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승만 과 버텨낸 처칠, 전쟁통 두 지도자 엇갈린 선택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같은 해에 세상 등진 두 지도자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을 읽는다. 눈이 이승만(1875~1965) 대목에 멈췄다. 묘하게도 영국의 전시 수상 윈스턴 처칠(1874~1965)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나, 같은 해에 세상을 떴다. 한 사람은 전쟁 중에 수도를 끝까지 지키다 선거로 물러난 지도자로 기억되고, 다른 한 사람은 혼자 달아나 다리를 끊고 돌아와 남겨진 국민을 부역자로 잡아 죽인 지도자로 역사에 남았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이보다 극명하게 갈린 두 삶이 또 있을까?
이승만(위키피디아)
처칠은 지하 벙커에서 버텼고, 이승만은 한강 다리를 끊었다
1940년 5월 10일, 처칠이 영국 총리가 된 날 독일군은 프랑스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영국 공습이 시작됐을 때 조지 6세(1895~1952)와 엘리자베스 왕비(1900~2002)는 버킹엄 궁을 떠나지 않았다. 처칠은 지하 벙커에서 국민에게 말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고, 들판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말뿐이 아니었다. 처칠은 독일의 폭격이 쏟아지는 영국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이승만 정부의 방송은 국군이 북진 중이니 안심하라 고 외쳤다. 국민들은 방송을 믿고 짐을 싸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6월 27일 밤 몰래 서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28일 새벽 2시 30분, 예정보다 4~5시간 앞당겨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다리 위에 있던 피란민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100만 명 이상의 서울 시민이 강 이쪽에 갇혔다. 온라인 세대가 그를 런(Run)승만 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다. 사실의 요약이다.
처칠의 전쟁 리더십에 흠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1943년 식민지 인도에서 수백만 명을 굶겨 죽인 벵골 대기근에 책임이 있고, 아일랜드와 팔레스타인에서도 피를 묻혔다. 그러나 적어도 자국민에게 버텨라 고 말하며 자신이 먼저 버텼다. 이승만은 버텨라 고 방송하고 자신이 먼저 달아났다. 전쟁 중 지도자에게 가장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윈스턴 처칠(위키피디아)
처칠은 선거에서 졌고, 이승만은 다리를 끊었다
처칠 리더십의 역설은 전쟁이 끝난 직후에 있다. 1945년 7월, 독일이 패망한 지 두 달도 안 됐을 때 영국에서 총선이 열렸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처칠의 보수당은 뜻밖에도 참패했다. 노동당이 압승했다. 처칠은 조용히 권좌를 내놓았다. 비록 그는 1951년 총선에서 다시 총리가 되지만, 1945년의 그 장면은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역사에 기록됐다. 국민이 영웅을 퇴장시켰고, 영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승만은 달랐다. 그는 영구집권을 위해 두 번 헌법을 갈아엎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는 전쟁 중 피란수도 부산에서 야당의원들이 탄 버스를 헌병대가 크레인으로 끌어다 가두었다. 이른바 국제공산당 사건 을 조작해 반대파를 간첩으로 몰았다. 그리고 기립 표결이라는 희대의 방식으로 직선제 개헌을 강행했다. 부통령 김성수(1891~1955)는 이를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쿠데타 라 비판하며 사퇴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멈추지 않았다.
1954년에는 사사오입이라는 기적 의 논리가 등장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 제한을 폐지하는 개헌안이 표결 결과 재석 203명 가운데 찬성 135표로 부결됐다. 개헌안 가결에 필요한 의결 정족수는 재적 3분의 2, 즉 136명이었다. 부결이 선포됐고 이틀 뒤, 자유당은 135.33…은 사사오입하면 135 라며 개헌 가결로 번복했다. 국민들은 이 황당한 수학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처칠이 이 소식을 들었다면 위스키 한 잔을 든 채 혀를 찼을 것이다.
1893년, 도동(桃洞)서당 시절 이승만(오른쪽)이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서당 친구 김홍서와 함께 촬영에 응하고 있다.(위키피디아)
친일파 청산 실패, 해방의 과실은 누구에게 돌아갔는가
영국에서 한국 현대사를 바라볼 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친일부역자를 청산할 기회가 있었다. 국민들이 요구했고, 국회가 움직였다.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출범해 친일경찰 노덕술(1903~1968) 등을 체포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노덕술 석방을 종용했다. 1949년 6월 6일에는 서울 중부경찰서장 윤기병 등 친일경찰 출신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특경대원을 연행했다. 이승만은 이를 내 명령에 의한 것 이라고 외신기자에게 직접 밝혔다. 반민특위는 이렇게 죽었다.
그 결과는 냉혹했다. 일제 경찰 출신들이 대한민국 경찰의 핵심을 차지했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손이, 이제 빨갱이 를 고문하는 손이 됐다. 기술이 바뀌었을 뿐, 손은 바뀌지 않았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이 기록하는 312명의 반헌법행위자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이 계보에서 나왔다.
처칠의 영국이 전쟁 직후 독일 전범을 뉘른베르크 법정에 세웠을 때, 이승만의 대한민국은 일제의 협력자들을 정부 요직에 앉혔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부르기엔 너무 뼈아프다.
1889년 윈스턴 처칠(오른쪽)이 어머니 제니 스펜서, 동생 잭과 함께 촬영에 응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민간인 학살, 이름을 되찾아야 하는 죽음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승만 항목에서 냉정하게 기록한다. 한국전쟁 전후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는데, 학계는 학살 피해자의 80% 이상이 이승만 정권이나 그 비호를 받은 극우단체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고 있다. 1948년 제주 4·3에서는 계엄법도 없는 상태에서 계엄령을 선포해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보도연맹 학살, 부역자처벌, 1951년 거창양민학살이 이어졌다.
그리고 1951년에는 국민방위군사건이 터졌다. 60만 명 이상의 청장년이 징집됐으나 이승만 정권의 무책임과 지도부의 부정부패 때문에 굶주림과 추위 속에 6만~9만여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전쟁 중 한 나라의 군대가 자국 군인을 이렇게 죽인 사례가 세계사에 또 있었을까?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로 추앙하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시각은 편리하게도 위의 죽음들을 지운다. 역사란 기억하는 것과 지우는 것 사이의 싸움이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지워진 죽음에 이름을 돌려주는 작업이다.
1950년 12월, 이승만 대통령과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장군. 워커 장군은 같은 달 23일 서울 북방전선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 워커힐 호텔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위키피디아)
조봉암 사법살인, 정적은 법원에서 죽인다
이승만의 통치 기술 중 가장 세련된(?) 것이 있다면 법원을 활용한 정적 제거였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후보 조봉암(1898~1959)은 200만 표 이상을 얻으며 이승만의 강력한 도전자로 부상했다. 이승만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 조작하고,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켰다. 1959년 7월의 일이다.
나중에 2011년 재심에서 대법원은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52년 만의 일이었다. 법원이 죽이고, 법원이 살린 이 기막힌 순환. 그 사이에 조봉암은 이미 냉혹하게 죽어 있었다.
처칠에게도 정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정적을 간첩으로 조작해 교수대에 올리지는 않았다.
처칠이 1941년 나치 독일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코벤트리 대성당을 돌아보고 있다.(위키피디아)
4월 혁명 - 학생들이 이겼고, 이승만은 달아났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공개·대리·완장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등 말 그대로 총동원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실종된 김주열(1943~1960)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분노한 국민이 거리로 쏟아졌다.
4월 19일, 대학생들이 경찰의 발포에도 청와대를 향해 행진했다. 이날 186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왔다.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다리를 끊고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 국민을 잡아 죽인 그를 국민이 다시 내쫓은 것이다. 그러니 4월 혁명은 혁명 이었다. 국민이 스스로 해방된 것이다.
그리고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했다. 다시 런 을 했다. 귀국을 원했으나 박정희(1917~1979) 정권이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했다.
1960년 5월 29일자 경향신문. 당시 석간으로 발행됐다.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뒤 하와이로 망명하는 모습을 보도했다.(위키피디아)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이승만은 정말 과거인가?
영국에서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영국은 처칠의 과오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토론한다. 처칠의 동상 앞에 인종차별주의자 라고 적은 사람들이 2020년 시위를 벌였고, 영국 의회와 언론은 이를 진지하게 다뤘다. 역사의 영웅도 비판의 예외가 아니라는 문화가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 으로 미화하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이승만기념관 건립이 추진된다. 친일청산을 무너뜨리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헌법을 두 번 갈아엎은 사람에 대해 기념관 이라니.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나는 영국에서 생중계를 보았다. 계엄군이 국회로 향하는 장면에서 나는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헌병대 크레인이 국회의원 버스를 끌어가던 장면을 떠올렸다. 이승만은 죽었지만, 그의 문법은 살아남아 있었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이 2024년 12월 3일 이후에 나온 것이 너무 늦었다고 탄식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책은 과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경고한 것이었다.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위키피디아)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처칠은 1965년 1월 24일 사망했다.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지구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것은 전혀 달랐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승만을 분단으로 집권한 제왕적 대통령 으로 규정하며 그의 반헌법 행위를 차곡차곡 기록했다. 냉전에 편승한 단독정부 수립, 친일세력 비호, 제주 4·3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부산 정치 파동과 사사오입개헌, 조봉암 사법살인, 3·15 부정선거. 이 목록을 읽다 보면 한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많은 것을 망가뜨릴 수 있었는가 싶어 아찔해진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이승만은 현실의 법정을 피해 하와이에서 죽었다. 그러나 역사의 법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열려 있다. 그리고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2026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는 이승만이 차에서 내려 비행기 쪽을 바라보고 있다.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