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화가 렘브란트, 대표작 야경 이 재앙 불러 [뉴스] 제분업자의 아들, 붓을 들다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은 네덜란드 레이던의 방앗간집 아들로 태어났다. 열 남매 중 막내에 가까운 자리, 집안은 꽤 넉넉해 라틴어 학교까지 보내줬고 심지어 레이던 대학에도 잠깐 등록시켰다. 하지만 신학이나 법학보다 붓과 물감에 마음을 빼앗긴 소년은 대학을 슬쩍 빠져나와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야코프 판스바넨뷔르흐(Jacob van Swanenburgh, 1571~1638)에게 3년을, 이어 당대 최고의 역사화가로 불리던 피터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 1583~1633)에게 반 년을 배운 게 미술수업의 전부였다. 학위도, 유학도 없이 그저 스승의 어깨너머 배운 실력으로 훗날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이 됐으니, 요즘으로 치면 스펙 없이 실력만으로 대기업에 승진을 거듭한 셈이다.
베레모와 깃을 세운 렘브란트 자화상(1659, 위키피디아)
암스테르담의 스타, 그리고 결혼
1631년 무렵 암스테르담으로 옮긴 렘브란트는 순식간에 그 도시에서 가장 잘나가는 초상화가가 된다. 돈 많은 상인들이 앞 다퉈 초상화를 주문했고, 1634년에는 자신을 고용해준 미술상의 사촌 사스키아 판아윌런뷔르흐(Saskia van Uylenburgh, 1612~1642)와 결혼까지 한다. 그야말로 인생 꽃길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 돈 좀 벌었다고 검소하게 사는 성격이 아니었다. 큰 저택을 사들이고,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는 데 수입 이상을 쏟아 부었다. 지금으로 치면 월급 오르자마자 대출 끌어다 강남 아파트를 산 격이다.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 판아윌런뷔르흐 초상화(1633년, 위키피디아)
야경 이라는 이름의 배신
1642년, 렘브란트는 자신의 대표작이 될 그림을 완성한다. 민병대원들의 단체 초상화인데, 훗날 사람들은 이 그림을 야경(夜警) 이라 부르게 됐다. 실제로는 낮 장면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오랜 세월 니스가 검게 변색되면서 밤 장면으로 오해받은 탓이다. 문제는 이 그림이 관례를 깼다는 점이다. 원래 단체 초상화는 모든 인물을 같은 비중으로, 얼굴이 잘 보이게 그리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극적인 명암 대비를 넣어 몇몇은 빛 속에, 몇몇은 그림자 속에 넣어 버렸다. 돈은 똑같이 냈는데 얼굴이 어둠에 묻힌 단원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했다. 이때부터 그의 초상화 주문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같은 해 아내 사스키아도 세상을 떠난다. 화가로서는 예술적 도약이었지만, 생활인으로서는 재앙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같은 해 하녀 헤르트여 디르크스와 얽힌 추문, 이어 하녀 겸 사실혼 관계였던 헨드리케 스토펄스(Hendrickje Stoffels, 1626~1663)와의 동거로 교회로부터 풍기문란 판정까지 받는다. 사생활은 시끄럽고, 지갑은 얇아지고, 명성은 흔들렸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씀씀이를 줄이지 않았다. 결국 1656년, 렘브란트는 파산 신청을 한다. 저택과 방대한 수집품이 헐값에 경매로 넘어갔고, 그는 도시 변두리 셋집으로 밀려났다.
렘브란트의 그림 야경 .(위키피디아)
몰락 속에서도 놓지 않은 붓
여기서부터가 진짜 흥미롭다. 재산도, 인기도 잃었지만 렘브란트는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말년으로 갈수록 그의 그림은 더 깊어졌다. 자화상만 80점 넘게 남겼는데, 젊은 날의 자신만만한 얼굴부터 늙고 지친 얼굴까지 가감 없이 담았다. 잘나갈 때는 화려하게, 망했을 때는 초라하게 그린 게 아니라, 매 순간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1663년 헨드리케가 페스트로 죽고, 1668년에는 아들 티투스(Titus van Rijn, 1641~1668)마저 세상을 뜬다. 이듬해인 1669년, 렘브란트도 눈을 감고 셋집 무덤에 묻힌다. 한때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잘나가던 화가치고는 쓸쓸한 퇴장이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복장의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1660년, 위키피디아)
한국에 남기는 그림자
렘브란트가 남긴 교훈은 두 갈래다. 하나는 뻔한 이야기다. 잘나갈 때 씀씀이를 관리하지 못하면 화무십일홍이라는 것. 대출로 저택 사고 미술품 수집하듯 무리하게 세를 불리다 한순간에 무너지는 건 17세기 화가나 21세기 기업인 또는 정치인이나 매한가지다.
더 흥미로운 건 두 번째 교훈이다. 렘브란트는 고객이 원하는 대로, 모두가 보기 좋게 그리는 안전한 길을 버리고 자기만의 명암을 밀어붙이다 인기를 잃었다. 그런데 정작 역사가 기억하는 건 그때 그가 버린 인기가 아니라 그가 끝까지 고집한 그 명암이다. 당장의 평판보다 진실에 가까운 화면을 택한 대가로 그는 가난하게 죽었지만, 4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의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축에 든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의 대표작은 야경 이다. 밤에 몰래 무언가를 결정하고 감춘다는 뜻은 아니지만,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을 떠올리면 그 이름이 묘하게 겹친다. 그날 밤에도 누군가는 국민 모두를 환하게 비추지 않고, 일부는 빛 속에 두고 일부는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렘브란트의 명암법은 예술을 살렸지만, 윤석열의 명암법은 누구는 보이게 하고 누구는 안 보이게 감추는 방식은 결국 나라를 뒤흔든 사고로 끝났다. 그림에서는 그림자가 깊을수록 걸작이 되지만, 권력에서는 그림자가 깊을수록 탄핵이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2024년 겨울 대한민국은 온몸으로 배웠다.
암스테르담 렘브란트 하우스 박물관.(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