만과도 이어지는 이중구조 갑작스런 한국의 대만 단교는 ‘기습적·비우호적 통보’로 여러 외교적 결례 논란이 제기되었어요. 한중 수교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사전 특사 파견이나 친서 전달 등 우방국 간의 예우 조치가 전무했고, 수교 발표 직전까지 사실무근으로 부인했습니다. 대만 외교부는 눈치를 채고 선제적으로 8월 22일 한국과의 단교 선언으로 대응했습니다. ‘72시간 내 모든 외교관 퇴거와 대만 자산을 중국에 인계하라’고 요구한 점도 맹방에 대한 예의 없는 통보”로 비판받았어요. 대만에서는 태극기 소각 시위와 한국 상품 불매·간판 철거 운동 등 격렬한 반한 정서를 표출했습니다. 대만 정부는 옛 친구를 발로 차 버렸다”, 천심(天心)을 저버린 행위”라는 강한 성명으로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1993년 이후 한국은 주타이베이 대표부, 대만은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를 설치해 비공식·실무 관계를 유지했고, 경제·문화·인적 교류는 민간 채널 중심으로 지속·확대되었어요. 국제법적으로는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만을 중국으로 승인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만과도 경제·관광·학술 교류를 활발히 유지하는 이중구조입니다. 대만은 비록 외교적으로는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경제와 문화적으로는 이미 선진국에 들어서 있는 나라이지요. 국민 1인당 GDP도 3만 8748달러로서 2025년에는 한국을 추월했습니다. 아울러 대만에 대한 한국의 수출은 최근에 급증하여 작년에는 세계 4위의 교역국이었으며, 특히 180억 달러 넘는 흑자를 기록한 국가이지요.   대만 출신 여가수 쯔위의 귀국 공연을 환영하는 대만 언론들. 2025년 11월 대만 방송 화면 갈무리 한국 드라마와 가수들의 인기를 통해 한류라는 개념이 처음 생긴 것도 대만입니다. 지금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높은 것을 여러 통계로 알 수 있어요. 따라서 중국과의 관계를 잘 관리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대만에 대한 민간 차원의 교류와 협력을 잘 가꾸어 나가, 1992년의 오류를 다시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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