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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다석의 한글철학 ㉝] 맨(夷), ‘꾸밈없’의 극치

[다석의 한글철학 ㉝] 맨(夷), ‘꾸밈없’의 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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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夷)를 ‘맨’이라 했다. ‘큰길’이란 꾸밈과 기교가 덧붙기 이전의 평평함이며, 가장 본래적인 상태다. 그러나 이 맨한 길은 늘 눈앞에 있으면서도 좀처럼 안 보인다. 사람들은 멀리 돌아가며 특별한 해답을 찾지만, 정작 삶을 살리는 길은 언제나 발밑에 놓여 있다. 다석 류영모가 노자 늙은이를 풀이하며 되살린 사유는 이 보이지 않는 맨길을 다시 드러내는 일이다. 그가 말한 길은 화려한 우회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걸을 수 있는 큰길이며, 동시에 가장 빠르게 본래로 돌아가는 지름길이다. 이 길은 분별과 경쟁을 앞세운 문명의 길이 아니라, 섞임 없이 어짊을 품어온 동이(東夷)의 심성에서 비롯된다. 이 글은 맨하되 안 보이던 그 큰길을, 우리말 사유를 통해 다시 밝히려는 작은 시도다. [다석의 한글철학]에 가져다 쓰는 노자 풀이는 다석 류영모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가져왔기에 띄어쓰기, 하늘아(), 이어쓰기를 그대로 두었다. 열쇳말 : 맨-안 보임-큰길-지름길-동이   그림1) 백자 청화산수화조문 항아리다. 조선 후기, 18세기 중·후반경에 경기도 광주 왕실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한국의 청화백자. 현재 용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국보 제263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려한 문양보다는 그 문양을 살려주는 ‘맨 바탕’의 흰색에 주목한다. 백자의 넉넉한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결핍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는 완전한 순수”를 상징한다. #1. 맨(夷): 있는 그대로 ‘맨’은 깨끗 우리말에 ‘맨’이라는 접두사가 있다. ‘맨손’, ‘맨발’, ‘맨주먹’, ‘맨몸’…. 무엇인가 걸치거나 가지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맨’을 가난하고 초라한 것으로 여긴다. 맨땅에 헤딩한다”는 말처럼 무모하고 대책 없는 상태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석 류영모에게 이 ‘맨’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이다. 맨(만)들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맨으로 들어냈다는 뜻이다. 하느님이 이 우주를 맨드신 것이다. 곧 맨손으로 들어내 놓았다.”(다석어록) 그는 노자 늙은이가 말한 ‘이(夷)’를 ‘맨’으로 풀었다. 한자 사전에서 ‘이(夷)’는 주로 ‘오랑캐’로 풀이되지만(그리 된 지는 700년밖에 안 됐다. 그 이전에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 본래 뜻은 ‘평평하다(平)’, ‘온화하다’, ‘안보이다’는 뜻이다. 다석은 이 깊은 뜻을 우리말 ‘맨’에 담았다. ‘맨’은 아무것도 없는 결핍이 아니라,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순수’이자 ‘지극한 평탄함’이다. 갓난아기의 ‘맨살’이 가장 곱고, 거짓 없는 ‘맨마음’이 가장 힘이 세듯, 진리는 복잡한 장식이 다 떨어져 나간 ‘맨’ 자리에 깃든다. 큰길은 맨(夷) 늙은이는 53월에 큰 길이 너무도 맨(大道甚夷)이라고 했다. 다석은 이를 큰길은 넘으도 맨이지만(평평하고 순탄함)”이라고 풀었다. ‘너무도’를 ‘넘으도’로 한 까닭은 소리는 같으나 그 뜻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너나는 진리의 길이 아주 험난하거나, 비법이 숨겨진 미로일 거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진짜 ‘큰길’(大道)은 울퉁불퉁하지 않다. 꼬불꼬불하지도 않다. 마치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뚫려 있고 아주 평평하다. 이것이 ‘맨’이다. 장애물이 없고, 숨겨진 함정이 없고, 특별한 기교가 없는 길.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해서 오히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길. 밥 먹고 똥 싸고 잠자는 것”처럼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길(道)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 길의 ‘맨’ 성질을 두고 한 말이다. 진리는 화려한 포장지 속에 있지 않고, ‘맨’ 밥처럼 담백한 일상 속에 있다. 정직한 길은 예부터 하늘에서 주어진 길로 모든 성현들이 걸어간 길이다. 이 길만이 마음놓고 턱턱 걸어갈 수 있는 길이요 이 길만이 언제나 머리를 들고 떳떳하게 걸어갈 길이다. 모든 상대(相對)를 툭툭 털어 버리고 오로지 갈 수 있는 길은 곧은 길뿐이다.”(다석어록) 못보니 이르자면 ‘맨’에는 또 하나의 깊은 뜻이 있다. 바로 ‘안 보임’이다. 늙은이는 14월에서 보아 못보니 이르자면 뭖(夷). 들어 못들으니 이르자면 뭟(希). 쥐어 못그리금 이르자면 뭗ㅎ微).”이라고 했다. 왜 안 보일까?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빨강, 파랑 같은 색깔이 있으면 눈에 확 띈다. 오죽하면 늙은이는 다섯 빛갈이 사람 눈을 멀게”(12월)이라 했겠는가. 그러나 ‘맨’은 색깔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투명한 물빛이다. 너무 맑고 투명해서 있는 줄도 모르는 상태, 이것이 ‘맨’이다. 다석은 이를 없꼴의 꼴(無狀之狀)”(14월)이라 했다. 세상의 화려한 오색(五色)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지만, 색깔 없는 ‘맨’은 만물의 바탕이 되어 모든 색을 살려낸다.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살리듯, 길(道)은 ‘맨’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맨눈’을 뜰 때 비로소 이 보이지 않는 ‘맨’을 볼 수 있다. 이 해 아래 있는 것은 낮은 것이다. 낮아졌으니 올라가자는 것이다. 빔(空)이 낮아진 것이 빛이고, 빛이 낮아진 게 몬(物)이고, 몬이 낮아진 게 몬지(먼지)이고 이 먼지로 된 것이 빛깔(色)이다.”(다석어록) 꾸미지 않은 소박 ‘맨’은 섞이지 않은 것이다. 술에 물을 타지 않은 것을 ‘맨술’이라 하고, 밥에 잡곡을 섞지 않은 것을 ‘맨밥’이라 한다. 이것이 ‘순수’다. 다석사상에서 ‘맨’은 하느님의 깊은 바탈(性)이다. 하느님은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영(靈), 즉 ‘맨얼’이시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은 이 ‘맨’ 상태를 잃어버리고 욕심과 거짓이라는 찌꺼기가 섞였다는 뜻이다. 너나가 속알 바탈을 닦아가는 까닭은 저절로 ‘맨’이 솟구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제옳건이’의 옷, ‘제봐란이’의 옷, ‘제자랑이’의 옷을 하나하나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맨몸’과 ‘맨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다. 다석은 평생을 무명옷 한 벌로 살며, 그 삶 자체가 ‘맨’이 되기를 원했다. 꾸미지 않은 소박함(質樸), 그것이 길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정말 참사람은 순금이나 비단을 무겁게 몸에 갖추지 않는다. 정말 홀가분한 것을 알려면 빈탕한데(虛空)에 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면 얼을 담은 몸이 홀가분하게 살 수 있다.”(다석어록) 본래 ‘맨’ 사람 우리 겨레를 예부터 ‘동이(東夷)’라 불렀다. 큰 나라는 이를 ‘동쪽 오랑캐’라 비하했지만, 다석은 이를 동쪽에 사는 맨 사람”이라 자랑스럽게 해석했다. 큰 활(大弓)을 메고 다니며, 마음이 평평하고(平) 어질어서(仁) 싸움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리 조상 ‘맨 사람들’이다. 산을 좋아하고 흰옷을 즐겨 입었던 것도 이 ‘맨’ 마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맨’을 잃어버렸다. 가면으로 얼굴을 덮고, 반짝이는 옷으로 몸을 감추고, 과장과 허세로 마음을 포장한다. ‘맨’을 부끄러워하고 ‘덧칠’을 자랑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너나는 병들었는지 모른다. 다시 ‘맨’을 회복해야 한다. 가면을 벗은 ‘맨얼굴’로 거울을 보고, 가식을 벗은 ‘맨마음’으로 이웃을 만나야 한다. 참은 맨이다.” 이 짧고 강렬한 한마디를 기억해야 하리라.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며, 아무것도 없는 ‘맨’ 자리에 온 우주가 깃들어 있다.   그림2) 고구려 덕흥리 고분 벽화 ‘은하수와 견우직녀’이다. 옛 사람들은 하늘을 밝의 뉘 , 즉 광명의 누리라고 했다. 벽화 속의 소박한 선으로 표현된 은하수와 별자리는 ‘맨’한 하늘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며, 별빛은 영원에서 오는 점자 통신”이라는 다석의 사유를 시각적으로 뒷받침한다. #2. 보아 못봄(視之不見): 맑고 밝은 참 못보는 이름, ‘맨’ 너나는 눈으로 보는 것을 믿는다. 내 눈으로 직접 봤어!”라고 하면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다. 시각은 인간이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는 가장 강력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 늙은이는 너나의 이 믿음을 산산조각 낸다. 14월에서 그는 말합니다. 보아 못보니 이르자면 뭖(視之不見 名曰夷).” 분명히 눈을 뜨고 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너무 멀리 있어서? 아니면 너무 작아서? 아니다. 다석 류영모는 그 까닭을 너무도 맑고 평평하기(맨) 때문”이라고 풀었다. 유리창을 너무 깨끗이 닦아놓으면 유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맑은 물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물이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다. 길(道)이 바로 그렇다. 길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투명하고 순수해서 너나의 탁한 몸눈(肉眼)으로는 감지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안 보임’은 없음이 아니라, ‘지극한 있음’의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보아 못보니’라 했다. 참으로 잘 보려면 눈을 감고 보아야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은 견(見), 시(視)라 하고 눈을 감고 맘으로 보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눈으로는 이 우주의 한 부분밖에 못 본다. 눈을 감고 맘으로 보아야 전체를 볼 수 있다.”(다석어록) ‘맨눈’을 돌이키기 왜 우리는 길을 보지 못할까요? 늙은이는 12월에 다섯 빛갈이 사람 눈을 멀게” 한다고 경고했다. 빨강, 파랑, 노랑… 세상은 온통 화려한 색깔로 우리를 유혹한다. 눈과 맘을 장악한 현란한 영상, 거리의 네온사인, 화려한 옷차림에 눈이 팔려, 정작 보아야 할 ‘생명의 바탕’은 보지 못한다. 이것이 ‘청맹과니(눈 뜬 장님)’다. 노자와 다석은 없몬의 그림(無物之象)”을 강조했다. 진정한 빛은 색깔이 없다. 태양 빛(白色光)은 무색투명하기에 세상 모든 색을 드러나게 해준다. 만약 태양 빛이 빨간색이었다면 세상은 온통 붉게만 보였을 것이다. ‘맨(夷)’은 색깔이 없는 ‘맨빛’이다. 자기 색깔(편견/아집)이 없기에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춰준다. 너나가 길을 보려면 세상의 오색 찬란한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이 투명한 ‘맨눈’을 회복해야 한다. 참빛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다. 태양은 빛이 아니라 빛깔(色)이다. 별빛은 영원에서 오는 점자(點字) 통신이다. 영원한 님(하느님)을 잊지 말고 찾으라는 통신이다. 우리는 소경처럼 더듬어 영원의 소식을 짐작해야 한다.”(다석어록) 온갖 산알 빛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건’에 집착한다. 큰 집, 비싼 차, 빛나는 보석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다석은 말한다. 사람의 몸뚱이라는 것은 벗어 버릴 허물 같은 옷이지 별 것 아니다. … 입은 옷이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해도 낡으면 벗어 던지게 된다. 그것이 비록 살(肉)옷이요 몸(身)옷이라도 늙으면 마침내 벗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드러나는 것은 얼나뿐이다. 얼나는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이시다”(다석어록) 생명을 보라. 사람의 몸뚱이는 보이지만, 그 사람을 살게 하는 ‘숨’은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드는 ‘마음’도, 그를 영원히 살게 하는 ‘얼’도 보이지 않는다. 전기가 눈에 보이나? 전선은 보이지만 전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 보이는 힘이 불을 켜고 기계를 돌린다. 하느님도 마찬가지다. 다석은 하느님을 없이 계신 님”이라 했다. 만약 하느님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우상이다.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눈에 보일 리가 없다. 여닫고 오가고 나들고 나죽는 온갖 산알 빛에 하느님이 계시다. 번쩍이고 반짝이며 흔들어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 없이 계시는 님”이다. 있고 없고 따위가 아니다. 그러니 ‘안 보인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안 보이기에 무한하고, 안 보이기에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이란 보이는 것도 믿고 안 보이는 것도 믿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 ‘참’을 꿰뚫어 보는 통찰이 더 크다.   그림3)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이다. 선비가 엎드려 흐르는 물을 빤히 바라보는 모습은 다석이 말한 ‘관(觀)’, 즉 맘으로 전체를 보는 눈을 상징한다. 바깥 구경이 아니라 내면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속눈’의 살림을 잘 묘사하고 있다. 속눈 떠라 몸눈으로 안 보인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속눈’을 떠야 한다. 이를 심안(心眼) 혹은 혜안(慧眼)이라 한다. 심안에 혜안이 크고, 혜안에 심안이 깊다. 다석은 눈을 감으라”고 가르쳤다. 바깥으로 향하는 감각의 창문을 닫으면, 내면의 창문이 열린다. 52월에 그 입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 몸이 맟도록 힘들지 않고”라고 한 것도 같은 이치다. 눈을 감아 속눈을 여는 것은, 안 보이는 것을 보는 살림이다.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캄캄하지만, 마음이 고요해지면 서서히 내면의 빛이 떠오른다. 나의 양심이 보이고, 우주의 이치가 보이고, 하느님의 뜻이 느껴진다. 늙은이는 이를 지게문을 나지 않고 셰상을 알며(不出戶知天下)”라고 했다. 밖으로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눈(견, 見)이 아니라, 안으로 꿰뚫어 보는 눈(관, 觀)을 뜰 때, 비로소 ‘맨(夷)’의 세계가 환하게 드러난다. 진리는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서 느끼는 것이다. 이를 꿰뚫어본다(직관, 直觀)고 한다. 이때 비로소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이는 어머니가 준 눈으로 어머니를 보듯이 하느님이 주신 얼(靈)로 얼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다석어록) 빔(虛) 보는 슬기 ‘안 보임’을 보는 것이 진짜 슬기다. 꽉 차서 드러나 있는 것은 누구나 본다. 그러나 그 사이의 ‘빈탕(虛空)’을 보는 사람은 드물다. 그림을 볼 때도 그려진 사물만 보지 말고 여백을 보아야 한다. 음악을 들을 때도 소리만 듣지 말고 소리 사이의 침묵을 들어야 한다. 사람을 볼 때도 그의 외모나 지위만 보지 말고, 그 내면에 깃든 텅 빈 ‘얼’을 보아야 한다. 다석은 하늘은 텅 비어 있기에(안 보이기에) 만물을 덮을 수 있다”고 했다. ‘안 보임’은 없음이 아니라, 모든 있음을 감싸 안는 거대한 품이다. 너나는 지금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산다. 시각 공해 속에 시달리고 있다. 잠시 눈을 감아 보라.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바람결을 느끼고, 보이지 않는 맘속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 그 ‘안 보임’의 자리에서, 가장 뚜렷하고 선명한 진리인 ‘맨’을 만나게 될 것이다. ‘늘’은 보이지 않는다. ‘늘’은 쉬지 않는다. 끊이지 않는다. 태극(太極)은 하느님이시다. 우주는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이다. 이 하나가 늘이라 한늘이라고 한다.”(다석어록)   그림4)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해상군선도)’. 가운데 파도 그림을 보아야 한다. 다석은 진리를 투명한 물빛에 비유했다. 거침없이 흐르는 파도의 맨살은 ‘함없(無爲)’의 길을 걷는 물의 성질을 잘 보여주며, 썩잘은 물과 같다”는 다석의 관점을 시각화한다. #3. 큰길(大道): 시원하게 뚫린 길 참 길은 너무도 쉬워 사람들은 흔히 ‘길(道)을 닦는다(혹은 도를 닦는다)’고 하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 고행을 하거나, 남들이 모르는 어려운 비법을 찾아 헤매는 것을 상상한다. 진리는 아주 높고 멀리 있어서, 가시밭길을 헤치고 벼랑을 기어오르는 고통을 겪어야만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노자 늙은이는 53월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큰길은 넘으도 맨(大道甚夷).” 여기서 ‘맨(夷)’은 평평하다, 순탄하다는 뜻입니다. 다석 류영모는 이를 큰 길은 아주 평탄하다”고 풀었다. 참올(眞理)의 큰길(大道)은 울퉁불퉁한 자갈길도 아니고, 꼬불꼬불한 미로도 아니다. 마치 잘 닦인 고속도로처럼 앞이 탁 트이고 바닥이 고른 시원한 길입니다. 우리가 길을 힘들게 가는 이유는 길이 험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자꾸만 평탄한 큰 길을 놔두고, 욕심을 부려 험한 샛길로 빠지기 때문이다. 길(道)은 어렵지 않다. 너무 쉬워서 오히려 믿지 못할 뿐이다. 지름길로 가는 것은 협잡꾼이다. ‘살기는 너른 데서, 가기는 환히 넓은 길로, 뜻대로 되면 씨알과 함께 가고 뜻대로 안 되면 나 혼자서 가련다.’ 맹자의 이 말씀은 훌륭한 바이블이다. 성경말씀 안 될 게 없다.”(다석어록) 너무도 ‘맨’해서 의심받는 길 ‘큰길’은 화장하지 않은 ‘맨얼굴’과 같다. 꾸밈이 없고 담백하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고 자극적인 유혹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길을 시시하게 여긴다. 에이, 그건 너무 뻔한 얘기잖아. 착하게 살라니, 누가 그걸 몰라?” 사람들은 뻔한 상식(맨길)보다는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신비한 이론이나, 일확천금을 약속하는 비법에 열광한다. 그러나 다석은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평범 (平凡)을 좇지 않고 자꾸 진미 (珍味)만을 찾는다. 본체는 언제나 평범한 것이다. 깬 사람은 언제나 평범을 찾는다. 평범한 것이 본래적인 것이다.” 밥 먹고, 잠자고, 제 분수를 지키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 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바로 ‘큰길’이다. 이 길은 너무도 ‘맨’해서 아무 맛도 없는 물 같지만, 바로 그 물이 우리 생명을 살린다. 자극적인 탄산음료는 입을 즐겁게 하지만 몸을 망치듯, 화려한 가짜 길은 귀를 즐겁게 하지만 영혼을 병들게 한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길 ‘대도(大道)’는 ‘큰길’이자 ‘공공의 길’이다. 어느 특정 종교나 집단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녀노소, 유식무식,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걸을 수 있는 보편적인 길이다. 다석은 하늘 길은 뻥 뚫려 있다”고 했다. 통행료를 낼 필요도 없고, 자격증을 따야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오직 ‘양심’이라는 두 발만 있으면 누구나 걸을 수 있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했고, 공자는 아침에 길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성인들이 걸어간 길은 특수통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땅히 걸어야 할 ‘큰길’이다. 그 길은 숨겨져 있지 않다. 우리 눈앞에, 우리 마음속에 아주 넓고 환하게 열려 있다. 다만 우리가 욕심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할 뿐이다. 사람의 아들(人子)은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간다. 이보다 환한 길은 없다. 이 길을 틀리지 말고 곧장 쪽바로 가는 것이 참(眞)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 얼나(命)이다.”(다석어록)   그림5) 조선 전기 회화 ‘몽유도원도(夢유桃源圖)’의 기암괴석을 보아야 한다. 안견이 그린 도원의 평평한 땅과 험준한 바깥세상의 대비는 ‘큰길은 넘으도 맨(夷)’이라는 노자의 선언을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복잡한 세상을 지나 도달하는 ‘맨’한 평화의 세계를 상징한다. 안전하고 편안한 길 ‘큰길’(大道)의 미덕은 ‘안전함’에 있다. 험한 산길은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만, 평탄한 큰길은 넘어져도 무릎 좀 까지는 게 전부다. 다석은 마음이 평안하면 바른 말을 할 수 있다. 바른 말을 할 수 없으면 마음이 평안치 않다. … 참으로 평안한 것은 자꾸 애써 참말만 하고 싶어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모르는 그 지경에 가면 참에 들어가는 것이다. 비뚤어진 마음처럼 불안한 것은 없다.”고 했다. 순리대로 사는 삶,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삶은 마음이 편안하다. 밤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다. 이것이 ‘맨길’을 걷는 즐거움이다. 반면 꼼수와 편법을 쓰는 삶은 늘 불안하다. 언제 들킬지 모르고,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 그것은 벼랑 끝을 걷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스릴을 즐기며 그 험한 길을 가지만, 그 끝은 막힘이 드러난 길이다. 너나는 인생을 스스로 어렵게 꼬아 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잡한 계산과 처세술로 머리를 굴린다. 그러나 늙은이는 말한다. 그냥 맨길로 가라.” 정직하게, 단순하게, 순리대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전한 길이다. 닦아서 가라 물론 ‘큰길’이라 해서 저절로 가지는 것은 아니다. 늙은이는 길을 몸에 닦아야 한다”고 했다. 몸에 닦아서 그 속알이 이에 참ᄒᆞ고”(54월)라 한 것이다. 몸을 길에 닦는 게 아니다. 길을 몸에 닦아서 참한 것이다. 이미 누가 닦아놓은 아스팔트 길을 편하게 차 타고 가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의 잡초를 뽑고, 욕심의 돌부리를 치우며, 내 몸으로 꾹꾹 밟아 다지는 길이다. 내가 걸어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내가 평탄한 마음(平心)을 먹으면 내 앞길도 평탄해진다. 내가 꼬인 마음을 먹으면 내 앞길도 꼬인다. 그러니 길 탓을 하지 말아야 하리라. 길이 험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험한 것이다. 오늘 하루,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고 단순하게 살아보자. ‘맨’ 마음으로 밥을 먹고, ‘맨’ 마음으로 일을 하고, ‘맨’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보자. 아무런 기교도 부리지 않는 그 소박한 하루가, 사실은 우주의 ‘큰길’(大道)를 걷는 가장 위대한 발걸음이다. 큰 길은 너무도 맨이다.” 이 시원한 선언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뚜벅뚜벅 평탄한 길을 걸어가라. #4. 지름길(徑): 위험한 길 1. 지름길은 유혹 노자 늙은이는 53월에서 탄식한다. 큰길은 넘으도 맨이지만, 씨알은 지름길을 좋아ᄅᆞ(大道甚夷 而民好徑).” 여기서 ‘지름길(俓)’은 샛길, 오솔길이기도 하지만, 사악한 길도 뜻한다. 왜 사람들은 넓고 안전한 ‘큰길’(맨길)을 놔두고 좁고 위험한 지름길로 몰려갈까? 큰길은 너무 ‘맨(심심)’하기 때문이다. 착하게 살아라, 성실해라, 정직해라…. 이런 말들은 너무 뻔하고 지루하게 들린다. 반면에 지름길은 짜릿하다. 단기간에 대박 나는 법”, 노력 없이 성공하는 법”, 남 몰래 즐기는 쾌락”…. 지름길은 너나에게 요령과 꼼수를 속삭인다. 남들보다 빨리 가고 싶고, 남들보다 더 갖고 싶은 욕심(하고잡)이 우리를 샛길로 유혹한다. 노자 늙은이는 사람들이 길(道)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길의 ‘심심함’을 못 견디는 것”이라고 꿰뚫어 보았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참을 수 없으면 급히 서둘게 된다. 천천히 찾으면서 가는 사람이 바른 것을 찾는다. 급하게 서둘러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니까 결국에는 피까지 흘리게 된다. … 불가능한 것을 급하게 가능케 하려면 그것은 사견(邪見)이라 도적놈밖에 되지 않는다.”(다석어록) 2. 지름길은 죽는 길 지름길은 언뜻 보면 빨라 보인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큰길을 가로질러 가니 시간도 절약되고 힘도 덜 드는 것 같다. 이것이 ‘효율’의 함정이다. 그러나 지름길은 좁고 험하다. 낭떠러지를 끼고 있고, 가시덤불이 우거져 있다. 무엇보다 지름길에는 ‘강도’가 숨어 있다. 늙은이는 지름길의 끝에 도적 브름(盜夸)”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고, 급히 가는 길이 망하는 길이다. 인생에는 건너뛸 수 없는 과정이 있다. 세상에 노력하지 않고 거저 되는 게 없다. 예수라고 해서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잠 안 자는 독서, 잠 못 자는 고뇌, 밥 잊은 명상 속에서 이루어진 인격이다.”(다석어록)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땀 흘려야 가을에 거두는 것이 자연의 ‘큰길’이다. 그런데 땀 흘리기 싫어 투기를 하고, 사기를 쳐서 열매만 따려는 것은 ‘지름길’이다. 지름길로 흥한 자는 반드시 지름길로 망한다. 기초가 없기에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길은 가장 정직한 길”이라는 옛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그림6) 조선 시대 ‘평생도(平生圖)’ 중 ‘회갑연’ 장면이다. 고위 관료의 화려한 행차와 연회 장면은 조정은 넘으도 말숙ᄒᆞ고”라는 구절을 시각화한다. 백성의 밭은 거칠어지는데 관가(조정)만 번지르르하게 닦인 모순된 풍경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 그림의 뜻을 위해 가져왔을 뿐 그림 속 실제 인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창고는 비었는데 옷만 화려하다 사람들이 모두 지름길로 빠지면 세상은 어떤 꼴이 될까? 늙은이는 53월에서 그 참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조정은 넘으도 말숙ᄒᆞ고(朝甚除), 밭은 넘으도 거치렀고(田甚蕪), 창고는 넘으도 븨였고(倉甚虛)”, 그런데도 빛난 옷들을 입고(服文綵), 날카론 칼들을 차고(帶利劍), 싫도록 먹고, 마시고(厭飮食), 쓸몬이 남아 있다(財貨有餘). 이 말ᄒᆞ자면, 도적 브름이지(是謂盜夸), 길 아니로다!(非道也哉)” 정치하는 곳(조정)은 겉만 번지르르하게 닦아놓았지만, 정작 씨알의 삶(밭)은 황폐해지고 나라의 곳간(창고)은 텅 비었다. 그런데도 힘을 쥔 자들은 지름길로 긁어모은 돈으로 빛난 옷을 두르고, 권력(칼)을 휘두르며, 호의호식한다. 이것이 바로 ‘지름길을 좇는 씨알 무리의 꼴짓이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은 바보가 되고, 투기와 편법을 쓰는 사람이 주인 행세를 한다. 이것은 도둑놈의 심보다. 속알(창고)은 텅 비었는데 겉치레(빛난 옷)만 요란한 것, 이것이 지름길을 좇는 자들의 말로다. 권력과 금력으로 호강하겠다는 것은 제가 땀 흘릴 것을 남에게 대신 흘리게 해서 호강하자는 것이니 그 죄악은 여간한 것이 아니다.”(다석어록) 오직 알짬 ᄆᆞᆷ(精誠) ‘경(徑)’ 자에는 ‘지름길’이라는 뜻 외에도 ‘꼼수’, ‘잔재주’라는 뜻이 있다. 현대인은 머리가 너무 좋다. 어떻게 하면 법망을 피할까,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덜 낼까, 어떻게 하면 남을 이용할까…. 온통 머리 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다석은 말한다. 하늘 그물은 성글어도 빠뜨리지 않는다.” 인간의 잔재주로 세상의 눈은 잠시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늘눈’(天眼)은 속일 수 없다. ‘맨길’은 하느님이 닦아놓은 길이라 영원하지만, ‘지름길’은 인간의 욕심이 만든 길이라 빗물에 쓸려나간다. 다석은 평생 ‘바보’처럼 살았다. 요령을 피울 줄 몰랐고, 남을 속일 줄 몰랐다. 그저 우직하게 하루 한 끼 먹고, 하루 종일 무릎 꿇고 기도하며, 자기가 닦은 ‘맨길’을 걸어갔다. 사람들은 그를 미련하다 했을지 몰라도, 그는 결국 영원한 생명의 정상에 도달했다.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오직 정성(精誠)만이 하늘에 닿는다. 사물(事物)에 대하여는 징검다리를 디디듯이 모두를 하나하나씩 지성(至誠)으로 디뎌야 한다. 곧이 곧장하게 온전히 밀고 잘 건너가야 한다. 잘못 디디면 허방에 빠진다. … 미끄러지지 않고 줄곧 가서 궁극에는 지선(至善)의 자리에 딱 들어서게 되어야 한다.”(다석어록) 맨길로 돌아오라 너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혹시 이번 한 번만”이라며 슬쩍 지름길로 발을 들이지는 않았는가?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라며 불법과 타협하지는 않았는가? 지름길은 중독성이 있다. 한 번 맛들이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벼랑이 기다리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발길을 되돌려야 한다. 늙은이가 말한 큰길은 넘으도 맨(평탄)”한 그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좀 늦게 가면 어떤가? 좀 덜 가지면 어떤가? 마음 편하게, 당당하게, 내 두 다리로 튼튼하게 걷는 그 길이 진짜 내 길이다. 화려한 유혹을 뿌리치고, 묵묵히 저 평범하고 심심한 ‘큰길’을 걷는 사람. 그가 진정한 용기 있는 사람이요, 늙은이를 따르는 이다. 지름길의 유혹에 흔들릴 때마다 주문처럼 외워보라. 나는 지름길을 버리고 맨길을 간다. 나는 도둑이 아니라 늙은이다.” 다석은 이렇게 말했다. 저녁 끼니가 없어도 천명(天命)이면 산다는 신념을 얻어야 한다. 다 도둑질을 하여도 나는 도둑질을 않겠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림7) 무속화(굿그림) ‘제석신도(帝釋神圖)’이다. 삼신(三神) 혹은 한웋님을 모시는 민간의 소박한 믿음이 담긴 그림이다. 다석은 우리 선조들이 하느님을 ‘검님’이라 불렀다고 했다. 꾸밈없는 선과 색으로 그려진 제석신은 ‘동이(東夷)의 심성’과 하느님을 향한 ‘맨마음’을 잘 나타낸다. #5. 동이(東夷): 동쪽의 맨 사람들 오랑캐 아닌 ‘맨 사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큰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中華)이라 뽐내며, 주변 민족들을 오랑캐라 낮춰 불렀다. 그래서 우리 겨레를 가리키는 ‘동이(東夷)’를 ‘동쪽 오랑캐’라고 얕잡아 왔다. 말도 안 된다. 너나는 학교에서조차 이 부끄러운 이름을 그대로 배웠다. 그러나 다석 류영모는 이 낡은 사대주의의 해석을 단칼에 베어버린다. 이(夷)는 오랑캐가 아니다. ‘맨’이다. 동이는 ‘동쪽의 맨 사람들’이다.” 앞서 너나는 노자 늙은이가 큰길은 넘으도 맨(夷)이다”라고 했을 때, ‘이(夷)’가 ‘평평하다’, ‘순탄하다’, ‘꾸밈없다’는 뜻임을 보았다. 그러므로 동이는 야만인이 아니라, ‘가장 평탄하고 순수한 마음(맨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으로 온 본래의 성품(바탈)을 잃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맨’ 모습을 간직한 천손(天孫) 민족, 이것이 다석이 찾아낸 우리 겨레의 진짜 이름이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검님이라고 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도 검님의 뜻이다. 단군이 곰(熊)의 아들이란 하느님의 아들이란 뜻이다. … 우리가 말하고 듣고 하는 것도 이 속에 있는 검님이 알리니까 그렇지 검님이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라고. 큰 활 멘 사람들(大弓) ‘이(夷)’ 자를 뜯어보면 ‘큰 대(大)’ 자와 ‘활 궁(弓)’ 자가 합쳐져 있다. 즉, ‘큰 활을 멘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 민족이 예부터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다석은 이를 단순히 무기로만 보지 않았다. 활은 ‘곧음(直)’의 상징이다. 굽은 것을 펴서 곧게 만드는 것이 활이다. 또한 활은 ‘겨냥’이다. 우리의 활은 사람을 죽이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저 높은 하늘의 뜻, 즉 과녁(적, 的)을 꿰뚫는 데 목적이 있다. 다석은 우리 겨레가 큰 활(大弓)을 메고 다니며, 굽어진 세상을 바로잡고 하늘의 뜻을 쏘아 올리는 영적인 사명을 띤 민족이라 보았다. 너나 마음속에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굽은 것을 펴려고 하는 대쪽 같은 ‘활’ 하나가 들어있다. 이것이 동이의 기개다. 얼나라는 것의 무한한 가치를 자각하고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쏘아 맞히듯이 곧이 곧고 신성하고 영특하고 영원한 나의 한 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진리의 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이다.”(다석어록)   그림8)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 가운데 활 쏘는 무사를 보아야 한다. ‘이(夷)’ 자의 뜻인 ‘큰 활을 멘 사람(大弓)’을 가장 역동적으로 증명하는 도판이다. 이는 단순히 무기가 아니라 하늘의 뜻(과녁)을 꿰뚫는” 동이족의 영적인 사명과 ‘가온찍기’의 정신을 상징한다. 어짊 사랑한 씨알 무리 공자(孔子)는 논어에서 길(道)이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 가고 싶다”고 한탄하며,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제자들이 누추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군자가 거하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고 답했다. 공자조차도 동이족이 사는 땅을 ‘군자의 나라’, ‘어진(仁) 나라’라며 동경했다. 산해경(山海經) 같은 옛 기록에도 동이는 서로 양보하기를 좋아하고 싸우지 않는 군자국”으로 묘사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우리 조상들이 ‘맨(夷)’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맨’은 평평해서 다툼이 없다. 울퉁불퉁한 욕심이 없기에 남을 해치지 않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맨) 존중해 주었다. 우리는 침략을 당할지언정 먼저 남을 침략하지 않는 평화의 민족이었다. 이것은 무능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아끼고 평화를 사랑하는 ‘맨’ 철학이 뼛속 깊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원수가 없다. 원수까지 사랑하는데 적이 있을 리 없다. 언제나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언제나 무서운 힘을 내놓는 것이 사랑이다.”(다석어록) 흰 옷의 맨 씨알 우리 민족은 유독 ‘흰 옷(白衣)’을 즐겨 입었다. 그래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불린다. 왜 하필 흰색이었을까? 염료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다. 흰색은 ‘맨 빛깔’이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의 색이다. 다석은 흰빛은 빛깔 없는 빛깔이요, 하느님의 빛”이라 했다. 우리 조상들은 화려한 오색으로 치장하기를 거부하고, 가장 소박하고 깨끗한 ‘맨’ 빛깔인 흰 옷을 입음으로써 하늘과 가까워지고자 했다. 이것은 노자 늙은이가 말한 박(樸, 통나무/순수)”의 정신과 정확히 통한다. 꾸미지 않은 소박함, 거짓 없는 진실함. 흰 옷을 입은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걸어 다니는 ‘맨(夷)’이자, 길(道)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어디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면 흰 고무신을 닦게 되는데 웬일인지 자꾸 닦고 싶다. 얼을 담을 몸을 깨끗하게 하고 싶은 것과 같이 신도 자꾸 닦고 싶다. 새로 닦은 신발은 어떻게 귀여운지 먼지나 흙을 묻힐까봐 돌만을 딛게 된다.”(다석어록) ‘맨’의 빛으로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 자랑스러운 이름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동이’가 아니라 ‘돈이(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물질문명을 좇느라 우리의 ‘맨’ 마음을 버리고, 화려한 겉치레와 경쟁에 미쳐 살고 있지는 않는가? 다석 류영모는 예언처럼 말했다. 이 나라가 세계의 머리골이 될 것이다.” 이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물질에 중독되어 길을 잃은 인류에게, 잃어버린 정신의 고향인 ‘맨’을 되찾아주는 영적인 나라가 된다는 뜻이다. 가장 평범하고 순수한 것이 가장 위대한 것임을 보여주는 ‘맨’의 철학. 전쟁과 다툼을 멈추고 평평한 평화의 길을 여는 ‘동이’의 정신. 이것이야말로 21세기 인류가 간절히 찾는 ‘큰길(大道)’이다. 우리는 동쪽의 오랑캐가 아니다. 동쪽에서 해가 뜨듯, 인류의 새로운 정신적 아침을 열어갈 ‘동쪽의 맨 사람들’이다. 자, 이제 어깨에 멘 큰활, 큰 둥긂(弓弓)을 꺼내야 하리라. 그리고 욕망의 과녁이 아니라, 평화와 진리라는 하늘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겨야 하리라. 하느님 나라는 침략해도 좋다고 언제나 열려있다. 얼은 아니 계시는 곳이 없는데 닫을 수가 없다. 우리는 앞장서서 하느님 나라로 쳐들어가야(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 있다.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길은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까지 가는 원정이다.”(다석어록) [부록] 다석 류영모의 우리말 철학 용어 풀이 1. 맨 (夷) : 꾸밈과 기교가 덧붙기 이전의 평평함이자 가장 본래적인 상태. 풀이: 아무것도 없는 결핍이 아니라, 더 이상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한 순수’이자 ‘지극한 평탄함’을 의미하며 다석은 이를 하느님이 우주를 ‘맨드신’ 맨손의 거룩함으로 풀이 2. 큰길 (大道) : 화려한 우회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걸을 수 있는 공공의 길. 풀이: 장애물이나 숨겨진 함정, 특별한 기교가 없는 길로, 밥 먹고 잠자는 지극히 평범하고 담백한 일상 속에 놓여 있는 진리의 길 3. 안 보임 (視之不見) : 너무 맑고 투명해서 있는 줄도 모르는 상태. 풀이: ‘맨’의 성질 때문에 색깔이 없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며, 이는 ‘없’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공기처럼 ‘지극한 있’을 역설적으로 나타냄 4. 맨마음 : 욕심과 가식이 없는 평평하고 거짓 없는 마음. 풀이: 울퉁불퉁한 욕심이 없어 남을 해치지 않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마음이며, 하느님 앞에 벌거벗은 채로 서는 가장 힘이 센 마음 5. 소박 (質樸) :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은 상태로 길(道)에 가장 가까운 모습. 풀이: 통나무(樸)와 같은 근원적인 순수함을 뜻하며, 화려한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홀가분하게 빈탕한데(虛空)의 얼로 이어져 사는 삶의 태도 6. 동이 (東夷) : 동쪽에 사는 ‘맨 사람’. 풀이: ‘이(夷)’를 오랑캐가 아닌 ‘맨’으로 해석하여, 가장 평탄하고 순수한 마음(맨마음)을 지닌 천손 민족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겨레의 정체성을 밝힘 7. 큰 활멘 사람 (大弓) : ‘이(夷)’ 자의 자원(字源) 풀이로, 굽은 것을 펴서 곧게 만드는 존재. 풀이: 굽어진 세상을 바로잡고 하늘의 뜻이라는 과녁을 향해 곧장 시위를 당기는 영적인 사명을 지닌 동이족의 기개를 상징 8. 어짊 (仁) : 서로 양보하며 싸우지 않는 군자국의 덕목 . 풀이: ‘맨’ 마음을 지녔기에 울퉁불퉁한 욕심이 없고, 침략을 당할지언정 먼저 침략하지 않으며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는 평화의 철학 9. 지름길 (徑) : 큰길을 놔두고 욕심에 끌려 빠지는 위험한 샛길이나 편법. 풀이: 효율과 대박을 좇는 꼼수와 잔재주를 의미하며, 언뜻 빨라 보이지만 결국 강도(도적)를 만나 망하게 되는 죽음의 길 10. 도적 브름 (盜夸) : 지름길로 긁어모은 부당한 소유를 자랑하는 태도. 풀이: 정직하게 땀 흘리지 않고 남의 것을 가로채어 호의호식하는 죄악으로, 속알(창고)은 비었으면서 겉치레(빛난 옷)만 요란하게 꾸미는 허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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