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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거세 당한 사관의 참된 복수, 사마천과 사기

거세 당한 사관의 참된 복수, 사마천과 사기
[뉴스]
기원 전 99년, 흉노와 싸우다 항복한 장수 이릉(李陵, ?~기원 전 74)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한 사람이 사형 위기에 몰린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었다. 정병(正兵, 정규군) 5000명을 일 년 동안 부릴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성기를 잘리는 궁형(宮刑)을 받는 것. 유학을 공부한 선비에게 궁형은 죽음보다 못한 치욕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당대 사대부 사이에서는 궁형을 받느니 자결하는 편이 옳다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 사내는 치욕을 택했다. 아직 다 쓰지 못한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이 바로 동아시아 역사 서술의 전범이 된 『사기(史記)』이고, 그 사내가 사마천(司馬遷, 기원 전 145 경~기원 전 86 경)이다.   사마천 초상화(위키피디아) 아버지의 유언, 그리고 감옥에서 완성한 필생의 역작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 ?~기원 전 110)은 한나라 조정에서 천문과 역법을 맡던 태사령(太史令)이었다. 그는 무제(武帝, 기원 전 156~기원 전 87)가 태산에서 거행한 봉선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세상을 뜬다. 죽으면서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하나였다. 중국 최초의 임금으로 여겨지는 황제(黃帝) 시절부터 이어져 온 역사를 정리해달라는 것. 사마천은 서른여덟에 아버지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고, 이후 태초력이라는 새 역법을 완성하는 등 관료로서도 능력을 인정받으며 자료를 모으고 집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릉 사건이 모든 것을 뒤틀어놓았다.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중과부적으로 패해 포로가 된 이릉을 두고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그를 옭아매려 했다. 이릉이 최선을 다했다고 홀로 변호하던 사마천은 도리어 무제의 노여움을 샀고, 태사령 자리에서 파면당해 옥에 갇힌다. 사마천이 궁형을 받아들인 이유는 단순하다. 여기서 죽으면 책을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치를 삼키고 살아남아 황제의 기밀을 다루는 환관 최고위직인 중서령(中書令)에까지 올랐고, 그 자리에서 130권에 이르는 『사기』를 마침내 완성했다. 훗날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그는 자신이 궁형을 견딘 까닭을 이렇게 밝힌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헛되이 죽느니 치욕을 견디고 뜻을 이루겠다 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사마천 초상화(위키피디아) 『사기』가 특별한 이유, 승자만이 아니라 패자도 기록하다 『사기』는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다. 제왕의 사적을 다루는 본기(本紀), 제후의 사적을 다루는 세가(世家), 개인의 삶을 다루는 열전(列傳) 등으로 인물을 중심에 놓고 역사를 서술하는 기전체(紀傳體)라는 형식을 처음 만들어냈다. 이 형식은 이후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정사 서술의 표준이 된다. 『사기』는 전설의 황제부터 무제 당대까지를 다루면서 제왕은 물론 자객, 상인, 점술가, 반란자까지 폭넓게 담아낸다.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사마천이 권력자의 입맛에 맞춰 붓을 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궁형에 처하게 만든 무제조차 미화하지 않고 그 공포정치의 실상을 가감 없이 적었다. 신하가 상소문의 글자 획 하나를 잘못 찍었다고 벌벌 떨어야 했던 시절, 사마천은 그런 무제를 낱낱이 기록해 후대에 넘겼다. 또한 항우처럼 결국 패배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의 서사조차 제왕의 반열인 본기에 당당히 실었다. 승자의 역사가 아니라 패자도 아우르는 사실의 역사를 쓰겠다는 태도였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Herodotus, 기원 전 484 경~기원 전 425 경)가 서양 역사서술의 아버지로 불린다면, 사마천은 동양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한다. 다만 헤로도토스는 자유인 신분으로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기록했고, 사마천은 신체 일부가 잘린 채 궁궐과 감옥을 오가며 써냈다는 차이가 있다.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기록임을, 그는 몸으로 증명한 셈이다.   명나라 시대(1368–1644)의 사마천 초상화(위키피디아) 한국이 새겨야 할 대목, 기록하는 자가 결국 이긴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에서는 계엄이라는 시대착오적 카드가 등장했다가 몇 시간 만에 무너졌다. 그 짧은 밤 동안 있었던 일들, 누가 어떤 명령을 내렸고 누가 그것을 거부했는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법정과 국회청문회를 통해 한 줄 한 줄 기록되는 중이다. 사마천이 살아 있다면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칼을 든 자가 아니라 붓을 든 자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니까. 『반헌법행위자열전』 같은 작업이 갖는 의미도 여기에 있다. 불법 비상계엄에 가담한 이들의 이름과 행적을 낱낱이 남기는 일은, 당장 형사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역사 앞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만든다는 뜻이다. 사마천이 무제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제를 있는 그대로 적었듯, 지금 이 순간의 기록자들도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실을 남겨야 한다. 사마천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오늘날 기록자들이 감내해야 할 대가는 궁형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침묵하거나 말을 바꾼다. 가해자는 언젠가 잊히기를 바라지만, 기록은 그 바람을 넘어선다. 궁형이라는 극형도 사마천의 붓을 꺾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사기(史記)의 머릿글 맨앞(위키피디아) 역사의 법정은 문을 닫지 않는다 사마천은 몸의 일부를 잃었지만 이름은 2000년 넘게 살아남았다. 그를 벌하려 했던 무제는 오히려 『사기』 속의 한 인물로 남았을 뿐이다. 권력은 한 시절의 재판정을 지배할 수 있어도, 역사의 법정만큼은 끝내 지배하지 못한다. 그 법정에는 마감 시한이 없고, 역사의 판결은 늦게 오더라도 반드시 온다.   중국 산시성 한청에 위치한 사마천의 묘와 사당(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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