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탄소규제 지워도…美 전력회사들 플랜B 못 버리는 이유 [환경] 미국 전력회사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탄소규제 폐지에도 미래 규제 복귀 가능성을 투자 계획에서 지우지 않고 있다. / 출처 = X(구 트위터)
미국 전력회사들이 트럼프 행정부의 탄소규제 폐지에도 플랜B 를 남겨두고 있다.
미국 에너지·환경 전문매체 E&E 뉴스는 23일(현지시각) 전력업계가 신규 가스발전 투자를 확대하면서도 미래 탄소규제 복귀 가능성을 장기 계획에 반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발전소 수명은 수십 년이지만 정권은 바뀐다. 전력회사들이 규제 폐지보다 정책 변동성을 더 큰 리스크로 보는 이유다.
20년 규제 롤러코스터, 전력업계에 남긴 것
미국 환경보호청(EPA)의 발전 부문 탄소규제 폐지 최종안은 올해 5월 14일부터 백악관 예산관리국(OMB) 산하 규제정보실(OIRA) 심사를 받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2024년 도입한 석탄화력·신규 가스발전소 온실가스 배출 기준을 폐지하기 위한 마지막 행정 심사 절차다.
실제로 전력업계는 이미 움직이고 있다. 에너지 전환 싱크탱크 RMI의 존 레아 선임연구원은 E&E 뉴스에 거의 모든 전력회사가 바이든 규제가 앞으로 시행되지 않을 것으로 가정하고 있다 고 말했다. 신규 가스발전 계획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규제 폐지를 곧바로 장기 투자 전제로 받아들이는 기업은 많지 않다. 발전소는 한 번 지으면 수십 년 동안 운영해야 하지만, 기후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뒤집혀 왔기 때문이다.
에너지 경제·재무분석 연구소(IEEFA)의 세스 피스터 애널리스트는 이를 규제 롤러코스터(regulatory whiplash) 라고 표현했다. 민주당 행정부가 기후 규제를 강화하면 공화당 행정부가 이를 폐기하고, 다시 정권이 바뀌면 규제가 되살아나는 일이 반복됐다는 의미다.
피스터는 현 행정부의 정책이 임기 이후에도 유지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기업은 거의 없다 며 수십억달러가 투입되는 발전 자산은 수십 년 동안 운영돼야 하기 때문에 정책 리스크를 무시할 수 없다 고 말했다.
가스발전 늘리면서도 탄소규제 시나리오는 남겨둔다
전력회사들의 고민은 장기 투자 계획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통합자원계획(IRP)은 전력회사가 향후 수십 년간 전력 수요와 발전 설비 계획을 담는 장기 청사진이다. 주 규제위원회(PUC)가 승인하면 투자 비용을 전기요금에 반영할 수 있어 사실상 사업의 근거 문서 역할을 한다.
듀크에너지는 지난해 10월 제출한 2025년 IRP에서 복합화력 5기와 연소터빈 7기 등 신규 가스발전 12기 건설 계획을 제시했다. 일부 석탄발전소 운영 연장 방안도 포함됐다. 회사는 향후 15년간 캐롤라이나 지역 전력 수요가 지난 10년 대비 8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겉으로만 보면 탄소규제 폐지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행보다. 하지만 듀크에너지는 같은 계획서에서 연방 정책은 빠르게 변할 수 있으며 계획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 적시했다.
실제로 E&E 뉴스가 입수한 회의 자료에 따르면, 자회사인 듀크에너지 켄터키는 2027년 계획 수립 과정에서 EPA가 2030년 새 규제를 도입해 석탄발전소 폐쇄와 가스발전소 탄소포집·저장(CCS) 설비 설치를 2037년까지 의무화하는 시나리오도 검토하고 있다.
가스발전 투자는 늘리되, 탄소규제가 되돌아오는 경우까지 계산에 넣고 있는 셈이다.
비슷한 움직임은 미국 남부 지역 전력회사 엔터지에서도 나타난다. 루이지애나 지역 자회사는 15년 동안 장기 계획에 반영해온 탄소가격 가정을 삭제하기로 했다. 의회의 입법 가능성이 낮고 친환경 인센티브 폐지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엔터지는 미래 정부의 탄소비용 부과 가능성과 유럽연합(EU) 규제에 따른 비용 노출 위험은 계속 검토 대상으로 남겨뒀다. 당장 탄소규제가 부활할 가능성은 낮게 보면서도 장기 리스크 자체는 무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AI 수요 급증이 딜레마를 키운다
전력회사들이 미래 탄소규제 시나리오를 지우지 못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AI 데이터센터다.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신규 발전소 건설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지금 투자하는 가스발전소는 앞으로 30~40년 동안 운영될 자산이다. 전력회사들은 당장의 전력 부족과 미래 규제 리스크를 동시에 계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전력연구기관 EPRI는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2030년 전체 전력 소비의 9~17%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AI 학습과 추론에 필요한 서버가 급증하면서 데이터센터가 제조업 못지않은 대규모 전력 소비처로 부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전력 수요를 단기간에 충당할 현실적인 대안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태양광과 풍력 투자가 확대되고 있지만 전력망 안정성을 고려하면 가스발전이 여전히 핵심 전원으로 꼽힌다. 최근 미국 전력회사들이 신규 가스발전 계획을 잇달아 내놓는 이유다.
그러나 향후 정권 교체로 탄소규제가 부활할 경우 가스발전의 경제성은 달라질 수 있다. 가스발전소에 탄소포집·저장(CCS) 설비 설치 의무가 부과되거나 추가 비용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E&E 뉴스는 미국 전력업계가 계산하는 것은 현재의 규제가 아니라, 미래의 불확실성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