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앞 4년 피켓 시위 …여성투표권 얻어낸 A 폴 [사회혁신] 미국은 자유의 나라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자유의 나라에서 여자가 투표권을 달라고 백악관 앞에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끌려가 코에 고무관을 꽂아 생계란을 들이붓던 시절이 있었다. 그 수난을 당한 이가 앨리스 폴(Alice Paul, 1885~1977)이다. 퀘이커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침묵을 미덕으로 배웠지만, 정작 역사에 남긴 것은 백악관 앞에서 침묵으로 던진 가장 커다란 질문이었다.
앨리스 폴(위키피디아)
조용한 집안, 단호한 딸
폴은 뉴저지의 퀘이커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를 따라 여성참정권운동 모임에 드나들던 어린 시절부터 이미 싹이 보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복지 일을 해 보았지만 곧 결론을 내렸다.
사회복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자선으로 메워지는 빈 틈은 결국 법이 만든 구멍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이 한 줄의 깨달음이 평생을 관통한다.
1908년과 1915년 사이의 폴과 헬렌 가드너(위키피디아)
영국에서 배운 것, 감옥도 무대가 된다
학업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 폴은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Christabel Pankhurst, 1880 ~1958)의 연설을 듣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영국 여성사회정치동맹에 들어가 시위에 참여했고, 세 차례 체포되었으며, 단식으로 항의하다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처분까지 당했다. 이때 배운 것은 단 하나, 탄압이 클수록 여론은 약자 편에 선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이 전술을 고스란히 마음에 담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1915년의 폴(위키피디아)
백악관 앞, 말 없는 천 명의 사람들
1913년 윌슨 대통령 취임 전날, 폴은 수천 명을 모아 워싱턴 거리를 행진하게 했다. 기존 참정권 단체가 주마다 차근차근 설득하자는 느긋한 전략을 고집하자, 폴은 결별을 선택하고 전국여성당을 따로 세웠다. 1917년부터는 백악관 앞에 말없이 서서 팻말만 드는 침묵의 파수꾼 시위를 시작했다. 처음엔 다들 무시했지만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전쟁 통에 대통령에게 대드는 여자들은 불순분자로 몰렸고, 폴은 일곱 달 형을 선고받아 옥커쿼 노역장에 갇혔다.
감옥은 더럽고 추웠다. 단식으로 항의하자 정신병동으로 옮겨졌고, 코에 관을 넣어 계란을 강제로 흘려보냈다. 한 의사는 그녀를 두고 잔 다르크 같은 정신을 가졌다.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을 것 이라고 적었다. 같은 해 11월, 같은 감옥의 여성 서른 명이 간수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한 일이 알려지며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1920년, 미국헌법에 여성투표권을 보장하는 수정조항이 통과됐다.
폴이 조직한 1913년 여성 참정권 행진의 프로그램 표지.(위키피디아)
투표권 다음엔 평등, 그 다음엔 또 평등
많은 운동가가 투표권을 얻고 나면 짐을 싼다. 폴은 달랐다. 그녀는 곧바로 남녀평등 헌법수정안을 직접 써서 의회에 제출했다. 이 안은 1972년에야 의회를 통과했지만 비준시한이 붙은 채였고, 폴이 예견한 대로 시한을 채우지 못해 끝내 무산됐다. 사후에도 네바다, 일리노이 등이 뒤늦게 비준에 나섰지만 법적 효력 논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그녀는 또 1964년 민권법에 성차별 금지조항을 끼워 넣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에 남녀의 평등한 권리 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사람이기도 하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말년에는 재산까지 잃었지만 단 한 번도 목표를 바꾸지 않았다.
1920년 8월 26일, 수정헌법 제19조 통과를 기념하며 포도 주스로 건배하는 폴(위키피디아)
한국에 던지는 질문
폴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묘하게 익숙한 장면들이 떠오른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이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거리로 나온 시민들의 모습과, 백악관 앞에서 말없이 팻말을 들고 버틴 사람들의 모습은 시대도 나라도 다르지만 같은 질문을 던진다. 권력이 헌법 위에 서려 할 때,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저항은 무엇인가.
폴이 보여준 것은 단발성 분노가 아니라 끈기였다. 한 번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그 다음 목표, 그 다음 헌법조항까지 밀고 나간 집요함이다. 한국사회도 이번 내란사태 이후 책임자 처벌과 재발방지를 외치고 있지만, 분노가 가라앉으면 흩어지는 운동의 한계를 우리는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투표권을 얻은 뒤에도 50년을 더 싸운 폴처럼, 제도가 바뀐 뒤에도 그 제도가 실제로 지켜지는지 끝까지 따라가는 끈기가 필요하다.
또 하나, 폴은 같은 여성운동 안에서도 보호입법을 둘러싸고 동료들과 정면으로 갈라섰다. 그녀는 여성을 보호 한다는 명분의 법이 결국 여성의 기회를 제한한다고 믿었다. 진보진영 내부의 분열을 무조건 약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원칙을 둘러싼 건강한 논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한국의 진보정치가 늘 통합을 외치면서도 정작 핵심의제 앞에서는 갈라서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는 점에서, 폴의 사례는 분열 자체보다 무엇을 위해 분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러준다.
1920년 앨리스 폴(오른쪽)의 첫 대통령 선거 투표 모습을 담은 삽화. 그녀는 워싱턴 DC에서 함께 참정권 운동을 벌인 캐서린 플래너건 앞에서 한 표를 행사했는데 그녀의 한 표는 뉴저지 고향으로 송부됐다. (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