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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닫으면 역사가 열린다…목 날아간 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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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곧 국가  믿었던 왕, 결국 처형되다 역사에는 가끔 이런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이 특별히 선택받은 존재라고 철석같이 믿고, 그 믿음이 너무 강해 눈앞의 현실이 아무리 세게 뺨을 때려도 정신을 못 차린다.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가 딱 그런 인물이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세 나라의 왕이었다. 왕관이 세 개였으니 얼핏 보면 엄청난 성공 같지만, 결말은 단두대 위에서 목이 잘리는 것이었다. 서유럽의 군주가 자국 법정에서 공개재판을 받고 처형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역사의 충격파가 얼마나 컸는지, 당시 유럽 각국의 왕들은 이 소식을 듣고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고 전해진다. 당연하다. 남의 집 불구경을 할 처지들이 아니었으니.   찰스 1세 초상화(위키피디아) 왕위에 오르기도 전부터 예고된 불행 찰스 1세의 아버지는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다. 부친도 만만치 않다. 왕권신수설의 열렬한 지지자였는데, 쉽게 말하면 나는 신이 내려 보낸 존재이므로 내 말이 곧 법 이라는 주장이다. 아버지에게서 이 사상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찰스는 한술 더 떴다. 아버지는 그래도 말로만 떠들었는데, 찰스는 몸으로 실천했다. 1625년 왕위에 오른 찰스는 취임 첫 해부터 의회와 충돌했다. 전쟁비용이 필요하자 의회에 세금을 요청했는데, 의회가 그 돈 어디 쓸 건지 먼저 말해봐 라고 하자 찰스는 왕이 쓴다는데 그게 중요하냐 며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다. 이런 짓을 무려 세 차례나 반복했다. 1629년부터 아예 11년 동안은 의회를 열지 않았다. 이 시기를 역사가들은 전제 통치 11년 이라 부른다.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냥 독재 11년이다.   시몽 드 파세가 1612년경에 제작한 찰스 1세와 그의 부모인 제임스 왕과 앤 왕비의 초상화(위키피디아) 세금 폭탄과 종교 강요, 민심 잃는 두 지름길 의회 없이 나라를 운영하려니 돈이 문제였다. 찰스는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세금을 긁어모았다. 그중 백미는 선박세 (ship money)다. 원래 해안 지역이 적의 침입에 대비해 내던 세금이었는데, 찰스는 이걸 내륙 지역에까지 확대했다. 바다도 안 보이는 동네에 선박세라니. 이건 마치 논밭만 있는 농촌에 항만 이용료를 매기는 격이다.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만하다. 여기에 종교 문제까지 겹쳤다. 찰스의 아내는 프랑스 출신 가톨릭 신자 헨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 1609~1669)였고, 찰스 본인은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스코틀랜드에까지 강요하려 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자들 입장에서 이건 그냥 종교탄압이었다. 1637년 에든버러의 한 교회에서 새 기도서를 낭독하자 신도들이 의자를 집어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의자 투척은 스코틀랜드식 민의(民意)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왕자 시절의 찰스 초상화, 1623년 경(위키피디아) 내전, 그리고 왕의 첫 번째 패배 결국 1642년 내전이 터졌다. 찰스가 이끄는 왕당파(Cavaliers)와 의회파(Roundheads)가 맞붙었다. 의회파 군대를 조직하고 이끈 인물이 바로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다. 시골 출신 하급 귀족이었던 크롬웰은 철기군(鐵騎軍)이라는 정예 기병대를 만들어 왕당파를 연거푸 격파했다. 1645년 네이스비(Naseby) 전투에서 왕당파는 결정적으로 무너졌다. 찰스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는데, 스코틀랜드가 그를 의회파에 팔아넘기는 굴욕을 당했다. 돈 받고 왕을 넘기다니. 충성심이 은화 몇 닢에 팔리는 세상이었다. 찰스는 포로가 됐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 세력과 몰래 손잡고 2차 내전을 일으켰다. 이 배신 행위가 결국 그의 목을 조였다.   찰스 아내인 프랑스 출신 가톨릭 신자 헨리에타 마리아 초상 1632년.(위키피디아) 재판, 그리고 목이 날아간 날 1649년 1월에 역사상 전례 없는 재판이 열렸다. 왕을 피고석에 세운 것이다. 찰스는 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법정은 불법이다. 어떤 법도 왕을 재판할 수 없다 고 버텼다. 어쩌면 그 말이 당시 법리로는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이따금 법리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런던 화이트홀(Whitehall) 앞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그의 나이 마흔여덟. 목격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처형 직전 나는 백성의 자유와 권리를 원하나, 통치권은 왕에게 있어야 한다 고 말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 논리를 놓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게 그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   찰스의 초상화 1628년(위키피디아) 그 뒤 공화정, 다시 왕정, 그리고 명예혁명 찰스 처형 후 잉글랜드는 공화정이 됐고 크롬웰이 사실상 독재자가 됐다. 그런데 이게 또 문제였다. 크롬웰은 청교도적 엄숙주의를 강요하며 극장, 술집, 심지어 크리스마스 축제도 금지했다. 자유를 위해 왕을 처형했더니, 자유를 억압하는 새 독재자가 나온 것이다. 혁명의 아이러니다. 크롬웰이 1658년 죽자 공화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1660년 찰스의 아들 찰스 2세(1630~1685)가 왕위를 되찾았다. 하지만 역사의 시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1688년 명예혁명 으로 의회의 권한이 왕권 위에 서게 됐고, 영국은 의회 민주주의의 토대를 굳혔다. 찰스 1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물론 찰스 본인에게는 매우 헛되었지만.   루벤스는 1629년과 이듬해 사이에 영국 풍경을 배경으로 찰스를 승리감에 넘치는 기사도 정신을 지닌 성 조지로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다.(위키피디아)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배우지 않는 자에게만 이 오래된 영국 이야기가 지금 한국과 무슨 상관이냐고? 상관이 아주 많다. 찰스 1세가 몰락한 이유는 단순하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썩고, 썩은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는 의회를 귀찮은 장애물로 여겼다. 자신의 결정에 토를 달면 해산시켜 버렸다. 법보다 자신이 위에 있다고 믿었다. 민심이 떠나도 신이 자기 편이라 믿었다.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이 패턴이 낯설지 않다. 헌법 위에 군림하려 한 권력자들이 어떻게 됐는지,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목격했다. 1987년 민주화, 2016~2017년 촛불혁명,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내란 등 최근까지도 이어지는 권력과 민주주의의 긴장 관계, 역사는 다른 옷을 입고 반복된다. 찰스 1세 때의 의회는 지금의 국회, 언론, 시민사회에 해당한다. 이 견제기관들이 살아있어야 민주주의가 산다. 찰스가 의회를 11년 문 닫게 했을 때 나라가 어떻게 됐는지 우리는 안다. 견제 없는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300년도 더 전의 영국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생생하게 일러준다. 또 하나. 찰스는 자기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정에서도, 단두대 앞에서도. 내가 틀린 게 아니라 세상이 틀렸다 는 태도. 이 오래된 병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유난히 자주 걸리는 병이다. 그리고 역사는 늘 그들에게 냉정한 최후를 선물했다.   찰스의 초상화 1631년경(위키피디아) 목 없는 왕의 교훈 찰스 1세는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교과서적인 인물이다. 그의 삶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는 명제를 몸으로 증명해 보인 역설적 헌신이었다. 자기 의지로 증명한 게 아니라, 역사가 그를 붙잡고 강제로 증명시켰다는 점에서 더욱 씁쓸하지만.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찰스가 아니다. 의자를 집어 던진 스코틀랜드 신도들, 부당한 세금에 분노한 평범한 백성들, 그리고 왕을 법정에 세우는 전례 없는 용기를 낸 의회파 사람들이다. 역사는 왕이 만드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 왕을 끌어내린 보통사람들이 만든다. 300년 전 런던의 단두대 앞에서 울려 퍼진 군중의 탄식과 함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민주주의는 쟁취한다고 영원한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 교훈을 가르쳐 준 값으로, 찰스 1세는 머리 하나를 치렀다. 꽤 비싼 수업료였다.   런던 화이트홀 연회장 밖에서 찰스 1세가 참수당하는 모습을 묘사한 당시 판화(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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