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으로 온 정치, 몽둥이 로는 끝나지 않는다 [뉴스] 매불쇼에서 정준희 교수의 발언은 맥락은 이해하지만 거칠었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몽둥이를 들어야 한다”, 권력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표현은 민주주의의 언어로 듣기에 불편하다. 특정 세대와 성별 집단을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압의 대상으로 말하는 순간, 시민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관리해야 할 태도로 축소된다. 특히 20대 남성들이 이미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조롱당한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이런 표현은 그들의 피해의식을 더 강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발언의 위험성은 분명히 짚어야 한다.
그러나 이 발언을 단순히 반민주적 막말”로만 정리하면 더 중요한 문제를 놓친다. 정준희가 말한 핵심 중 하나는 20대 남성의 보수화 또는 극우화가 사실, 논리, 가치관의 정합적 체계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그것을 심리와 문화의 문제”, 태도의 문제”라고 보았다. 이 진단은 불편하지만 무시하기 어렵다. 리처드 리브스가 of boys and men에서 언급한 것이기도 한데 국제적 현상이다. 다시 말해 20대의 오늘의 정치적 태도는 정책자료집을 읽고 형성되기보다 짧은 영상, 조롱, 밈, 댓글, 커뮤니티의 반복된 정동 속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몽둥이”라는 표현의 과잉만이 아니다. 그 말이 나오게 된 진보 진영 내부의 조급함, 그리고 그 조급함이 가리키는 현실적 난점이다. 사실을 제시해도 움직이지 않고, 논리로 반박해도 조롱으로 회피하며, 가치의 언어를 말하면 위선”이라고 되받아치는 태도 앞에서 민주주의는 당혹스러워한다. 그 당혹감이 때로 권력의 언어로 급히 이동한다. 문제는 바로 그 급한 이동이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 가 계속되고 있는 9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서 한 참가자가 수개표를 촉구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2026.6.9 연합뉴스
극우화는 논문이 아니라 밈으로 온다
정준희의 문화적 진단은 이 지점에서 일정한 타당성을 갖는다. 20대 남성의 정치 태도는 언제나 일관된 보수 이념이나 명확한 정책 선호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 그것은 나는 속지 않는다”, 나는 너희의 도덕적 훈계를 거부한다”, 나는 조롱할 수 있다”는 태도로 나타난다. 이것은 정보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다. 그래서 굳이 행동경제학적 분석을 하지 않아도 단순한 팩트체크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논리적 반박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밈은 논리보다 빠르고, 조롱은 설명보다 쉽게 퍼진다.
밈의 정치는 가볍지만 강하다. 그것은 긴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 장의 이미지, 짧은 자막, 반복되는 말투, 내부자만 알아듣는 농담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은 밈을 통해 정치적 입장을 배우기보다 정치적 소속을 느낀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 나는 저들을 비웃을 수 있다”, 나는 이 판의 속임수를 안다”는 감각이 축적된다. 이 감각은 사실의 진위보다 오래 간다. 그래서 어떤 밈은 논쟁에서 패배해도 문화적으로는 살아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극우화는 논문이 아니라 밈으로 온다. 그것은 정교한 이론체계가 아니라 반복되는 정서의 형식으로 온다. ‘에베베’식 거부, 조롱의 말투, 반페미니즘 농담, 피해자 정체성, 반제도 정서가 서로 엉겨 붙는다. 이 태도는 쉽게 반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태도는 논리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소속감으로 서 있기 때문이다. 정준희가 말한 심리와 문화”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법과 제도의 경계 설정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모든 태도를 끝없이 설득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혐오표현, 성폭력적 위협,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조직적 공격, 허위정보를 통한 선동, 민주주의 제도 파괴 시도에는 법과 제도가 분명한 경계를 세워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타인을 침묵시키는 폭력의 자유가 아니다. 온라인 문화가 놀이의 얼굴로 폭력을 정상화할 때 공적 권력은 최소한의 선을 그어야 한다. 방치된 혐오는 결국 약한 사람을 먼저 밀어낸다.
이 점에서 정준희의 권력적 처방은 전면적으로 폐기할 수만은 없다. 합법적 몽둥이”라는 은유는 거칠지만, 그 속에는 혐오와 폭력의 확산을 더 이상 도덕적 호소만으로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있다. 정책으로 구애를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인식에 동의한다. 온라인상의 조직적 괴롭힘, 허위정보, 여성혐오, 선거과정의 조작적 밈 유통에 대해 법과 제도가 작동해야 한다는 요구는 정당한 측면이 있다. 민주주의는 무기력한 관용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폭력의 경계를 관리하는 체제이다.
다만 권력의 역할은 ‘제압’이 아니라 ‘경계 설정’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권력은 어떤 행위가 허용되지 않는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이 어떤 집단 전체를 설득 불가능한 대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경계 설정은 통제의 언어로 변한다. 법은 폭력적 행위와 혐오의 조직화를 다루어야지, 특정 세대의 감정 전체를 처벌할 수는 없다. 제도는 시민을 굴복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시민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공적 공간의 최소 조건을 만드는 장치여야 한다.
제압은 태도를 멈추게 해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
권력은 행위의 선을 긋는 데 필요하지만, 태도의 기원을 해석하지는 못한다. 혐오 발언을 처벌할 수는 있지만, 왜 어떤 청년이 혐오를 통해 소속감을 얻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온라인 폭력을 막을 수는 있지만, 왜 실패감과 외로움이 조롱의 문화로 이동하는지는 해결하지 못한다. 권력은 문을 닫을 수 있지만, 그 문 밖에서 사람들이 왜 모였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권력적 처방의 한계가 있다.
제압은 단기적으로 질서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피해의식과 반동적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 이미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집단에게 너희는 논리도 없고 가치관도 없으니 권력으로 눌러야 한다”는 메시지가 전달되면, 그들은 더 깊이 자기 방어의 세계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조롱은 조롱을 부르고, 낙인은 낙인을 증명하는 행동을 불러온다. 민주주의는 상대를 이겨야 하지만, 동시에 상대가 다시 시민의 자리로 돌아올 통로도 남겨두어야 한다.
따라서 문제는 권력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다. 어떤 권력을, 어디까지,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이다. 혐오와 폭력의 경계에는 단호해야 하지만, 그 경계 바깥의 청년들을 하나의 적대적 집단으로 묶어 제압하려 해서는 안 된다. 법은 행위를 다루고, 교육은 태도를 다루며, 정책은 태도가 자라난 조건을 다루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분리될 때 권력은 과잉이 되고, 교육은 공허해지며, 정책은 표어가 된다.
문제는 남성 청년이 아니라 제도적 공백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리처드 리브스의 접근이 필요하다. 리브스는 남성과 소년의 어려움을 여성의 권리 확대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그는 남성이 교실, 노동시장, 가족 안에서 과거의 역할을 잃었지만 새로운 역할을 충분히 얻지 못한 구조적 공백을 본다. 남성은 더 이상 과거처럼 생계부양자라는 지위만으로 존중받기 어렵다. 그러나 돌봄, 교육, 관계, 공공서비스, 문해의 세계에서 새롭게 인정받는 경로도 충분히 열리지 않았다.
한국의 20대 남성도 이 공백 위에 있다. 학교에서는 성적과 자기조절을 요구받고, 국가는 군복무를 요구하며, 노동시장은 스펙을 요구하고, 가족과 사회는 여전히 경제적 능력을 남성성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그 모든 요구를 통과해도 안정된 생애전망은 보장되지 않는다. 좋은 일자리, 주거 안정, 결혼 가능성, 사회적 인정은 점점 더 불확실해진다. 이 불확실성은 곧장 보수화로 이어지지 않지만, 그것을 해석할 언어가 빈약할 때 분노의 정치로 이동한다.
리브스의 관점에서 보면 핵심 질문은 저들을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가 아니다. 질문은 어떤 제도적 공백이 저들의 상실감을 혐오와 조롱의 언어로 번역했는가”이다. 남성 청년의 보수화는 한 개인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학교, 병역, 노동시장, 가족, 온라인 문화가 서로 맞물려 만든 결과이다. 이 구조를 보지 않고 태도만 제압하려 하면, 우리는 표면의 소음만 낮출 뿐 그 소음을 만들어내는 엔진은 그대로 둔다.
밈은, 상처 위에 붙는다
밈은 공중에 떠다니지 않는다. 그것은 상처 위에 붙는다. 군복무로 늦어진 시간, 취업 경쟁의 불안, 높은 주거비, 결혼과 친밀성의 변화, 학교에서 축적된 실패감, 성평등 정책을 자신에 대한 고발장처럼 받아들이게 만든 정치언어가 밈의 토양이 된다. 밈은 이 복잡한 조건을 한순간에 단순화한다. 네가 힘든 것은 저들 때문이다.” 이 문장은 거짓일 수 있지만, 힘든 사람에게는 설명처럼 들린다.
한국의 공정 담론은 이 과정을 더 빠르게 만든다. 공정은 본래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것이 구조적 불평등을 읽는 언어가 아니라 누가 혜택을 더 받았는지를 따지는 계산표로 좁아질 때 위험해진다. 이때 군복무는 빼앗긴 시간으로, 여성정책은 부당한 우대로, 페미니즘은 특권 요구로, 학교의 실패감은 사회적 배제의 증거로 번역된다. 복잡한 구조는 단순한 가해자-피해자 서사로 축소된다. 바로 이 단순함이 밈의 힘이다.
따라서 20대 남성의 보수화는 단순히 나쁜 문화”의 문제가 아니다. 나쁜 문화가 설득력을 얻는 사회적 조건의 문제이다. 이 점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밈을 지우려다 더 강한 밈을 만들고, 혐오를 누르려다 더 깊은 피해의식을 만들 수 있다. 밈과 싸우려면 더 강한 조롱만으로는 부족하다. 밈이 붙은 상처를 보아야 한다. 상처를 정당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상처가 타인을 찌르는 칼이 되기 전에, 그것을 공적 언어와 제도적 지원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설득보다 깊은 것은, 해석이다
교육의 과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학생에게 혐오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생은 자신이 왜 혐오의 언어에 끌리는지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너는 틀렸다”는 말만 반복하면 학생은 더 단단히 닫힌다. 네가 그렇게 느끼게 된 조건은 무엇인가”를 함께 묻는 순간 교육은 시작된다. 교육은 감정을 승인하는 일이 아니라 감정의 기원을 읽게 하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사회구조 문해력이다. 군복무와 돌봄, 노동시장과 성별임금격차, 주거불평등과 가족 변화, 온라인 알고리즘과 혐오산업, 공정과 평등의 관계를 함께 읽는 교육이어야 한다. 학생들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 법만이 아니라, 자신이 왜 미워하고 싶어졌는지를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어떤 구조 속에서 만들어졌는지 읽는 능력이 민주주의의 기초이다.
정준희가 말한 것처럼 밈으로 만들어진 태도는 단순한 논리로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육이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은 태도를 제압하는 일이 아니라 태도가 생긴 조건을 함께 읽어내는 일이다. 학교는 정치적 냉소가 형성된 뒤에 시민교육을 시작할 것이 아니라, 실패감이 냉소가 되기 전에 다른 언어를 제공해야 한다. 조롱보다 깊은 언어, 혐오보다 안전한 소속, 분노보다 설득력 있는 미래를 학교가 먼저 경험하게 해야 한다.
남성 위기의 언어를 극우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정치의 과제도 분명하다. 진보가 남성 위기를 말하지 않으면, 보수와 극우가 그것을 여성혐오의 언어로 번역한다. 남성 청년의 외로움, 실패감, 생애불안, 인정 욕구를 공공정책의 언어로 다루지 않으면, 그것은 밈과 조롱, 반페미니즘, 반제도 정서로 조직된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그 언어를 다른 세력에게 넘겨주는 일이다.
남성 청년 정책은 성평등의 후퇴가 아니다. 오히려 성평등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여성의 구조적 차별은 여전히 현실이다. 노동시장, 돌봄 부담, 안전, 경력단절, 대표성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동시에 청년 남성 일부는 제도적 인정의 결핍과 생애전망의 약화를 경험한다. 이 두 현실은 서로를 취소하지 않는다. 좋은 정치는 상처를 경쟁시키지 않는다. 좋은 정치는 서로 다른 상처가 서로를 찌르기 전에 제도와 책임의 언어로 바꾼다.
정책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남학생 정서적 고립에 대한 조기 개입, 군복무 이후 학습·취업 복귀 지원, 청년 주거와 정신건강, 지역 기반 일자리, 디지털 시민교육이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특히 남성을 과거의 가장 모델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돌봄과 교육, 건강과 문해, 공공서비스와 지역사회 안으로 다시 초대해야 한다. 이것이 리브스가 말하는 남성 지원의 핵심이며, 한국 사회가 더 늦기 전에 배워야 할 언어이다.
몽둥이 이후의 민주주의
결국 질문은 몽둥이 이후에 무엇이 남는가이다. 혐오와 폭력의 경계에는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자신을 파괴하는 힘에 무력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제압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권력은 경계를 세워야 하지만, 교육은 언어를 만들어야 하고, 정책은 삶의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 경계만 있고 언어가 없으면 시민은 침묵하거나 반발한다. 언어만 있고 조건 변화가 없으면 교육은 공허한 훈계가 된다.
밈으로 온 정치에는 밈보다 더 깊은 소속이 필요하다. 조롱으로 굳어진 태도에는 조롱보다 더 설득력 있는 생애전망이 필요하다. 20대 남성의 보수화는 방치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압의 언어로만 다룰 때 우리는 그들이 왜 그곳으로 갔는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는 용서가 아니다. 이해는 책임을 더 정확하게 묻기 위한 조건이다. 혐오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도 혐오의 조건을 분석해야 한다.
극우화는 논리 이전에 문화이고, 문화 이전에 상처이며, 상처 이전에 제도적 공백이다. 정준희는 이 문제가 사실과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밈과 태도의 문제라는 점을 날카롭게 짚었다. 그러나 그 다음 문장이 권력의 제압으로 너무 빨리 이동했다. 리브스가 필요한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밈으로 만들어진 태도는 단순 설득으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권력으로만 누르면, 그 태도가 자라난 외로움, 실패감, 생애 불안, 인정 욕구는 그대로 남는다. 민주주의는 혐오를 방치해서도 안 되지만, 혐오에 빠진 사람을 제압의 대상으로만 만들어서도 안 된다.정용주 서울천왕초교장 jyj@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