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감정과 의지 지닌 주인공으로 묘사, 시튼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Ernest Thompson Seton, 1860~1946)은 단순한 동물 이야기꾼이 아니었다. 자연학자, 작가, 화가, 그리고 청소년 교육가였던 그는 평생에 걸쳐 생명의 존엄과 진정한 자립의 가치를 설파했다.
시튼의 인생은 1881년의 스물한 번째 생일 날, 축하 대신 아버지가 내민 한 장의 청구서로 그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버지 조지프 로건 톰슨은 아들을 앞에 앉혀두고 출생 시 의사 비용부터 21년간 들어간 양육비 전액을 꼼꼼하게 적어 내밀었다. 네가 성인이 되었으니 이제껏 들어간 투자금을 회수하겠다 는 비정한 선언이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시튼을 가족이라는 이름의 쇠사슬에서 해방시켰다. 그는 이 돈을 갚고 다시는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일부 기록에는 그가 돈이 없어 고통 받았다는 대목도 있으나, 핵심은 그날 이후 시튼이 아버지의 허락 이 필요 없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는 곧장 미국에서 캐나다 마니토바의 광야로 떠났고, 그곳에서 동물을 관찰하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오늘 한국사회는 어떤가. 부모와 자식 간의 부양의무, 상속, 증여를 둘러싼 법적 갈등이 유례없이 폭증하고 있다. 시튼의 아버지처럼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자녀에게 쏟아 부은 교육비를 노후보험 으로 여기는 문화가 없지 않다.
시튼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자녀를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확장판으로 소유하려 하는가. 시튼의 독립은 단순히 연을 끊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채무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영혼이 이끄는 숲으로 향하는 용기였다.
시튼 1901년.(위키피디아)
동물의 변호인, ‘가짜 자연학’ 논란을 잠재운 과학적 진정성
시튼은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1891년 파리 살롱에서 금메달을 받을 정도로 화필이 유려했으나, 그를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1898년 출간된 『내가 아는 야생 동물들(Wild Animals I Have Known)』이었다. 이 책이 출간과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시튼이 동물을 관찰 대상이 아닌, 고유한 감정과 의지를 가진 ‘생명의 주인공’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특히 늑대 로보는 사냥 당해야 할 짐승이 아니라, 연인 블랑카를 잃고 슬픔 속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묘사되었다. 19세기 후반, 동물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1903년 자연학자 존 버로스는 시튼이 동물에게 인간적 이성을 부여했다며 이를 가짜 자연학(nature faking) 이라고 맹렬히 공격했다.
시튼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는 5년에 걸쳐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고, 1909년 『북미 동물 생태사(Life Histories of Northern Animals)』 두 권을 내놓았다. 이 책은 학술적 엄밀함과 과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쓰였으며, 결국 시튼은 학계의 인정을 받아 모닥불 금메달을 수상했다. 이는 생명을 단순히 수단화하거나 자료로만 환산하려는 현대의 물질주의적 관점에 대한 강력한 반격이다. 오늘, 기후위기와 생태계 파괴 앞에서 우리가 동물을 주체 로 인식해야 한다는 시튼의 선구적 통찰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왼쪽)이 보이 스카우트 공동 창립자인 로버트 베이든 파월(앉은 사람), 대니얼 카터 비어드와 함께 있는 모습.(위키피디아)
통제가 아닌 ‘관계’의 교육, 보이스카우트를 떠난 이유
시튼의 또 다른 업적은 청소년 교육이다. 1900년대 초, 코네티컷 주 그리니치에 세워진 그의 저택 ‘윈디굴’은 동네아이들의 타격 대상이었다. 아이들은 담을 넘어 유리창을 깨고 텃밭을 망가뜨렸다. 보통의 어른이라면 경찰을 부르거나 훈계했겠지만, 시튼은 달랐다.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모닥불을 피우고 인디언 이야기와 자연의 지혜를 들려주었다.
이 모임은 1902년 우드크래프트 인디언 조직으로 발전했다.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스스로 관찰하고, 협력하며, 원주민의 지혜를 배우는 공동체였다. 이 활동은 영국 육군장교였던 로버트 베이든 파월에게 영감을 주어 세계적인 ‘보이스카우트’ 운동으로 이어졌다. 시튼 역시 1910년 미국 보이스카우트 창립에 참여해 초대 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시튼은 1915년 스스로 단장 직을 내려놓았다. 보이스카우트가 군사적 색채를 띠며 아이들을 ‘국가에 충성하는 예비군인’으로 키우려 했기 때문이다. 시튼은 단호히 말했다.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치려 했지, 군인을 만들려 한 게 아니다.”
통제와 규율 대신 자연과의 교감과 자율성을 강조했던 그의 철학은 현재 한국 교육현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입시경쟁의 부품을 양산하는 현재 제도 대신, 아이들이 스스로 숲을 걷고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시튼의 삶을 통해 다시금 울려 퍼진다.
시튼.(위키피디아)
소비를 넘어선 연대, 원주민 문화를 대하는 진정성
시튼은 북미 원주민(인디언) 문화를 단순히 낭만적인 소재로 소비하지 않았다. 그는 원주민의 지혜를 배우는 학당을 세웠고,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에 매진했다. 블랙풋 족으로부터 아파스토(수화 사용자) , 라코타 족으로부터 슝카 사파(검은 늑대) 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가 그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이미 다문화 사회로 깊숙이 진입한 한국에서 시튼의 태도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이주민의 문화를 이국적인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수준을 넘어, 그들의 권리와 존엄을 동등하게 지지하는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튼은 타자의 고유한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본주의의 시작임을 몸소 증명했다.
시튼.(Ernest_Thompson_Seton.jpg (2848×3448))
학원 쪽문이 아닌 ‘진짜 숲’을 돌려주어야 할 때
시튼은 1946년 뉴멕시코 산타페에서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그가 사랑했던 땅에 뿌려졌고, 그가 남긴 기록들은 야생의 가치를 증명하는 불멸의 유산이 되었다. 그의 딸 에이냐 시튼이 역사소설가로서 큰 명성을 얻으며 부친의 예술적 재능을 증명했듯, 시튼의 정신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여전히 콘크리트 숲과 태블릿 화면 속에 갇혀 있다. 아이들은 흙의 촉감보다는 스마트폰의 매끄러운 화면에 더 익숙하다. 시튼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아이들은 스스로 숲을 걸을 수 있는가?”
이제는 아이들에게 학원 쪽문이 아니라 진짜 나무가 서 있는 숲을 돌려주어야 한다. 부모의 청구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동물의 고통에 공감하며, 숲속의 지혜를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시튼이 오늘 한국사회에 전하는 마지막 편지이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늑대 로보가 커럼포 평원을 당당히 누볐듯, 우리 아이들도 자신만의 야생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시튼.(Ernest Thompson Seton (1860-1946) | Provincial Plaques | Historic Resources Bran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