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양식’을 연주한 예술가들… 자발적 망명 추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임미성 재즈가수
문화평론가이자 비교문학가이며 영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의 『말년의 양식 On Late Style』은 그가 백혈병으로 투병하며 완성한 유고집이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롭게 감동하게 되는 것은 ‘인생의 말년’에 관한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말년성(Lateness)을 그만의 미학적 개념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망명이며, 그것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살아남는 것.” 말년성은 긴장의 상태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늙어서도 현실에 저항한 경계인 에드워드 사이드
그가 제시한 ‘말년의 양식’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인내하며, 정리하며, 고요히 사라지는 ‘죽음의 서주’가 더 이상 아니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평생 경계인으로 살았던 그는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자발적 망명’이 ‘말년의 양식’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에드워드 사이드
이것은 말년의 양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은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반대 방향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두 힘을 긴장 속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오류 가능성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며 노년과 망명으로 인해 신중한 확신을 얻은 예술가가 가진 성숙한 주체성이다.” 그리하여 말년의 양식은 예술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저항할 때 생겨난다”는 것이다.
사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은 아도르노의 음악 에세이 『베토벤의 말년의 양식』에서 빌려 온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말년의 양식이 중요한 것은 베토벤의 부도덕적이고, 사회 저항적인 말년의 작품들이 우리 시대의 현대 음악에 새로움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 역시 『말년의 양식』에서 베토벤이 말년에 청각을 잃고 완성한 작품인 교향곡은 (말년의 사중주, 소나타들을 포함하여) 긴장과 불화, 불연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화해하지 않은 입센, 자신으로부터 망명을 꿈꾼 겐자부로
『인형의 집』으로 잘 알려진 ‘현대극의 아버지’ 입센은 말년에 이르러 건강의 악화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작품에 몰두했다. 그렇게 탄생한 『건축가 솔네스』는 두려움으로 가득찬 솔네스를 통해 입센의 고뇌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자전적인 작품이 되었다. 『건축가 솔네스』 외에도 입센의 말년 작품 속 인물들은 냉혹하고 고립되고 균열된 모습이었고, 결코 화해하는 법이 없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입센과 베토벤처럼 자신의 냉혹한 현실(두려움과 분노)을 숨기지 않고 작품에 투여함으로써 새로운 ’말년의 양식‘을 추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입센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랜 친구, 오에 겐자부로는 『읽는 인간』에서 말년의 양식, 즉 ‘후기 스타일’이란 생애 후반에 죽음이 멀지 않은 예술가가 지금껏 해온 작업이나 그 시대의 관습과는 전혀 다른 기묘하기까지 한 작품과 삶의 방식으로 마지막까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표현을 한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았던 에드워드 사이드에게 헌정이라도 하듯 『만년 양식집』을 그의 마지막 소설 제목으로 썼다. 이 소설을 통해 그는 기존의 작품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서사 양식의 실험에 도전함으로써 말년의 양식을 완성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말년의 작품을 통해 모순, 갈등, 저항, 긴장,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들에게 타협이나 마무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자기 자신이라는 ‘오래된 타인’으로부터 망명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
90 넘어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던 재즈 음악가들
누군가 내게 90이 넘어서도 노래와 피아노 연주가 가능할까? 색소폰은 불 수 있을까? 혹은 90대에도 드럼연주자로 활동할 수 있을까? 물어 온다면 대답은 모두 예스다! 그리고 이것은 말년에도 왕성하게 활동했던 재즈 뮤지션들의 실제 나이다.
가장 위대한 알토 색소폰의 개척자로 불리는 베니 카터는 1907년생으로 90대까지 활발하게 연주 활동을 해나갔다. 그는 14세에 이미 독학으로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1932년 재즈그룹을 만들며 지속된 그의 공연은 90대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연주자뿐만 아니라 작곡가, 편곡자로서 영화음악에서 시리즈 편곡까지 다양한 협업을 시도했다. 그의 대표곡인 알려진 와 는 여전히 사랑받는 앨범이다.
비브라폰의 대명사라고 알려진 라이오넬 햄프턴 역시 90대에도 공연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화려한 비브라폰 연주는 대중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비브라폰 외에 드럼, 피아노, 타악기 등 여러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그 역시 다양한 협업을 이어갔으며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쿨 재즈의 거장인 피아니스트 데이브 브루벡 또한 90이 넘어서도 공연을 이어갔다. 클래식과 재즈를 아우르는 그의 넓은 연주 스펙트럼은 그가 가져온 리듬 혁신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오래 전 예능프로에 배경음악으로 많이 쓰였던 4분의 5박 곡 가 그의 대표곡이다.
70대 이후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드러머 로이 헤인즈는 90대에 더 깊어진 테크닉을 보여주었다. 수차례 그래미상을 수상하고, 70여개의 음반을 발표했던 토니 베넷은 95세가 되던 2021년 무대에서 마지막으로 그의 대표곡인 , 그리고 레이디 가가와 함께 을 열창한다. 알츠하이머인 상태임에도 무대에서만은 모든 노래 가사를 완벽히 기억하고, 목소리도 여전히 힘이 넘친다.
로이 헤인즈
늙어가면서 재즈로 망명한 우디 앨런과 클린트 이스트우드
네 번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영화감독 (작가이자 배우, 코미디언, 각본가, 극작가) 우디 앨런은 뉴욕 재즈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는 클라리넷 연주자이기도 하다. 50대에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60대부터 연주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영화에 언제나 재즈가 흐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마틴 스콜세지 등 세계적인 영화감독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우디 앨런은 영화 평론가들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코미디 감독”으로 평가 받는다. 그의 대표작인 은 사랑과 예술가의 고뇌를 가벼우면서도 진지하게 연출해내 가볍게만 보여지던 로맨틱 코미디의 위상을 바꾸어 놓았다. 에서 우디 앨런식의 새로운 연출기법(가벼우면서도 지적이고 코믹한)은 이후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코미디에 그치지 않았다. 인간 실존에 관한 성찰을 담아 낸 영화 은 토스토에프스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신과 죄책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을 스크린 속에서 새롭게 재구성했다.
우디 앨런
지난 11월에 개봉되었던 우디 앨런의 영화 는 불어 영화로 첫 연출한 작품이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다양한 작품들을 작업하고 있는 90대의 노장 감독이 재즈 연주를 고집해오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명성으로부터 이탈하는 ‘자발적 망명’이 아닐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사람의 재즈 연주자로서 끝없이 시작하는 삶이 그에게는 말년의 양식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부극을 대표하는 배우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클린트 이스트 우드는 재즈 연주자로서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진로를 바꿔야만 했다. 세계적인 거장이 된 그는 재즈 연주자의 끈도 놓지 않았다.
열 두 살 때 찰리 파커의 공연을 보고 재즈에 심취하게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재즈에 대한 사랑을 영화로 가져왔다. 찰리 파커의 생애를 다룬 영화 를 제작하고, 하드 밥의 선구자 ‘텔로니어스 몽크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의 재즈에 대한 열정은 더 나아가 영화 에서는 바에서 재즈 피아노를 연주하는 대통령 경호원으로 등장한다. 그는 늘 레스터 영이나 찰리 파커 같은 재즈 연주자들의 영감과 자유에 대해 흠모해 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재즈 페스티발도 지원하고 재즈 뮤지션들과도 활발히 교류해오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무기력 대신 자신으로부터의 이탈을 택한 노년
감독 브루스 리커는 1997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속 재즈 여행‘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선보인다. 이는 영화로 재즈를 알리는데 공헌하고 재즈 페스티벌을 지원하며, 감독이자 연주자이기도 한 이스트우드를 위한 헌정 공연을 기획한 것이었다. 카네기 홀에 모인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연주곡이 담긴 영화를 보여주고, 곡이 끝나면 이스트우드의 인터뷰를 통해 음악의 배경 등을 알려준다. 공연은 이스트우드가 연주하는 자작곡으로 마무리된다. 영화 를 만들고 영화음악을 작곡하는 그에게 재즈 피아노 역시 말년의 양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를 비롯한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말년의 양식을 창조해 나갔다. 앞서 언급된 재즈 뮤지션들 대부분이 90대에 한숨과 무기력 대신 자신만의 양식을 구축했다. 그것은 사이드가 얘기한 자발적 망명이며,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탈이다. 노년의 재즈 연주자들이 무대 위의 삶을 지속하고, 영화감독들이 재즈를 자신의 장르 밖에서 향유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말년이 결코 ’삶의 결산‘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말년의 양식이다. 세상을 향한 외침이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고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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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보컬리스트 임미성의 재즈 칼럼집 『삶, 틀려도 좋은 자유』
재즈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임미성이 책 『삶, 틀려도 좋은 자유』를 내놓았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고했던 재즈 칼럼 중 30여 편을 모아 만든 재즈 에세이집입니다. 재즈 보컬리스트로서의 공연과 음반 작업, 대학에서의 강의 등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재즈가 단지 음악 장르가 아닌, 삶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선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해 왔습니다. 책에 담긴 그림은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심고우리 작가의 작품이며, 사진과 이미지는 저자가 직접 작업한 것입니다. 율리시즈 출판사 26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