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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이민이 도시 번영의 원천임을 증명하다

이민이 도시 번영의 원천임을 증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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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옆의 요새, 그리고 도자기 공장의 탄생 영국 런던에서 기차로 불과 50분 거리. 잉글랜드 중동부, 네네 강(River Nene)이 느릿느릿 흐르는 평야 위에 피터버러(Peterborough)가 자리잡고 있다. 2024년 기준 인구 약 22만 명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지방 중소도시 규모다. 그런데 이 도시의 역사는 만만치 않다. 청동기 시대 유적이 남아 있을 만큼 오래된 터전으로, 인간 정착의 흔적은 철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 후 43~48년 무렵, 로마 군대가 밀고 들어와 오늘날 워터 뉴턴(Water Newton) 인근에 두로브리바이(Durobrivae) 라는 군사도시를 세웠다. 에르민 거리(Ermine Street)가 네네 강을 건너는 길목을 보호하기 위한 요새였다. 켈트어로 다리 곁의 요새 . 그야말로 노골적인 군사작전 지명이다. 두로브리바이는 2세기부터 4세기까지 네네 계곡 색채 도기(Nene Valley Colour Coated Ware) 로 유명한 도자기 생산 중심지로 번성했다. 이 도자기는 멀리 콘월과 스코틀랜드 북쪽 벽(Antonine Wall)까지 팔려나갔다. 로마제국이 잉글랜드에서 손을 떼기 시작한 5세기 초, 이 번화한 도시는 조용히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잡초만 남은 채.   피터버러 전경, 오른쪽이 피터버러 대성당(위키피디아) 수도원이 도시를 만들었다 로마가 물러난 뒤, 앵글로색슨 시대인 서기 655년에 섹스울프(Sexwulf)라는 수도사가 머시아 왕국의 페아다(Peada of Mercia)로부터 땅을 받아 수도원을 세웠다. 이것이 피터버러의 실질적 출발점이다. 메데스햄스테드(Medeshamstede) 라 불리던 이 수도원은 훗날 피터버러 대성당이 된다. 이름이 피터버러 로 굳어진 것은 수도원이 성 베드로(St. Peter)에게 봉헌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인의 이름에 성채(borough) 를 붙인 셈이니, 이 도시는 태어날 때부터 종교와 군사의 혼혈아였다. 1118년부터 1238년에 걸쳐 대성당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건되었고, 1541년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산령으로 폐쇄되자, 성당은 피터버러 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 전환됐다. 마지막 수도원장이 초대 주교가 되는 기막힌 이력서 갱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피터버러 대성당(위키피디아) 왕비 둘을 묻은 도시, 헨리 8세의 유산 피터버러 대성당이 영국에서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랑이 있다. 잉글랜드에서 왕비의 무덤이 있는 유일한 대성당이라는 것. 그것도 두 명이나. 첫 번째 주인공은 카타리나 데 아라곤(Katharina de Aragon, 1485~1536).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으로, 앤 볼린에게 눈이 팔린 남편이 파혼을 요구했으나 끝까지 거부한 여인이다. 1536년 킴볼턴 성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그녀는 피터버러 수도원에 묻혔다. 헨리는 그녀를 왕비 가 아닌 웨일스 대비 로 대우해 장례를 치르게 했다. 오늘날 묘비에는 잉글랜드 왕비 카타리나 라고 새겨져 있다. 살아서 빼앗긴 칭호를 죽어서야 돌려받은 셈이다. 매년 1월 말이면 그녀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고, 참배객들은 그녀의 상징인 석류를 무덤에 올려놓는다. 두 번째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s, 1542~1587). 근처 포더링헤이 성(Fotheringhay Castle)에서 처형된 후 이곳에 묻혔다가, 훗날 아들 제임스 1세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이장했다. 묘지 인부 로버트 스칼릿(Robert Scarlett, 1496~1594)은 카타리나의 무덤도, 메리의 무덤도 팠다. 메리의 무덤을 팔 때 그의 나이는 90대였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98세까지 살았다. 영국 역사상 가장 성실한 무덤 발굴자가 아닐 수 없다. 한국 현실에 빗대자면, 두 왕비의 이야기는 강렬한 은유를 던진다. 권력자의 손아귀에서 밀려나도, 역사는 결국 진실의 이름을 되찾아준다는 것. 왕비 라는 칭호를 빼앗기고 죽은 카타리나에게 후대가 그 칭호를 돌려준 것처럼, 부당하게 지워진 이름들은 언젠가 제자리를 찾기 마련이다.    카타리나 데 아라곤 여왕 초상화(위키피디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초상화(위키피디아) 기차가 왔다, 벽돌이 날았다 19세기, 피터버러를 진짜로 바꾼 것은 종교도 왕권도 아니었다. 기차였다. 1850년 그레이트 노던 철도가 런던~요크 노선을 개통하면서 피터버러는 작은 시장도시에서 산업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철도와 함께 찾아온 또 다른 행운이 있었다. 도시 남쪽 땅 아래 숨어 있던 막대한 양의 점토. 철도망 덕분에 벽돌의 대규모 생산과 유통이 가능해졌고, 피터버러 일대는 20세기의 상당 기간 영국 최대의 벽돌 산지로 군림했다. 1950년대에는 벽돌공장이 인력 수요를 채우지 못하자, 이탈리아 남부 아풀리아(Apulia)와 캄파니아(Campania)의 가난한 지역 출신 노동자들이 몰려 들었다. 1960년 무렵에는 약 3000명의 이탈리아 남성이 런던벽돌회사London Brick Company)에서 일했다. 오늘날에도 피터버러는 영국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밀집도가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다. 피자집이 아니라 벽돌이 그들을 데려온 것이다.   피터버러의 길드 홀(위키피디아) 새 도시 가 된 피터버러, 계획이냐, 수용이냐 1967년, 영국 정부는 피터버러를 공식 신도시(New Town) 로 지정했다. 런던의 인구과잉을 해소하기 위해 피터버러 개발공사가 설립됐고, 기존 도시 주변에 새 주거단지들이 건설됐다. 불과 20년 만에 인구가 45% 넘게 불어났다. 2004년부터 2013년까지 10년간 피터버러의 인구 증가 속도는 영국 도시 중 두 번째로 빨랐는데, 이민이 주된 동력이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파키스탄, 인도, 아프리카... 피터버러는 어느새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다문화 도시가 됐다. 2006년 기준으로 초등학교에서 이탈리아어, 우르두어(파키스탄 공용어), 펀자브어 수업이 이미 제공되고 있었다. 물론 장밋빛만은 아니었다. 2007년 당시 경찰청장 줄리 스펜스는 다양성의 긍정적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급격한 이민 유입이 번역 비용 급증, 음주운전·흉기범죄 증가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같은 해 그녀는 이민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지역사회 긴장을 고조시킨다고도 경고했다. 문제는 이민 자체가 아니라, 준비 없는 수용과 배타적 시선의 결합이었다.   피터버러 시장이 서는 랙스턴 스퀘어(위키피디아) 한국에 던지는 질문 피터버러의 2천 년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현실과 기묘하게 겹치는 장면들이 많다. 첫째, 도시를 세운 이들은 외부인들이다. 로마 병사, 앵글로색슨 수도사, 이탈리아 벽돌공, 폴란드 이민자... 피터버러를 피터버러답게 만든 것은 언제나 바깥에서 온 사람들 이었다.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을 걱정하는 한국의 지방 도시들이 새겨 들을 대목이다.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자를 문제 가 아닌 자원 으로 볼 수 있을까? 경북 영주의 지력이 약해진 논밭이나, 전북 군산의 비어가는 공장들에 피터버러식 해법은 얼마나 가능할까. 둘째, 산업의 다각화가 생존을 결정한다. 벽돌산업이 사라졌을 때 피터버러는 물류·금융·서비스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업 하나에 운명을 건 거제도, 자동차산업에 목을 매던 울산이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보면, 단일 산업 도시의 위기 는 한국도 진행 중인 현실이다. 셋째, 역사는 부동산이 아니라 이야기다. 피터버러 대성당은 근사한 유물보다 카타리나와 메리의 인간적 갈등 서사로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한국의 문화재 행정이 유물 보존에만 급급하고,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외면할 때 역사는 그냥 돌맹이일 뿐이다. 누구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가 역사의 핵심이지, 연도를 외우는 것이 역사교육의 본질이 아니다. 넷째, 새 도시 계획은 처음부터 사람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피터버러의 1967년 신도시 지정은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안겨줬다. 개발공사가 1988년 해산될 무렵, 새로 지어진 임대주택의 3분의 1이 이미 세입자들에게 팔렸고, 이후 민간주도 개발은 더 황량한 결과를 낳았다. 3기 신도시를 짓고 있는 한국, 그리고 세종시·혁신도시의 명암을 되새겨볼 때 떠오르는 장면이다. 아파트 숲만 키우는 신도시가 진짜 도시가 될 수 있을까?   피터버러의 네네 강변(위키피디아) 아직도 자라는 도시 피터버러의 인구는 2031년 23만 명, 2041년에는 24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로마 병정이 다리 옆에 깃발을 꽂은 지 2000년이 지났지만, 이 도시는 아직도 팽창 중이다. 전설에 따르면, 1127년 골칫거리 수도원장 때문에 화가 치민 신이 블랙 셕(Black Shuck) 이라는 불꽃 눈을 가진 거대한 유령 개를 피터버러에 풀어놓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1901년 방문 중에 전해들은 아서 코난 도일(1859~1930)이 곧바로 쓴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스커빌 가문의 사냥개』다. 유령 개가 출몰하든, 이민자가 물밀듯 들어오든, 왕이 왕비를 버리든, 피터버러는 버텼다. 그 때마다, 바깥에서 온 누군가 덕분에 되살아났다. 그 지독한 생명력이 어쩌면 이 도시의 가장 큰 문화유산일지 모른다.   피터버러 길드홀 광장 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피터버러 대성당 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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