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는 왜 ‘절대권’이 될 수 없는가 [칼럼]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시작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일대 개표소 봉쇄 시위 가 이어지는 가운데 17일 참가자들이 게이트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6.6.17 연합뉴스
차별금지법이나 혐오표현 금지법, 허위사실 및 역사왜곡 유포 처벌법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면 국민의힘과 극우 개신교 세력, 그리고 수구 언론 등이 자주 꺼내 드는 만능 치트키가 있다. 바로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구호다.
최근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글을 통해 국민에게는 부정선거를 외칠 자유도 있다”고 옹호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들은 마치 표현의 자유 가 모든 합리적 토론과 법적 규제 논의를 종결시키는 부적이라도 되는 듯 내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이 거대한 맹신 앞에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표현의 자유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다른 모든 공동체 가치와 인간의 권리 위에 군림하는 ‘최상위의 절대권’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는 결코 무제한의 방종을 허용하는 면허증이 될 수 없으며, 타인의 존엄을 해치고 민주적 시스템을 파괴하는 순간 그 자격을 스스로 반납해야 하는 ‘제한적 권리’에 불과하다.
자유의 위계와 도구적 성격: 인간의 존엄 아래에 있는 자유
자유는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는 추상적인 유희가 아니다. 자유는 누군가의 구체적인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고 지탱하는 힘이며, 언제나 헌법적 가치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사회의 기본 토대인 생존의 자유, 안전의 자유, 차별받지 않을 자유, 그리고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아갈 권리가 통째로 무너진 자리에서 나에게는 말할 자유가 있다”고 외치는 것은 대단히 기묘하고도 기만적인 풍경이다. 나의 말할 자유가 타인의 생존과 존엄을 위협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라 폭력이다.
기본권 중에도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단연 ‘인간의 존엄과 가치’다.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고 구성원의 자아 실현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적 자유’에 가깝다. 즉, 민주주의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허용된 자유이지, 민주주의의 제도적 신뢰와 소수자의 생존권을 파괴하는 정도까지 용인할 수 없다. 타인의 존엄을 짓밟을 권리보다 위에 서 있는 자유는 대한민국 헌법 체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칼 포퍼 관용의 딜레마 : 불관용을 무제한 관용하면 모두가 파멸
정치권에서 부정선거를 외칠 자유”나 약자를 배제할 자유”를 무차별적으로 옹호할 때, 우리는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가 제시한 ‘관용의 딜레마(paradox of tolerance)’를 되새겨야 한다. 포퍼는 그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다음과 같이 엄중히 경고했다.
우리가 불관용적인 자들에게까지 무제한의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우리가 불관용의 습격으로부터 관용적인 사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람들은 파멸할 것이고 그들과 함께 관용도 사라질 것이다.”
이 딜레마는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세력에게 어느 정도까지 자유를 허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한계를 설정해 준다. 근거 없는 가짜뉴스로 선거 제도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시스템을 마비시키려는 선동가들, 그리고 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혐오주의자들은 포퍼가 말한 대표적인 ‘불관용 세력’이다.
이들은 합리적인 대화나 논리적 토론을 거부한다. 오직 자신들이 선동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만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규칙을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이러한 불관용 세력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관용이나 미덕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멈추도록 방조하는 일이다. 따라서 불관용적인 자들의 선동과 폭력적 표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이 진정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표현의 자유와 말한 이후의 책임
이와 관련해 우리가 떠올릴 수밖에 없는, 다소 불편하지만 지극히 적확한 격언이 있다.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이 남겼다고 알려진 문장이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한다. 그러나 표현한 이후의 자유는 보장해 줄 수 없다. (There is freedom of speech, but I cannot guarantee freedom after speech)
잔혹한 독재자의 발언이라는 점에 집중해 문장의 참뜻을 희석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발언이 지닌 서늘한 진실은 말하는 이의 도덕적 결함 때문에 무효가 되지 않는다. 현대의 모든 법치 사회는 이미 이 원칙을 엄격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료 시민을 모욕하고, 허위사실로 사회 시스템을 교란하며, 타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할 경우, 사후에 엄중한 법적·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사전에 입을 막는 ‘검열’이 아니며,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져야 하는 ‘책임’의 영역이다. 말할 자유의 한계선은 정확히 그 말이 끝난 직후, 타인의 권리와 충돌하는 그 지점부터 시작된다.
혐오는 방종이자 힘의 과시
사회 전체의 정의와 연대 앞에서,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혐오 표현의 자유는 결코 보호받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타락한 방종일 뿐이다. 기득권 세력과 극우 진영이 쏟아내는 모욕과 배제의 언어들은 건강한 사회적 토론이 아니며, 정당한 비판도 아니고, 존중받아야 하는 의견도 아니다.
그것은 기득권이나 우월한 지위를 확인하려는 거칠고 비열한 ‘힘의 과시’에 불과하다. 사회 구조적으로 이미 불리한 위치에 놓여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너희는 여기 존재할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정신적·사회적 폭력이다. 인류 역사에서 폭력은 언제나 자유의 대상이 아니라 법적 규제와 격리의 대상이었다. 표현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해서 폭력의 본질이 가려지지 않는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방종의 대가
혐오표현을 옹호하고 가짜뉴스를 유포할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이들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명확하다. 당신 혹은 당신의 가족이 똑같이 당해도 괜찮은가?”
만약 당신의 정체성, 출신 성분, 신체적 조건, 종교, 혹은 가족의 존재 자체가 광장에서 공공연하게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되고, 근거 없는 음모론에 의해 명예가 처참히 짓밟혀도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 아래 묵묵히 인내할 수 있는가? 정말로 그것이 민주주의의 대가라고 받아들일 자신이 있으면 무제한의 자유를 주장하라.
다만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타인의 권리를 파괴하며 누린 그 독소 가득한 자유는 언젠가 반드시 형태를 바꿔 부메랑처럼 자신을 향해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선거 제도를 부정해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선동의 끝에는 독재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으며, 소수자를 배제한 혐오의 칼날은 결국 또 다른 권력에 의해 당신이 소수자로 겨누어지게 된다. 파멸의 책임은 공동체가 아닌 오롯이 당신 자신의 몫이다.
더불어민주당 임오경(왼쪽부터), 천준호, 전용기 의원이 지난 3일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서울 송파개표소로 이용됐던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 17일 진입하려다 봉쇄 시위 중인 시민들에 막혀 되돌아가고 있다. 2026.6.17 연합뉴스
결론: 모두의 자유를 지키는 최소한의 브레이크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유는 폭주 기관차 같은 무제한의 방임이 아니다. 자유는 구성원들이 서로를 대등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대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의 토양 위에서만 비로소 존속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혐오표현 규제, 그리고 민주적 선거 제도를 뒤흔드는 허위사실 유포 처벌법은 결코 시민의 자유를 빼앗고 억압하려는 악법이 아니다. 오히려 광기 어린 방종에 의해 선량한 다수와 약자들의 자유가 통째로 질식당하지 않도록 방어하는, ‘모두의 자유가 함께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자 생존선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숭고하다. 그러나 그 숭고함은 타인의 존엄성을 짓밟지 않고,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지 않는 선량한 책임 위에서만 유효하다. 인간의 존엄보다 열등한 자유,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불관용의 자유는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그리고 단호하게 제한되어야 마땅하다.김대윤 시민기자 kimdaeyun020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