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이커교 어머니, 마거릿 펠… 여성의 발언권 에 헌신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7세기 잉글랜드. 왕이 목 잘리고, 다시 왕이 돌아오고, 종교가 정치요 정치가 종교인 시절. 이 난장판 속에서 한 여성이 펜을 들었다. 이라는 책. 당시로선 거의 혁명선언이었다. 그 여성은 마거릿 펠(Margaret Fell, 1614~1702)이다.
마가릿 펠과 그녀의 저서 여성의 말하기를 변호함 .(Women’s Speaking Justified and Other Pamphlets, Fell, Donawerth, Lush)
판사 부인이 집을 개방하다
마거릿은 1614년 잉글랜드 랭커셔에서 태어났다. 1632년, 열여덟 살에 판사 토머스 펠(Thomas Fell, 1598~1658)과 결혼했다. 판사 부인. 그것도 꽤 넉넉한 판사의 부인. 스워스무어 홀(Swarthmoor Hall)이라는 저택에서 살았으니, 당시 기준으론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 이었다.
그런데 1652년,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라는 떠돌이 설교자가 집 앞에 나타났다. 폭스는 퀘이커교의 초기 지도자로, 성직자도 교회건물도 필요 없고 모든 사람 안에 내면의 빛 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인 성공회 입장에선 위험천만한 이단아였다.
마거릿은 그 설교를 듣고 완전히 뒤집혔다. 어머니가 종교에 빠졌을 때 자녀들이 흔히 보이는 반응처럼, 처음엔 집안이 술렁였다. 하지만 마거릿은 스워스무어 홀을 퀘이커 모임의 중심지로 개방해 버렸다. 저택이 순식간에 17세기 판 시민사회 허브 가 된 것이다.
스워스무어 홀.(위키피디아)
글을 쓰고, 편지를 보내고, 감옥에 갔다
마거릿 펠은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었다. 직접 글을 썼다. 종교 팸플릿을 쏟아냈고, 잉글랜드를 넘어 네덜란드, 심지어 오스만 제국과 유대인 공동체에도 편지를 보냈다. 지금으로 치면 국제 연대 이메일을 수백 통 날린 셈이다. 당시 우편속도를 생각하면 그 집념이 가히 놀랍다.
1658년 남편 토머스 펠이 세상을 떠났다. 보호막이 사라졌다. 마거릿은 곧 왕실예배 참석 거부죄, 불법집회 개최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랭커스터 감옥에 4년(1664~1668년)을 갇혔다. 나이 오십에 감옥살이라니. 그런데 거기서도 글을 썼다.
감옥에서 쓴 글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666년에 펴낸 『여성의 말하기를 변호함』(Womens Speaking Justified)이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성경이 여성의 침묵을 명령한다 는 당대의 상식 에 정면으로 맞선 이 글은, 성경본문을 꼼꼼히 뒤져가며 예수 주변에서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말한 건 여성들이었다 고 논증한다. 신학논문이자 여성인권 선언문이었다.
출감 후인 1669년, 마거릿은 조지 폭스와 결혼했다. 조지는 사십대 중반, 마거릿은 오십대 중반이었다. 인생 2막을 동지와 함께 연 것이다. 물론 결혼 직후 폭스는 또 감옥에 갔고, 마거릿도 재 투옥됐다. 이 부부, 대단히 바쁜 삶을 살았다.
마거릿 펠은 1702년, 약 여든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7세기 여성으로선 경이로운 장수였다.
펠이 여성의 설교 능력을 옹호한 1666년판 『여성의 말하기를 변호함』의 표지.(위키피디아)
그녀가 남긴 것들
마거릿 펠이 역사에 남긴 자취는 세 갈래다.
첫째, 종교적 관용의 씨앗. 퀘이커교는 성직자 계급도, 화려한 예식도, 강제된 신앙고백도 없다. 누구나 모임에 나와 침묵하거나 말할 수 있다. 마거릿은 이 공동체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조직과 재정을 뒷받침했다. 훗날 퀘이커 교도들은 노예제폐지 운동(18~19세기), 양심적 병역 거부(20세기), 각종 평화운동의 선두에 섰다.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이 세운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도 퀘이커 정신의 산물이다.
둘째, 여성신학의 선구. 『여성의 말하기를 변호함』은 서양 여성신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문헌이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년)보다 무려 126년 앞선 주장이었다. 마거릿은 권리를 달라 고 요구하기 전에, 권리가 이미 있음 을 논증했다. 전략적으로도 영리했다.
셋째, 사회운동의 실천 모델. 스워스무어 홀은 탄압받는 사람들의 피신처였고, 편지망의 허브였고, 출판의 근거지였다. 국가권력이 종교모임을 불법화할 때, 마거릿은 사적공간을 공공저항의 장소로 만들었다. 거실 하나가 운동의 심장이 됐다.
어스윅 선브릭에 있는 퀘이커 교도 묘지에 있는 명판, 마거릿 폭스의 안식처.(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읽는 마거릿 펠
물론 한국은 17세기 잉글랜드와 다르다. 광장에서 외쳐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마거릿 펠의 이야기가 완전히 남의 나라 옛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전략적 고소·고발로 발언 비용을 높이고, 조직적 냉소로 목소리를 지치게 만드는 방식은, 감옥 대신 쓰는 현대판 침묵강요이기 때문이다.
마거릿 펠의 첫 번째 교훈은 공간의 정치학이다. 그녀는 국가가 통제하는 공간 바깥, 즉 사적인 저택을 열어 공론장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노동조합 사무실, 동네카페, 독립서점, 시민단체 사랑방이 그런 역할을 해왔다. 광장이 막히면 골목으로, 골목이 막히면 거실로. 공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저항의 시작이다.
두 번째 교훈은 논리로 무장한 저항이다. 마거릿은 여성도 사람이니 말해야겠다 는 감정적 호소만 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언어, 즉 성경으로 상대방의 논리를 반박했다. 지금 한국에서 각종 차별에 맞서는 이들에게도 같은 전략이 필요하다. 분노는 에너지지만, 논리는 무기다. 헌법을 펼쳐 들고, 판례를 외우고, 법조문으로 싸우는 것. 마거릿이 먼저 했다.
세 번째 교훈은 연대의 네트워크다. 마거릿의 편지망은 오늘날 사회관계망(SNS)에 해당한다. 그녀는 국내외 동료들과 끊임없이 연락하며 정보를 나누고 서로를 격려했다. 한국의 진보 시민사회도 각 단체가 고립된 섬이 되지 않으려면 이 편지망 의 현대적 버전을 더 촘촘히 짜야 한다.
네 번째 교훈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인데, 뚝심이다. 마거릿은 50대에 감옥에 갔고, 60대에 재 투옥됐고, 88세까지 살며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의 활동가들이 탈진하고, 사회가 냉소로 굳어가는 지금, 이 늙은 잉글랜드 여성의 삶은 단순하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오래 버텨라.
마거릿은 곧 왕실예배 참석 거부죄, 불법집회 개최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랭커스터 감옥에 4년(1664~1668년)을 갇혔다. 그런데 거기서도 글을 썼다. 랭커스터 감옥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침묵하지 않는 것의 힘
역사는 언제나 조용히 계세요 라고 말하는 시대에 조용히 있지 않은 사람들이 바꿔왔다.
마거릿 펠은 귀족부인이라는 특권적 위치에서 시작했지만, 그 특권을 자신의 안락을 위해 쓰지 않고 운동의 자원으로 전환했다.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이를 핑계로 물러서지 않았으며,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퀘이커 교도들은 지금도 모임에서 한동안 침묵한다. 그 침묵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한 준비다.
마거릿 펠은 그 침묵의 공동체에서 가장 많이 말한 사람이었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유산이다.
마거릿 펠의 이야기는 특정시대나 나라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 그 단순한 용기가 역사를 바꿔왔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한 교훈이다.
마거릿 펠의 삶을 묘사한 수예품.(김성수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