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극우는 어떻게 지배 엘리트가 됐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인문연구가 이병권 씨의 이 책 『극우에 포획된 미국의 민주주의- MAGA와 빅테크의 실체』는 미국 민주주의의 ‘내부 붕괴’를 구조적으로 해부한다.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선거 제도는 왜곡되고, 사법은 정치화되었으며, 자본과 권력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세계의 문명 선진국이자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불리던 미국이 왜, 그리고 어떻게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는지를 저자는 포괄적이면서도 치밀하게 파헤친다.
이 책은 현상을 단순 나열하지 않고, 경제 지표와 권력 구조의 상관관계를 통해 근본 원인을 파고든다. 저자 이병권은 극우 정치”라는 표면 현상 너머에 있는 올리가르키(oligarchy)라는 지배 엘리트 구조에 주목한다. 올리가르키란 특정 시대의 지배적 자본(산업→금융→빅테크+군사)이 정치·경제·군사·정보를 한꺼번에 장악하는 소수 권력 체계다. 미국 정치 변화는 더 이상 정당 경쟁이 아니라, 지배 엘리트의 재편 과정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테제다.
저자는 미국 권력 구조의 장기 변화를 역사적이자 구조적으로 종횡으로 엮어 추적한다. 데이터·AI·위성통신을 장악한 민간 기업이 국가 안보와 전쟁 수행에 직접 개입하면서 국가 권력과 민간 기술 권력이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양상이다. 그같은 현재의 상황은 신자유주의 40년간 심화된 제조업 붕괴, 불평등, 정치 양극화의 토대 위에서 MAGA 극우가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것으로 요약된다. 저자는 이를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변종”으로 명명한다.
저자의 미국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탐색의 출발점은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진다. 극우는 무엇을 부정하려 하는가. 그 답은 극우가 되돌리려는 것은 제도 하나, 정책 하나가 아니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극우가 공격하는 것은 역사는 바뀔 수 있다”는 인식 그 자체라는 것이 저자가 찾아낸 답변이다. 그 점을 이해할 때, 우리는 극우를 전근대의 잔재가 아니라 근대의 성취를 역이용하는 정치 형식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미국 극우의 작동 원리를 ‘민주주의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비워내는 현대적 정치 형식’으로 규정한다. 이 대목에서 이 책의 가장 날카로운 통찰이 보인다. 저자는 1945년 전후 국제질서와 인권 규범을 ‘현대의 기준선’으로 재설정한다. 극우는 이 기준선을 하나씩 해체한다. 되찾자” 원래대로”라는 과거 회귀 언어로 미래 설계 자체를 포기하게 하고, 전쟁과 폭력이라는 금기를 해체해 무력을 협박과 거래 수단으로 재정의한다. 인권의 보편성도 허물어뜨린다. 대신 ‘권리’를 충성의 대가로 조건부 배분한다. 책임 정치를 파괴해 모든 실패를 외부의 적과 내부의 배신자의 음모 탓으로 전가시킨다.
극우가 언제나 민주주의를 공격하지만 극우는 민주주의의 바깥에서 등장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극우는 군사 쿠데타나 노골적인 독재로 출발하지 않으며 선거와 법, 다수결과 국민의 이름을 통해 민주주의 내부에서 성장하고, 그래서 극우는 단순한 반민주적 일탈이 아니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극우는 선거·법·다수결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그 정신을 비운다. 민주주의 제도는 형식적으로 유지되지만, 내용은 권력 집중과 소수 배제로 대체된다. 욕심·혐오·공포·굴욕이라는 감정을 선택·증폭·결합해 대중을 동원하고, 비상 권력을 정당화한다. 도덕적 비난을 넘어 구조적 메커니즘 분석이다.
저자의 시선은 미국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트럼프의 마가(MAGA) 세력이 한국의 극우 집단과 어떤 수직적 연계 구조를 맺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미국은 오랫동안 세계 정치와 경제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쳐 온 국가이며, 그 변화는 다른 나라들, 무엇보다 한국의 정치사회 환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미국 정치의 구조적 변화를 이해하는 일은 오늘날 세계 정치 질서의 흐름을 읽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저자는 학부 역사학, 대학원 서양사·언론학·경영학을 공부하고 국회·대기업·NGO를 경험한 ‘인문연구가’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신념 아래, 시민을 역사의 주체로 규정한다. 첫 연구 주제였던 ‘뉴라이트’ 분석(『대한민국 보수는 왜 매국 우파가 되었나?』)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 이 책이다.
저자는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을 빌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고 경고한다. 여기서 이성은 계몽주의가 아니라 시민의 민주주의 의식이며, 오늘의 괴물은 전제군주가 아니라 민주주의 공백을 파고드는 극우다. 시민의 깨어 있는 판단과 행동이 멈추는 순간, 지배 엘리트의 권력은 괴물로 되살아난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온통 어두운 얘기인 듯 보이지만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비관을 들려주려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는 결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민주주의의 취약성에 대한 경고를 통해 저자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미국 민주주의 몰락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성찰해보자고 권유한다. 민주주의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취약성을 경고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시민의 행동을 요구한다.
민주주의의 붕괴는 폭력적 사건이 아니라, 시민의 무기력 속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민주주의는 시민이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의지를 상실할 때, 가장 쉽게 내부에서부터 무너진다”고 말하는 저자는 민주주의의 본질은 느림에 있으며 그 과정은 복잡하고 때로는 답답하며, 성과는 더디게 나타나며, 시민에게 인내와 학습, 그리고 책임을 요구한다”고 얘기한다.
미국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성찰하자는 저자의 초대는 그래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학습과 책임에 시민이 함께하자는 권유이다. 이제 시민이 민주주의를 다시 ‘작동’하게 만들 차례라는 저자의 강력한 권유를 쉽게 뿌리치긴 힘들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