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에 가린 혁명의 불편한 진실, 피델 카스트로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쿠바의 어두운 소식들이 연일 전해지고 있다. 카리브해의 따뜻한 햇살 아래 럼주와 시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섬나라다. 한 남자가 반 세기 가까이 이 나라의 권력을 틀어쥐고 미국의 코앞에서 어쩔 건데? 를 외쳤다.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Fidel Alejandro Castro Ruz, 1926~2016)는 혁명가, 독재자, 해방자, 억압자 등등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불릴 수 있는 수식어가 달라진다. 그가 옳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기 전에, 우선 그가 얼마나 기막힌 이야기 속에 살았는지를 먼저 들어보자.
1950년대 카스트로.(위키피디아)
변호사가 총을 들면 생기는 일
카스트로는 법대를 나온 변호사였다. 상상해보라. 법정에서 이의 있습니다! 를 외치던 청년이 어느 날 산속으로 들어가 군복을 입었다. 그의 첫 번째 무장봉기는 1953년 7월 26일, 산티아고데, 쿠바에 있는 몬카다 병영 습격이었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 동지 절반이 죽거나 체포됐고, 카스트로 본인도 붙잡혔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재판정에 선 카스트로는 판사 앞에서 무려 네 시간 변론을 펼쳤다. 스스로를 변호한 마지막 문장이 역사에 남았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선언할 것이다.
보통 피고인은 선처를 바랍니다 라며 고개를 숙인다. 이 사람은 재판장에게 역사강의를 했다.
그는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중의 압력에 못 이긴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1901~1973) 정권이 2년 만에 그를 풀어줬다. 이것이 이 독재자의 치명적 실수였다.
피델의 부모인 앙헬 카스트로 이 아르기즈와 리나 루스 곤살레스.(위키피디아)
82명이 혁명을 시작했다
풀려난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했고, 거기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1928~1967)를 만났다.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이며 혁명가. 직업은 카스트로와 달랐지만 꿈은 같았다. 두 사람은 낡은 요트 그란마 (Granma) 호에 82명을 몰아넣어 1956년 12월 쿠바로 돌아왔다. 배는 예정보다 이틀 늦게 도착했고, 기다리던 지지자들과의 합류도 어긋났다. 상륙 직후 바티스타 군대의 기습을 받아 살아남은 자는 고작 20명 안팎.
누가 봐도 끝난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20여 명이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2년 남짓 뒤인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는 짐을 싸서 나라를 떠났다. 혁명군이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카스트로는 서른두 살이었다.
이쯤 되면 영화 대본이라 해도 너무 작위적이다 싶을 이야기다.
1938년의 풀헨시오 바티스타(왼쪽) 장군과 미 육군 참모총장 말린 크레이그. 카스트로는 1953년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하려다 실패했지만 6년 뒤 기어코 무너뜨렸다. (위키피디아)
미국 코앞에서 사회주의를 외치다
집권 이후 카스트로가 한 일들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미국계 기업과 농장을 국유화했다. 소련과 손을 잡았다. 쿠바에서 145㎞ 떨어진 미국 플로리다주의 쿠바 망명객들은 이를 갈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카스트로를 제거하려 시도한 횟수가 공식적으로만 수백 차례. 폭발하는 시가, 독이 든 잠수복, 심지어 그의 수염을 빠지게 만들려는 계획까지 있었다고 한다. 수염을 없애면 카리스마가 사라질 것이라는 기막힌 발상이었다. 카스트로는 끄떡도 없었고, 수염은 끝까지 풍성했다. 미국 대통령은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에서 시작해 오바마(1961~)에 이르기까지 열 명이 바뀌는 동안, 카스트로는 자리를 지켰다.
1961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자들이 피그만 침공을 시도했다가 72시간 만에 궤멸됐다. 1962년에는 소련의 핵미사일 기지가 쿠바에 설치되면서 인류가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가는 쿠바 위기가 터졌다. 그 13일 동안 지구인 모두가 숨을 죽였다.
카스트로 본인은 그 시절을 회고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는 두렵지 않았다.
물론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953년 몬카다 공격 후 체포된 카스트로.(위키피디아)
빛과 그늘, 솔직하게 보자
공정하게 따지면 카스트로의 쿠바는 분명 이룬 것이 있다. 혁명 전 쿠바는 문맹률이 높고 의료혜택이 소수에게만 돌아가는 나라였다. 혁명 이후 쿠바는 문맹을 대대적으로 퇴치했고, 국민 의료를 실현했다. 오늘날 쿠바의 의사 배출 수준과 평균 수명은 소득 수준에 비해 놀랍도록 높다. 가난한 나라가 의사를 길러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파견하는 기이한 나라가 됐다.
그러나 다른 면도 있다. 카스트로 치하에서 수천 명이 정치범으로 수감됐고, 언론은 통제됐으며, 반대의견은 허락되지 않았다. 수십만 명이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탈출했다. 자유가 없는 밥그릇이 행복인가, 자유는 있지만 굶주리는 것이 행복인가, 이 케케묵은 논쟁을 카스트로의 쿠바는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줬다.
그는 2008년 건강 악화로 동생 라울 카스트로(1931~)에게 권력을 넘겼고, 2016년 11월 25일 아흔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아바나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고, 마이애미의 쿠바 망명자들은 거리에 나와 춤을 췄다. 한 사람의 죽음에 이토록 다른 반응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의 복잡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1956년 12월 2일 시에라 마에스트라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부하들.(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카스트로를 읽는다면
자, 이제 시선을 한반도로 돌려보자.
카스트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 이거 어디서 본 구조인데? 싶은 대목이 여럿 있을 것이다. 강대국의 코앞에서 자주를 외치는 작은 나라. 내부의 불평등을 혁명으로 뒤집으려는 열망. 그리고 그 혁명 이후의 권력이 또 다른 억압으로 굳어지는 과정.
한국은 지금 여러 겹의 갈등을 안고 있다. 재벌 중심 경제구조의 불평등, 청년세대의 박탈감, 그리고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남북 갈등과 격차. 카스트로의 쿠바가 보여주는 교훈이 있다면 이것이다. 뜨거운 열망만으로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없다. 바티스타의 부패를 갈아엎은 혁명의 정당성이, 이후 수십 년의 억압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시작이 옳아도 과정과 끝이 함께 옳아야 한다.
거꾸로 배울 것도 있다. 카스트로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끊임없는 압박 속에서도, 경제봉쇄 속에서도 최소한의 사회적 기반, 의료와 교육은 지키려 했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다. 그 나라에서 청년들이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고, 노인들이 폐지를 줍는다면,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결함이다.
2024년 12월 비상계엄 선포와 그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권력은 언제든 스스로를 영속시키려는 본능이 있다. 바티스타가 그랬고, 카스트로 역시 결국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거리에서 촛불을 들거나 헌법재판소 앞에 서는 시민들이 정작 경계해야 할 것은 나쁜 권력 만이 아니다. 좋은 명분으로 포장된 권력의 자기 영속화 , 이것이 20세기의 많은 혁명이 남긴 쓰디쓴 교훈이다.
카스트로는 평생 시가를 피웠다. 의사들이 건강을 이유로 끊으라고 권하자, 나중에 실제로 끊었다. 그리고 말했다.
금연이야말로 제국주의에 대한 가장 큰 승리다.
유머인지 진심인지 모를 이 말 속에, 이 남자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혁명은 낭만적이다. 그러나 이후가 진짜 문제다. 우리는 지금, 그 뒤를 살고 있다.
카스트로(오른쪽)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함께 1959년 1월 8일 하바나에 입성하고 있다.(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