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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길 위의 진리, 예수의 나를 따르라 와 부처의 도(道)

길 위의 진리, 예수의 나를 따르라 와 부처의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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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pixavay.com 1. 길 위에서 시작된 물음 ― 떠남과 만남의 영성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대부분 길 위에 있었다. 그들은 궁전이나 성전, 제도화된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길 위에서 사람을 만나고, 길 위에서 질문을 던지고, 길 위에서 답을 찾았다. 예수도 그러했고, 부처도 그러했다. 그들의 삶은 정착이 아니라 이동이었고, 소유가 아니라 비움이었으며, 고정된 교리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길 자체였다. 길은 그들에게 배경이 아니라 본질이었고, 통로가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었다. 예수는 갈릴리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하여 광야를 지나고, 호숫가와 들판, 마을과 도시를 이어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의 발걸음은 언제나 사람을 향해 있었고, 특히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의 곁을 향했다. 세리와 죄인, 병든 자와 가난한 자, 이름 없이 살아가던 이들이 그의 길 위에서 새롭게 불렸다. 그는 길 위에서 제자를 부르고, 길 위에서 병자를 고치고, 길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의 가르침은 특정 장소에 묶이지 않았고, 살아 있는 만남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났다. 그는 제자들에게 책을 주지 않았다. 대신 길을 함께 걷자고 초대했다. 나를 따르라”는 그의 말은 지식을 배우라는 요청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요구였다. 따름은 곧 이동이며, 이동은 곧 변화를 의미한다. 한 자리에 머무르는 사람은 기존의 세계관 속에 머물지만, 길을 따라 나서는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가르침을 이해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길을 함께 걸었기 때문이다. 부처 또한 길 위에서 자신의 삶을 완성해 갔다.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한 그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길을 떠났다. 그는 스승을 찾아다녔고, 수행을 반복했으며, 극단적인 고행까지 경험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깨달음 이후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는 숲과 마을,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길을 전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道)’는 머릿속에서 완성되는 개념이 아니라 삶 속에서 드러나는 실천이다. 도는 말로 설명될 수 있지만, 설명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걸어야만 보이고, 실천해야만 이해되는 것이 도다. 그래서 부처는 설법을 하면서도 언제나 수행을 강조했다.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삶 속에서 점차 깊어지는 것이다. 예수와 부처의 삶을 함께 바라보면,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드러난다. 그것은 ‘길 위의 진리’다. 그들은 진리를 소유하지 않았다. 대신 진리와 함께 걸었다. 진리는 그들에게 고정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드러났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 갈등, 치유와 용서의 사건들이 곧 진리의 표현이었다.   사진=pixavay.com 길 위에 선다는 것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나아가야 함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완성된 상태를 주장하는 순간, 길은 멈춘다. 그러나 길 위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완성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늘 배우는 존재이며, 늘 변화하는 존재다. 그래서 길은 겸손과 깊이 연결된다. 또한 길은 관계를 만든다. 길 위에서는 낯선 이들이 서로를 만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예수의 사역은 만남의 연속이었다. 우물가의 여인, 길가의 맹인(시각장애인), 세리의 집에서의 식사, 병자와의 접촉. 이러한 만남들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다. 부처 역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펼쳐 나갔다. 왕에서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길 위에 등장했다. 길은 또한 위험을 동반한다. 익숙한 자리를 떠나는 순간, 우리는 불확실성과 마주하게 된다. 예수는 정해진 거처 없이 떠돌았고, 때로는 배척과 위협을 받았다. 결국 그는 십자가라는 극단적인 죽음에 이르렀다. 부처 또한 출가 이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고, 끊임없는 수행과 이동 속에서 삶을 이어갔다. 길 위의 삶은 안전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 위험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불교의 도는 흐름이다. 그것은 고정된 목적지이면서 동시에 과정이며, 시작이면서 끝이다. 도는 어떤 한 지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움직인다. 인간은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세계와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도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참여해야 하는 과정이다. 예수 역시 자신을 길”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매우 깊은 선언이다. 그는 진리를 설명하는 교사가 아니라, 진리 자체로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의 삶 전체가 메시지였고, 그의 걸음 하나하나가 가르침이었다. 그는 사랑을 말했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했고, 용서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용서를 실천했으며, 비움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그것을 드러냈다. 길 위에서의 삶은 속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방향을 묻는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그 길을 선택했는가가 중요하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바르게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수와 부처는 모두 이러한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끝까지 걸어갔다.   사진=pixavay.com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길 위에서 살아간다. 기술의 발전으로 이동은 쉬워졌지만, 삶의 방향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선택지는 많아졌지만, 선택의 기준은 흐릿해졌다. 이런 시대일수록 길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길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과 행동 속에서 형성된다. 예수와 부처가 보여준 길은 특정 종교에 갇혀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에서 비롯된 길이다. 사랑하고, 비우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도이며, 동시에 복음이다. 이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특정한 장소로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 바로 그곳에서 길은 시작된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길은 열린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가 아니라, 방향을 정하고 나아가는 용기다. 예수의 제자들도, 부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길 위에서 변화되었고, 길 위에서 성장했다. 길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 이어진다. 한 사람의 삶을 넘어,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 예수와 부처가 걸었던 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있다.   2. 도(道), 걷는 자에게만 열리는 진리 ― 실천과 선택의 길 ‘도(道)’라는 말은 오래된 언어이지만,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도는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며, 존재의 근거이자 실천의 방식이다. 그것은 이론으로 완결되는 개념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도는 언제나 ‘걷는 자’에게만 열려 있다. 아무리 많은 설명을 듣고, 수많은 책을 읽어도 직접 걷지 않는다면 도는 여전히 닫혀 있는 상태로 남는다. 부처가 제시한 팔정도는 이러한 도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바른 이해에서 시작하여 바른 집중에 이르기까지, 이 여덟 가지 길은 인간의 인식과 말과 행동, 생계와 마음까지 모두 아우른다. 이는 특정 영역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길이다. 바르게 본다는 것은 세계를 왜곡 없이 바라보는 것이며, 바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욕망과 집착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을 의미한다.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책임을 지는 삶을 뜻한다. 바른 생계는 자신의 삶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바른 노력과 마음챙김, 집중은 내면을 끊임없이 정화하고 깨어 있도록 유지하는 수행이다.   사진=pixavay.com 이 길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선택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어제 바르게 살았다고 해서 오늘도 저절로 바르게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도는 언제나 현재형이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길은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그래서 도는 긴장과 깨어 있음의 상태를 요구한다. 예수의 가르침 역시 이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는 사랑을 말하면서 그 사랑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확장시켰다. 이웃 사랑에 머물지 않고, 원수 사랑까지 요청했다. 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과는 충돌하는 요구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길은 갈라진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삶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더 넓은 관계 속으로 나아갈 것인가의 선택이다. 예수는 후자를 선택하도록 요청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용서를 강조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그의 말은 인간의 계산적 사고를 넘어서는 요구다. 용서는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며,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선택이다. 그러나 그 길을 걸을 때 인간은 새로운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미움과 원한에 묶여 있던 마음이 풀리고, 관계는 다시 회복의 가능성을 얻게 된다. 도는 이러한 해방의 경험을 통해 점점 더 깊어지는 길이다. 도는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갈림길에 선다.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할 것인가,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유혹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이러한 작은 선택들이 쌓여 하나의 방향을 형성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큰 결단만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실제로 삶을 형성하는 것은 반복되는 작은 선택들이다. 도는 바로 그 지점에서 드러난다. 예수와 부처가 걸었던 길을 보면, 그들의 위대함은 특별한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지속성 속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극적인 사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일상의 사소해 보이는 순간에서도 자신의 길을 놓치지 않았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쳤고, 예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과 용서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관성은 도가 삶 전체를 관통할 때 가능해진다. 현대 사회는 결과 중심의 사고에 익숙하다. 무엇을 이루었는가, 얼마나 성공했는가, 얼마나 빠르게 도달했는가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기준은 본질적인 질문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가, 어떤 태도로 선택을 해왔는가이다. 결과는 외부의 평가에 의해 결정되지만, 길은 자신의 내면에서 형성된다.   사진=pixavay.com 걷는다는 행위는 이 점에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걷기는 한 걸음씩 이어지는 과정이다. 지름길을 찾거나 단계를 건너뛸 수 없다. 발을 내딛는 만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느림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주변을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도 역시 이와 같다. 빠르게 도달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한 걸음씩 충실하게 나아갈 때 비로소 길은 모습을 드러낸다. 예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이 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종종 다투었고, 누가 더 큰지 경쟁했으며, 위기의 순간에는 도망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돌아왔다.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은 점차 변화되었다. 부처의 제자들 또한 수행과 좌절을 반복하며 조금씩 깨달음에 가까워졌다. 이처럼 도는 완벽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걸어가는 사람에게 열리는 길이다. 도는 겸손을 요구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계속해서 배우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길은 닫힌다. 반대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나아갈 때, 길은 다시 열리기 시작한다. 겸손은 도의 출발점이자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또한 도는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변화시킨다. 내면의 변화 없이 외적인 행동만 바뀌는 것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고, 외적인 실천 없이 내면의 깨달음만을 강조하는 것도 현실과 분리될 위험이 있다. 부처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은 모두 이 두 가지를 함께 요구한다. 마음의 변화와 삶의 실천이 서로 연결될 때, 도는 온전히 구현된다. 우리는 이미 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그 결과로 형성된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무의식적 삶은 길을 잃어버린 상태와 다르지 않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을 자각하고, 그 방향을 성찰하는 것이다. 도는 멀리 있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는 현실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가, 어떤 태도로 타인을 대하는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 이러한 모든 순간들이 도를 형성한다. 그래서 도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실천이다. 예수와 부처는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길을 대신 걸어주지는 않는다. 각자는 자신의 발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겠지만, 다시 일어나 걸어갈 때 길은 계속 이어진다. 도는 완성된 지점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열리는 길이다. 결국 도는 ‘어디에 도달했는가’보다 ‘지금 어떻게 걷고 있는가’를 묻는다. 우리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우리 앞에 열려 있다.   예수기도를 바치며 숲길을 걷는다. 사진=박철 시민기자   3. 다시 길 위에 서다 ― 오늘 우리의 깨어 있는 삶 오늘 우리는 과연 길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이미 길을 잃고도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가. 눈을 뜨면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선택의 가능성은 끝없이 확장되어 있지만, 정작 삶의 방향에 대해서는 깊이 묻지 않는 시대를 우리는 지나고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 채 빠르게 움직이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길’을 다시 묻는 일은 사유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존재의 근원을 되찾는 작업이다. 예수와 부처의 삶은 과거의 유산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길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 존재의 깊은 구조를 바라보았다. 인간이 겪는 고통과 갈등, 욕망과 두려움, 사랑과 죽음의 문제는 시대가 변해도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제시한 길 또한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그 길은 특정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해야 할 삶의 방향을 가리킨다. 우리가 다시 길 위에 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삶의 기준을 새롭게 세운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던 가치들을 다시 점검하고, 내가 어디를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묻는 일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성공, 경쟁, 효율, 속도와 같은 가치들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들이 과연 인간을 온전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질문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는 ‘깨어 있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깨어 있다는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힘이며,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간다. 화가 나면 그 감정에 잠식되고, 욕망이 생기면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달려간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스스로 길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끌려가는 삶에 가깝다. 깨어 있음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네팔 랑탕트래킹 때의 박철 시민기자 예수의 가르침 또한 깨어 있는 삶을 강조한다. 그는 늘 준비된 상태를 요구했다.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의 비유나, 맡겨진 것을 충실히 감당하는 종의 이야기는 모두 의식적인 삶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무심코 흘러가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삶. 그것이 바로 길 위에 서 있는 삶이다. 길은 혼자만의 여정이 아니다. 예수는 제자들을 불러 공동체를 이루었고, 부처 또한 승가를 형성하여 함께 수행하는 삶을 강조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며, 길 또한 관계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혼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자신의 모습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그 속에서 우리는 배우고 성장한다. 공동체는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이며,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깊은 분열과 갈등 속에 놓여 있다. 생각이 다르면 적이 되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쉽게 등을 돌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이념이나 구호가 아니라, 다시 길을 세우는 일이다. 사랑과 자비, 정의와 책임의 길을 다시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길은 거창한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아침에 눈을 뜨며 어떤 마음을 품는가, 가족과 동료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러한 선택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결국 하나의 길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길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는 현실이다. 예수는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우리의 행동이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부처 또한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한 존재의 고통은 다른 존재와 무관하지 않으며, 한 사람의 선택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통찰은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길에는 책임이 따른다. 어떤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도 영향을 받는다. 이기적인 선택은 관계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약화시킨다. 반대로 배려와 나눔의 선택은 관계를 회복시키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든다. 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길은 용기를 요구한다. 익숙한 방식을 내려놓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며, 외로운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걸었고, 부처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출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들의 삶은 결코 편안한 여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해 인류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는 완전한 준비가 이루어진 후에 길을 떠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완벽한 조건이 아니라 방향이다.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방향이 분명하다면, 과정 속에서 점차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 길은 걷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길을 걷다 보면 때로는 멈추고 싶을 때도 있고, 되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다.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길은 이어진다. 예수의 제자들도 수없이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났고, 부처의 제자들도 수행 속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길은 완벽한 사람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계속해서 나아가는 사람을 기다린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방향을 잃게 된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선택을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다시 설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길 위에 서는 시작이다. 예수도 부처도 길 위에 있었다. 그들은 길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그 길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길은 지금도 우리 앞에 열려 있다. 그것은 특정한 사람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이다. 우리는 이미 그 길의 입구에 서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다.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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