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돌아본 교사 박정희, 기회주의자의 초상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승의 날이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1권을 읽다 박정희(1917~1979)의 교사 시절을 엿본다. 항목에는 독재자 나 경제개발의 아버지 같은 익숙한 수식어 대신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교사에서 황군으로, 황군에서 광복군으로, 광복군에서 남로당으로, 남로당에서 다시 우익으로, 숨 가쁘게 변신을 거듭해온 기회주의자.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의 표현이다. 영국에서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인물들을 떠올렸다.
박정희의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 사진(위키피디아)
혈서와 창씨개명, 그리고 만주국
박정희는 191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 171번지에서 태어났다. 1932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성적표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1학년 보통 , 2학년 음울하다, 빈곤한 듯 , 3학년 빈곤, 활발하지 않음, 다소 진실성이 부족함 , 4학년 활발하지 않음, 불평 있음, 진실성이 부족함. 5년 내내 성적은 꼴찌권이었다. 교련만큼은 예외였다. 이 성적표는 박정희 집권 중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1937년 문경서부공립보통학교 훈도(교사)로 발령받은 박정희는 학생들에게 자상하고 따뜻한 교사라는 평을 받았고, 학교 몰래 이순신 이야기를 들려주고 조선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 죽어도 선생질 더 못해 먹겠다 고 말하기 시작했다. 대구사범 동기이며 무엇보다 군사 쿠데타를 설득하고 결행을 종용했던 황병주 전 부산일보 사장은 그의 우울을 식민지적 우울 , 즉 큰 칼 찬 제국의 위력 과 출세에 대한 욕망이 식민지적 차별 속에서 좌절되며 오는 우울이었다고 분석했다.
훗날 박정희는 청와대 공보비서관 김종신에게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간 이유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독립운동은 무슨? 왜놈들 밑에서 하도 더러워서 긴 칼 차러 갔지. 군인이 되어 교사보다 더 큰 권력을 갖고 싶었다는 고백이었다. 이 솔직함은 박정희답다. 그가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유신을 선포할 때도 이 욕망의 문법은 달라지지 않았다.
박정희의 혈맹 소식을 전한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위키피디아)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다음달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해 4학년을 맡았다. 이렇게 학교 선생 일을 하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군인에 대한 동경,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 첫 부인 김호남과의 불화 탓에 1938년 11월,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에 1차로 지원했다. 나이가 많아 불합격할까봐 호적까지 고쳤지만 그러고도 거절당했던 그는 이듬해 3월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 혈서를 써서 보냈다.
만주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에 그 내용이 실렸다.
死以御奉公(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겠다) 朴正熙.
편지에는 일본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할 굳은 결심 이라고 썼다. 그가 말한 나라 는 조선이 아니었다. 일본이었다.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 지면(위키피디아)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1942년 3월 만주·조선계 가운데 1등으로 졸업해 만주국 황제가 주는 금시계를 받았다. 군관학교 교장 나구모 중장은 그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
박정희로서는 최고의 성적표였을 것이다.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박정희는 부대 동료들에게 이제 어떡하면 좋겠느냐 며 낙담했다고 전해진다. 9년의 군국주의 교육이 끝났고, 줄을 잘못 선 자의 불안이 시작됐다.
세계사 속의 동류, 제복을 갈아입는 자들
영국에서 박정희를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비슷한 궤적을 걷다 권력을 잡은 인물들이 떠오른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가 있다. 군 장교 출신으로 1952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강력한 국가주도 경제개발을 추진했다. 박정희와 놀랍도록 닮았다. 다만 나세르는 반(反)식민지 민족주의자였고, 박정희는 식민지 황군장교였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르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가 한결 가깝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40년 가까이 독재를 유지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점, 그러면서 정치적 반대자들을 철저히 탄압했다는 점에서다. 프랑코는 1975년 사망 이후 스페인 사회에서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가. 2019년 스페인 정부는 그의 유해를 국가묘역에서 파내 가족묘지로 이장했다. 독재자를 국가가 추모할 수 없다 는 이유였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박정희기념관이 운영되고 있다.
1969년의 가말 압델 나세르(위키피디아)
남로당원, 그리고 불기 위해 살아남은 자
한편 해방후 중국에서 귀국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학해 1946년 12월 소위로 임관했다. 그 무렵 그는 사회주의자인 형 박상희(1906~1946)를 경찰 총격으로 잃었다. 형의 죽음에 울분을 품은 그는 남로당 군사부에 포섭되어 군대 내 프락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48년 11월 체포됐다. 함께 잡힌 남로당 군 간부들은 고문 끝에 줄줄이 사형당했다. 박정희는 살아남았다. 그가 조직원들을 모두 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팀장 김안일은 박정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써내려갔다 고 증언했다. 동지들을 총살 앞에 세우고 자신은 살아남은 이 장면은, 훗날 그의 통치방식을 예고하는 원형이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창춘 군사학교에서 동료 학생들과 함께 있는 박정희(가운데, 위키피디아)
5·16, 유신, 그리고 만주국의 부활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만주군관학교 교장 나구모를 일본이 주최한 만찬에 초청해 스승에게 정중히 절을 올렸다. 이 장면은 일본지도자들의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켰다.
이 쿠데타 세력은 반식민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박정희가 꿈꾼 나라의 모델은 대한민국 헌법이 아니었다. 만주국이었다. 군이 정치를 지배하고, 국가가 군대처럼 조직되는 나라.
경찰보다 센 군인, 군사 계엄령만 내리면 모두가 꼼짝 못하는 상황.
그것이 박정희가 만주에서 배운 통치의 원형이었다.
1972년 10월 17일, 그는 스스로 헌법을 정지시키고 유신헌법을 선포했다. 유신. 메이지유신에서 따온 말이다. 대통령을 영구적으로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체제. 이 헌법 아래 긴급조치 가 만들어졌다. 헌법에 대한 비판 자체를 처벌하는 조항이었다. 조금 더 대담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헌법으로 헌법을 죽인 것이었다.
박정희 집권 18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간첩으로 조작되고, 고문 받고, 처형됐는지를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수백 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사형 판결 18시간 만에 8명이 처형됐다. 국제법학자위원회는 사법 역사상 최악의 사법살인 이라고 규정했다.
1973년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 육군 열병식에서 카드섹션으로 박정희 얼굴을 를 기리는 모습.(위키피디아)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은 프랑코의 스페인과 냉전 시기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민주화 이후 영국 정부는 프랑코 독재를 지지했던 역사를 공개적으로 반성하는 성명을 내고 관련문서를 공개했다. 과거를 덮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고 직시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나는 영국에서 생중계를 보며 곧바로 박정희를 떠올렸다.
경찰보다 센 군인, 계엄령만 내리면 모두가 꼼짝 못 하는 상황.
그 문법이 60년을 건너 돌아왔다. 검찰 출신 대통령이 군홧발로 국회를 짓밟으려 했던 그 밤, 박정희의 유신은 단지 역사책의 이야기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지금 한국에서는 박정희기념관에 연간 수십만 명이 찾아오고, 그의 딸이 대통령을 지냈으며, 그 딸이 임명한 양승태 대법원장은 선거에 개입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양승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11년에 임명했으나, 임기 대부분(2011~2017)을 박근혜 정부와 함께하며 박근혜 정부의 사법부 수장으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 총탄에 맞아 죽었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심어놓은 구조와 어두운 유산은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그것이 『반헌법행위자열전』이 박정희를 기록하는 이유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5·16쿠데타 결행 나흘 뒤인 5월 20일, 군사혁명위원회 지도부 인사들이 취재진과 회견을 하고 있다. 장도영(왼쪽) 위원장은 곧바로 박정희(오른쪽) 부위원장에 의해 실각되고 미국으로 도피한다.(위키피디아)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